문성근은 까다로운 인터뷰 상대다. 논리적이고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달변가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주제에 대해 날카로운 관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에게 <한반도>에 대해 묻는 일은 단순히 배우에게 자신의 출연작을 묻는 일 이상의 대답을 기대하게 했다. 현직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정치적인 기여를 했던 한 배우가 극중에서 대통령에게 철저히 반대하는 총리 역을 맡은 심경은 어떠할까. 그는 데뷔 이후 줄곧 충무로에서 냉소적이고 뒤틀린 지식인 연기의 전범처럼 여겨졌다. 그러한 문성근이 논란의 블록버스터 <한반도>에 출연한 이유와 스물한 번째 주연작으로 21년차를 맞이한 배우로서의 입문기와 여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반도>라는 격한 내용의 영화에 배우 문성근이 출연한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다.
=대본을 배우에게 주고 4∼5일 정도 있다가 묻는 게 일반적인 출연과정이다. 그런데 <한반도>라는 제목도 엄청난 대본을 강우석이 전하기에 받자마자 바로 다 읽었다. 강 감독이 대뜸 “흥행의 한을 풀어야지”라고 했다. 내가 출연했던 <경마장 가는 길> <세상밖으로>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200만∼300만쯤 되는 흥행작이다. 강 감독과 두편을 같이 했는데 흥행은 별로 안 좋아서 그런 말을 했겠지. 우석이가 “형 때문에 안 되나?”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웃음) 내적으로는 강 감독이 작심하고 진지한 화두를 던지는 영화라서 반가웠다. 그는 곡절도 많았지만 사업적으로만 보면 손 털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단순히 웃고 마는 영화보다 의미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고 그게 점점 더 강해져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런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그 뒤에는 주어진 배역이 가진 매력을 판단하는 일만 남았다. 배우 입장에서 총리 역은 지금까지 했던 역할보다 훨씬 속시원하게 할 수 있었다. 일단 주저하는 게 없잖아. 그냥 직설적으로 달려가니까.
-<한반도>는 흥행도 잘되지만 논란도 많다. 전작과 비교하면 강우석 감독 특유의 재미는 줄고 강변만 늘었다는 지적도 많다. 화두는 이해가 되지만 화법이 여유가 부족하고 주장만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반도>는 제작비 100억원 안에서 끝냈지만 일본시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영화다. 그럼 손익분기점이 450만명 언저리다. 450만명이 봐야 할 영화라면 상업영화의 구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강 감독이 제시한 화두를 살리기 위해 경의선, 국새를 설정으로 놓았다. 화두를 선의로 받아들이면 설정도 호의적으로 보는 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핵발전소를 만드는 현실이 있다. 기름도 없고 수력 발전도 30%에 못 미치는 게 북의 상황이다. 그런데 그걸 만들려면 6자가 모여야 한다. 이 복잡한 정치구조를 450만명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일이 강 감독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 <공동경비구역 JSA> <비단구두>처럼 여러 형태가 있지만 450만명을 감안하고 강 감독이 고려할 수 있는 만듦새의 폭은 상당히 좁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화두와 설정을 양해하면 <투캅스>보다는 재미없을지 몰라도 상당히 수긍할 수는 있지 않을까. 굉장히 괴로워하면서 찍더라. 늘 즐겁게 찍던 사람이 <한반도> 촬영 내내 진지하게 임했다. 450만 관객을 불러놓고 찍는 심정이니까 괴로웠겠지. 이제는 강우석이 그런 화두를 포장해서 내놓은 결과를 관객이 어떻게 평가할지만 남았다.
