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본영화의 기대작 <일본침몰>이 지난 7월15일 개봉해 첫주 9억엔이라는 흥행수익을 올렸다. 2주째엔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에 밀려 2위로 떨어졌고, 3주째엔 지브리의 <게드전기-어스시의 전설>이 버티고 있기에 순위 전망은 순탄하지 않지만, 업계에선 50억엔 이상의 흥행수익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지구 지각판의 대규모 변동으로 일본 전역에서 지진과 화산 폭발이 일어나며 순식간에 침몰해간다. 미국 학자가 40년 안에 일본이 침몰할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일본의 다도코로 박사는 독자적 조사활동을 통해 그 기간이 불과 1년임을 알게 된다. 비상대응에 나서는 정부각료의 이야기와 함께 잠수함 파일럿 오노데라와 소방대 구조대원 레이코를 중심으로 한 서민들의 드라마와 사랑이 영화의 중심축이다. 알려졌듯 이 작품은 1973년 발표돼 400만부 넘게 팔린 고마쓰 사쿄의 베스트셀러 <일본침몰>과 같은 해 말 개봉돼 40억엔을 벌어들인 동명 영화의 리메이크판이다. 현재로 설정을 옮기며 대담한 각색을 한 2006년판은 적어도 ‘일본형 블록버스터’의 출현을 기다리던 일본인들에겐 꽤 만족감을 안겨주는 “양질의 엔터테인먼트 작품”(<키네마준보>)임엔 틀림없어 보였다.
제작비 20억엔, 구사나기 쓰요시, 시바사키 고, 도요카와 에쓰시 등 낯익은 스타들의 출연, 명 ‘특촬 감독’ 히구치 신지의 작품…. 솔직히 말해 <일본침몰>이 궁금해지는 건 이런 이유가 아니다. 일본이 침몰한다는 ‘종말론적’ 설정 자체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에겐 어렸을 때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까지 있다. “일본 섬이 매해 몇 센티미터씩 가라앉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몇 십년 뒤엔 저절로 멸망한다.” 몇 센티미터인가 하는 수치나 몇 십년인지 몇 백년인지 하는 버전은 여러 가지였다. 하지만 뿌리깊은 반일감정과 묘한 열등의식(‘우리 경제력은 일본에 비해 20~30년 뒤졌다’는 이야기를 지겹게 들으며 큰 세대로서)과 맞물리며 이 황당무계한 소문은 꽤 진지하게 어린이들 사이에 퍼졌던 것 같다. 이러니 <일본침몰>이란 영화 타이틀이 (특히 한국인들에겐) 참을 수 없게 ‘섹시’할 수밖에.
그런데 외국인에겐 황당무계하거나 SF적인 설정이 일본인들에겐 ‘현실’이다. 오래 살지 않았지만 7년 전과 최근 몇년을 비교만 해봐도 지진의 빈도와 지속시간은 확실히 늘었다. 도쿄 지방에 ‘빅 원’(간토 대지진 같은 대지진)이 다가왔다는 얘기는 농담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관광에 치명적이라며 ‘후지산 분화론’은 금기시됐지만, 요즘은 지자체가 지역 전 주민들에게 ‘비상지도’를 나눠줄 정도다. 무엇보다 수십년 전 간토 대지진을 역사로만 알고 있던 일본인들은 95년 고베 대지진(6천여명 사망)과 2004년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60여명 사망)에서 ‘안전신화’의 붕괴를 목격했다. 73년 당시 일본은 고도경제성장과 함께 1차 오일쇼크와 물가급등이란 그늘을 막 경험했던 때였다. 이런 시대에 일본이 침몰해 1억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말 그대로 ‘유랑민족’이 되어버린다는 내용의 충격은 대단했다. 작가 고마쓰 사쿄가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일본 땅을 버렸다”는 말로 자신의 작품을 표현했듯이 당시의 질문은 “일본인은 무엇인가”였다. 따라서 73년판에선 인간군상의 이야기나 에피소드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전반부는 침몰에 대한 과학적 해명, 후반은 비상상황에 맞선 ‘공적 인간’들의 대응만으로 숨가쁘게 흘러간다. 잠수함 파일럿인 오노데라보다는 일본침몰설을 주장한 다도코로 박사, 박사보다 총리가 더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렇다.
하지만 73년판을 70번 이상 스크린으로 봤을 정도로 열혈팬인 히구치 신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시즈오카현 대지진으로 영화를 열고 아예 초반에 일본침몰을 기정사실화한다. 대신 그는 ‘공적 인간’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훨씬 정성을 들였다. 소방대 구조대원 레이코(시바사키 고)는 고베대지진으로 부모를 잃었다. 레이코 이모의 허름한 가게는 또 하나의 ‘의사가족’이 형성되는 장소다. 레이코와 그의 이모, 이웃 아저씨들과 레이코가 구조해낸 소녀는 혈연관계는 없어도, 가족 이상의 관계를 맺어간다. 피로 이어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거는 할리우드영화들보다 호감이 가는 부분이다.