-촬영 도중에도 그런 접근방식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최민재(조재현)가 국새에 관한 브리핑을 하는 각료회의 장면이 있다. 실제 각료회의는 그렇게 안 하거든. 마이크가 있고 버튼을 누르고 이야기하면 된다. 마이크가 소품으로 있는데도 그걸 안 썼다. 회의실이 150평이 넘는 넓은 공간인데 20m 거리에서 마이크를 안 쓰고 육성으로 대통령(안성기)에게 보고를 한다. 그러면 말이 굉장히 거리감이 있어야 한다. 영화 전체를 그렇게 전개하면 듣는 입장에서는 피곤할 수 있다. 하지만 의미 전달을 하려면 연극적인 어조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배우는 이른바 매번 발성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다보니 어조가 뻑뻑하고 설교하는 느낌이 된다. 평소라면 “이게 국새라는 게 이렇게 접히걸랑요”라면 된다. (웃음) 그러면 저쪽에서는 “쟤가 뭐라고 웅얼거리냐”라고 하겠지. 그러니까 (입에 힘을 주고) “국쌔는~”이라고 발음한다. (웃음) 현장에서 마이크를 쓰는 게 사실적이라고 강 감독에게 제안했던 적이 있다. 그러자 강 감독은 “현실의 리얼리티와 영화의 리얼리티가 다르다. 안 그래도 복잡한 이야기를 마이크로 주야장천하면 그걸 누가 듣나?”라고 답하더라. 그런 건 일종의 선택이었다.
-450만명이라는 산업적 기준과 화두를 던진다는 영화적 기준이 충돌할 수 있다. 지나치게 선동적인 어조라고 생각하지 않나.
=남북을 제외하면 4자가 존재하는 현실이 있다. 영화에서 처음 경의선 문제가 제기되고 각료회의를 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4자 이야기가 나온다. <한반도>는 그것이 나중에 일본으로 수렴되는 이야기구조다. ‘한반도에서 사는 것은 외세와 함께 사는 것이다’라는 주제를 4자를 모두 끌어들여 풀어내는 건 영화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집중하는 취사선택을 했다고 나는 짐작한다. 대통령과 총리의 갈등을 보여주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견해 사이에는 수도 없이 많은 중간지점이 있겠지만 상업영화에서 그것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격하게 두 사람의 입장을 세우고 충돌시키는 단순화는 불가피했다.
-완성된 <한반도>를 보고 본인의 배역에 대한 감상은.
=처음 구상했던 인물과 별반 차이가 없다. <씨네21>도 긴 글을 많이 썼던데 솔직히 아직 다 읽어보지는 않았다. 예전보다 글자가 너무 작아서…. (웃음) 처음 대본은 최민재와 이상현(차인표) 중심으로 짜여졌다. 찍으며 엔딩을 고민하면서 구조가 많이 변했다. 원래 대본의 결말은 이상현이 암살되는 것인데 강 감독이 고민 끝에 현재의 결말로 수정했다. 촬영 끝나기 20일 전에 엔딩을 보여주더라. 강 감독과 김희재가 열 가지가 넘는 엔딩을 고민했는데 대통령과 총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결말로 정리됐다. 그래서 이야기의 중심이 대통령과 총리쪽으로 많이 옮아왔다. 내 배역도 총리가 사회원로와 밥먹으며 이야기하는 대목 외에는 사적인 부분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최민재와 김유식(강신일)을 제외하면 인물들의 사적인 측면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저널이나 관객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다. 권용한 총리의 친일적 태도도 그러하다. 현실에서 그런 행동과 글을 쓰는 인물들이 실제로 많다. 내가 김희재 작가에게 ‘이런 것들이 좀 극적으로 과장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김희재는 ‘실제로 있어요’라고 답하면서 관련 자료들을 엄청나게 보여줬다.
-평일에는 서울, 주말에는 지방에 무대인사를 자주 다녔다. 무대에서 느낀 관객 반응이 궁금하다.
=나이 든 관객이 많아서 신기하더라. 대구나 부산에 갔을 때는 방학이라 그런지 여학생들이 더 많더라. 명성황후신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사안은 세대간의 생각 차이도 많고 <한반도>는 원래 그걸 감안한 영화니까 가족 단위 관객이 많은 건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서 밥을 먹으면서 ‘대통령은 어떻고 총리는 어떻고’라고 의견을 나눴으면 한다. 어떤 견해가 나오든 논쟁을 끌어낸다면 강 감독이 <한반도>로 전하고자 했던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다.