서민드라마와 함께 2006년판의 매력은 인물들의 성격이다. 73년판에서 비키니를 입고 도망가는 인상만 남기던 부잣집 딸 레이코는, 시바사키 고의 이미지대로 슬퍼도 씩씩한 옆집 소녀 같은 구조대원이 되었다. 이전 ‘가미카제’라 불릴 정도로 마초적 이미지 강하던 오노데라는 구사나기 쓰요시가 맡으며 바닷속 외엔 관심없는 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별로 기댈 바 없어 보이는”(<마이니치 신문>) 주인공 오노데라가 레이코에게 구출된 뒤 이 의사가족을 알아가며 변해나가는 과정은 “영화를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게 한다”. 73년판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이 땅과 함께 가라앉는 방법도 있다”는 제안에 두눈을 붉게 충혈시키던 야마모토 총리(단파 데쓰로의 명연기!)가 중심이지만, 2006년판에서 총리(이시자카 고지)는 일찍 죽어버리고 비상상황을 이끄는 건 여자 문부상이다. “어차피 재해로 인한 예상 사망자 수가 8천만명 이상이야. 나머지가 해외에 도피하는 건 큰 문제 없을 거야”라며 국보를 싸들고 떠나가는 관방장관 앞에서 “1천명, 100명, 아니 단 한 사람이라도 더 탈출시켜야 한다”며 맞서는 유일한 각료가 그다.
하지만 2006년판은 절반의 성공처럼 보인다. 흥미진진하던 인간들의 이야기는 <아마겟돈>이나 <인디펜던스 데이> 같은 영화를 연상시키는 설정과 러브 스토리로 후반부에 돌변한다. 한 평론가가 “어른스럽던 페미니즘 이야기가 돌연 중학생 남자아이들의 로망으로 반전한 듯한 아쉬움”이라고 표현했듯이. 아마도 히구치 감독의 ‘SF적 취향’과 <로렐라이>에서도 보였던 낭만주의, 60~70년대 도호 특촬영화 속 영웅들이 작용했을 터다. 하지만 여러 인터뷰에서 감독이 밝히듯, 더 큰 이유는 대재해가 일본의 잇단 지진이나 인도네시아 지진해일처럼 가까운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오락을 제공하는 인간으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첨단의 특촬과 VFX로 만들어낸 재해장면도 규모나 실감 면에선 당연히 73년판보다 훨씬 크고 박력있지만, 잔혹함은 덜하다. 73년판은 유리파편이 박힌 사람의 얼굴, 회색빛 재에 덮인 시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공포를 자극’하지만, 2006년판의 재해장면은 일본이라는 땅이 꺼져가는 풍경과 끝없는 난민행렬을 슬프게 지켜볼 뿐이다. 오히려 공포스런 순간은 TV 뉴스에 일본 지도가 나오며 전국에 규모 6, 7의 지진 숫자가 빼곡히 켜지는 장면 같은 거다. 도쿄의 모리타워가, 교토의 기요미즈사가, 삿포로의 시계탑이 스러져가는 모습은 하나의 레퀴엠이다. 이런 방식이 ‘재해 따로, 드라마 따로’의 느낌을 주긴 하지만.
사실 <일본침몰>은 최근 수년간 한국의 블록버스터들을 예로 들며 부러워 마지않던 일본 영화계가 고심해서 내놓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전쟁영화가 정치적인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일본에서 대작영화의 가장 합리적인 길은 ‘재난영화’일 게다. 많은 장면은 명백히 할리우드 재난영화들을 옮겨온 듯하다. 당연히 평가는 관객 사이에서도 갈린다. 73년판의 비판의식에 충격을 받았던 이들에게 2006년판은 ‘감동’을 지나치게 의식한 작품이다. 그래도 “재해를 체념할 게 아니라 누구든 자기가 가능한 일을 해나가는 게 이상적인 일본인”(<마이니치 신문>)임을 그리는 2006년판의 소박함은 지금의 일본엔 분명 호소력이 있다. 종말에 맞서는 진지함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향한 욕망이 기묘하게 결합한 셈이다. 히구치 감독과의 인연으로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카메오들- <건담>의 도미노 요시유키 감독, <에반게리온>과 <해피 마니아>의 안노 히데키·모요코 부부, <망국의 이지스>의 작가 후쿠이 하루토시 등- 을 찾아보는 건 보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