-목소리 출연이나 특별 출연을 제외하면 <한반도>는 스물한 번째로 주연한 영화다. 전작들은 크게 세 범주의 연기로 나뉠 수 있다. 올곧게 살며 고뇌하는 지식인, 비열하고 뒤틀린 지식인, 밑바닥 인생으로 복합적인 내면을 가진 사람. 어느 편이 가장 연기하기에 편한지 궁금하다.
=그런가? 이제는 몇 번째 영화인지는 세질 않아서. 그러한 내 배역의 흐름은 영화사적 변화를 따라갔을 따름이다. 90년대 초까지는 오랫동안 권위주의 정권에서 못했던 영화들이 집중됐고, 지식인의 회의나 낙담을 표현하는 영화들이나 캐릭터가 많았다. 편안하기로는 뒤틀린 지식인이 제일 좋다. 결국 배역이란 나로부터 출발하고, 뒤틀린 지식인은 나에게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올곧은 지식인에 가까운 역을 하면 자문을 하게 된다. 너 잘 살고 있니? 그런데 내가 잘 사나? (웃음) 게으르고 편했으면 좋겠고 늘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있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런 역은 어렵다. 나이 탓도 있다. 지난해에 10년 만에 연극 <마르고 닳도록>을 했다. 역할은 재밌는데 한달 연습하고 2주를 공연하자니 한달 반 동안 긴장을 유지하는 게 육체적으로 힘들더라. 내가 잭 니콜슨처럼 타고난 배우라면 긴장 안 하고 파바박 하면 되지. 노력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없다. 덜 긴장하려면 나로부터 멀지 않은 역을 하는 게 좋지만 내 입맛에 맞는 것만 할 수는 없으니까. 배태곤이나 덕배 같은 역에 비하면 총리는 하기 쉽다. 잘 알 수 있는 캐릭터고 선명하니까. 게다가 극중에서 각료 중에는 공직자 재산도 가장 많고, 옷도 가장 잘 입는 사람이다. 대통령보다 권 총리가 재산이 훨씬 많을걸. (웃음)
-어떤 인터뷰에도 ‘1985년에 서른두살의 나이로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연극배우가 됐다’라는 사실만 있고 결정적인 동기나 과정은 언급되지 않았다.
=대학 때도 연극은 했지만 당시에는 탤런트 시험을 보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1977년 가을에 졸업했으니 유신 체제에서 방송 드라마라는 워낙 힘들었고, 방송쪽은 가고 싶은 동네도 아니었다.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나같이 생긴 게 영화배우를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자질이 별로 뛰어나지 않아서 연극으로도 먹고살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막내삼촌 문동환 박사의 아들이 연기를 엄청 잘했다. 그가 연세대 영문과에서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옮겼다가 생활이 안 돼서 연기를 포기하는 걸 봤던 경험도 있다. 호근이 형(친형)도 연기랑 음악을 했는데 나는 내 능력에 자신이 없었다.
-배경을 들으니 회사에 들어가서 생활을 잘했는데 갑자기 돌아선 과정이 더 궁금하다.
=회사에 갔는데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빡빡한 분위기와 위계질서에 적응을 못해서 실수도 많이 했다. 차관 들여오는 일 같은 걸 했는데 엄청나게 커지는 과정의 회사였다. 어느 정도 지나니까 거기서 버무리고 사는 게 견뎌지기도 했다. 그런데 건설회사에서 5년을 보내니 나와서 독자적으로 살 방안이 없더라. 말 그대로 주특기가 없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연극을 했던 적도 있다. 호근이 형이 연출한 국립극장 단편오페라에 노래는 안 하고 벙어리 역으로 출연했는데 회사 다니면서 하려니까 죽겠더라고. (웃음)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월급을 1.8배쯤 주는 사우디를 자원해서 갔다. 한 2년 정도 버텨서 선물 가게나 레코드 가게를 열고 그걸로 생활하면서 연극을 하자고 생각했다. 당시 대학로에 전철이 생길 시기였는데 전철 매점 뽑기 입찰(임대료를 미리 정하고 입찰을 시키는 방식)을 응했는데 떨어졌다. 요즘도 지나가면서 ‘저 가게였다’하고 회상해본다. 2년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예금이 생긴 뒤 해보기로 결심했다. 사우디에서 근무 잘했다고 우수사원상도 줬는데 나가겠다고 하니까 회사에서는 미쳤다고 했다.
-당시에 출연한 <한씨연대기>와 <칠수와 만수>는 지금도 회자될 만큼 인기를 모았다.
=두 작품이 공전의 히트를 해서 출연료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 특히 <칠수와 만수> 때는 회사 월급 두배를 받았으니까. 1년 넘게 300회 이상을 공연했다. 비행기 타고 다니면서 공연했다. 당연히 기차 타고 가야 할 시절인데 빨리 옮겨다녀야 하니까. 그 뒤에는 신문에도 나고 하니까 TV랑 영화쪽에서도 슬슬 같이 하자는 제안이 왔다. ‘그럼 이렇게 가도 되나보다’ 싶었다. 회사에서는 무엇보다 부속품이라는 개념이 싫었다.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누가 있어도 똑같다’는 생각. 회사 선배들 보면 결국 소모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구조 안에서 버텨야 하니까 전망이 갑갑한 것이다. 뭔가 차별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어서 연극을 택했다. 그만두면 연극밖에 할 일이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거지. 내가 나간 뒤에 그 회사에서 ‘나도 문성근할까?’라는 말이 돌았다더라. ‘그만두고 나가서 내 맘대로 할까?’라는 의미로. 독일에는 ‘브레이트할까?’라는 표현이 있다. 부정적인 뜻으로 제 맘대로 하는 걸 그렇게 부른다. 그가 연극을 하면서 계속 이론을 바꿨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권하고 싶지 않은 시작이다. 난 너무 무모했는데 운이 좋았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89년에 문목(문익환 목사)이 방북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 사건 이후에 마음이 바뀌었다. 어차피 교과서 근현대사에 나오시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누가 물으면 답하기 시작했다. 문목은 아들인 나보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분들이 워낙 많고,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그분들과 마주친다. 그분들을 만나면 내가 혈육임을 강조할 수 없다. 그래서 문목은 나에게 사적인 아버지보다는 공적 존재다. 나는 그처럼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는 집에 와서는 밖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장남 김홍일에게 자기 일을 맡겼다가 수차례 고문을 당해 몸이 불편해진 사건을 보고 그런 생각을 더 굳히셨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 형제들은 고초를 겪었던 적이 없다.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평생 일기를 못 쓰고 사셨다. 잡아들일 증거로 남으니까. 그분 수첩에 적힌 일정을 보면 늘 난감했다. 죽는 그날까지 지방도시를 찾아다니며 20∼30명이 모이는 청년회에서 강연을 쉬지 않고 하셨다. 발로 뛰는 인생이었다. 개인적으로 반대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성경구절처럼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였으니까.
-“민주공화국의 한 시민으로서의 참여이자 개인적 의사표시였다. 후회는 없고 오히려 영광이었다”라는 정치활동에 대한 소감이 기억에 남는다.
=‘노사모’는 분명 세계 정치의 흐름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2004년 미국 대선에서 주목받고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출마한 하워드 딘의 경우도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 파리에서 가까운 IT산업이 강한 도시의 시장도 우리 사례를 언급하며 경탄했다고 한다. 이후에 나온 ‘박사모’나 ‘서울사랑’도 노사모의 선례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명계남이 회장으로 있던 시절 노사모는 전 지역, 전 지구의 모임이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해당 지역에서 단체의 독립성과 자발적인 모금, 지지를 위한 운동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갔다. 그 점에서 명계남은 친구지만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훌륭한 운동가였다.
-“영화라는 게 오락이기도 있지만 사회적 측면이 있기에 1990년대 초반 너무 상업적인 흐름은 밉살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게다가 이창동 감독은 “문성근만큼 배우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배우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내가 걔랑 같이 놀 때 그런 적이 있었나보지. 요새는 안 그런데. (웃음) 이창동 감독은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반말을 해도 내버려둔다. 왜냐하면 실제로 둘이 있으면 그가 형 같고 행동도 그러니까. 시작을 연우무대에서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제5공화국 시절에 연우무대를 찾아갔고, 그때는 문화운동이 민주화 투쟁의 한 부문이었다. 그런데 연극은 여러 명이 모여야 하고, 영화는 심지어 돈이 있어야 하니까 문화운동의 중심이 되기 어려웠다. 연극은 그나마 다같이 굶고 머리를 박으면서 하면 되니까 가능했다. 단순한 오락이라면 굳이 인생을 갖다바치고 고생하며 왜 하나라는 의식이 그때는 강했다. 1992년 문민정부 초반 상품으로서의 영화가 쏟아질 때,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있던 관성이 남아 있었다. 스스로 그러한 변화를 거부했다고도 할 수 있다. 대중사회에서 연기자들이 갖는 대중성을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만큼 사회적 역할을 강하게 주장하진 않는다. NBA를 보라.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이 비즈니스맨인데 그가 CEO가 되고 NBA가 엄청나게 성장했다. 지금은 유럽과 교차경기를 계획하고 수용할 만큼 역량이 확대됐다. 전세계 선수를 전부 NBA로 빨아들이고, 비시즌에는 그들을 매개로 투어를 다니며 영향력을 키운다. 매우 긍정적인 일이고 한국 영화계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영화를 만드는 일이나 그걸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도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휴대폰으로 모든 아이들이 동영상을 찍기 때문에 영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일상화된 세상이다. 소설가 유시춘씨 아들도 연대 상대 다니다가 한대 연영과로 옮겼다. 같은 과에서 두명이 그랬는데 유시춘씨는 “영화 하려면 해라” 하고 말았는데 다른 친구 어머니는 앓아누웠다더라. 문단의 자녀들이 영화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전부 이창동에게 전화해서 묻는다. “야, 애들이 연극영화과 가겠다는데. 이거 가도 되는 거야? 사람 할 짓이야?”라고 계속 물어본다. (웃음)
-<두뇌유희프로젝트>는 촬영이 끝났고, 최양일 감독의 <수>는 촬영 중이다. 이상우 감독의 <노근리 전쟁>(가제)도 촬영에 돌입한다. 갑자기 다작으로 선회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세게 정치활동을 하면서도 당시에는 모두들 수중에 돈을 털어가며 운동하고 참여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완전 멍이 들었다. (웃음) 그러니까 이제는 다작해야지. (웃음) 2004년에 수입이 0원이었다. 지난해에는 <오로라 공주> 한편. 방송을 그만뒀으니 당연한 상황이다. 오죽하면 몇년 동안 내 소득세를 계산해주던 분이 있는데 그해는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더라.
-배우 생활도 20년이 넘었다. 배우란 무엇일까.
=모든 사람은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교육과 사회활동에 의해 비롯된다. 원래의 얼굴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얼굴을 보여주고 그것을 향유하거나 대리만족을 느끼도록 해주는 직업이 배우라 생각한다. 그 다음은 대중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하는 배우라는 면이 있다. 한국은 이 측면에 배우의 개념이 많이 기울어져 있다. 정서적으로 예민한 민족이기에 배우적 자질도 그만큼 풍부하다. 반면에 사람들은 배우에게 수많은 잣대를 거리낌없이 들이댄다. 배우들은 대부분 소양인이라 그만큼 상처도 잘 받는데 한국에서는 개인적 공간이나 객관적 거리 확보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것 또한 배우 개인이 자기 방식으로 헤쳐나가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