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두드리면 웃으며 나와 반겨주는 이웃집 소녀. <브루스 올마이티>의 톰 새디악 감독은 제니퍼 애니스톤의 매력을 그렇게 정의했다. 한해 4000만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할리우드 여배우 출연료 톱10에 랭크된 그녀가 이웃집 소녀? 시트콤 <프렌즈>의 레이첼은 확실히 그랬다. 1994년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요란스레 등장한 금발머리의 깍쟁이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속삭이며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브라운관 속의 이웃이었다.
한심해 보일 만큼 실수투성이에다 멍청하고 허영심 가득해 보이지만, 동시에 솔직하고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이른바 ‘레이첼 페르소나’는 제니퍼 애니스톤에게 전세계적 사랑과 유명세를 안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로서 그녀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붙들었다. “24시간 TV만 틀면 공짜로 그녀를 볼 수 있는데 왜 10달러나 내고 극장에 가겠는가. 제니퍼 애니스톤은 줄리아 로버츠나 카메론 디아즈가 아니다. 그녀는 그냥 레이첼이다.” 냉소적인 한 스튜디오 관계자의 말처럼 <프렌즈>를 벗고 연기적 도약을 시도하려는 그녀에게 ‘레이첼’은 언제나 가장 큰 족쇄이자 굴레였다.
“사람들이 레이첼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나를 받아들이는 게 힘들다는 걸 안다. 난 <프렌즈>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더이상 레이첼의 속편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조이>라는 스핀오프 시리즈로 <프렌즈>의 후광을 선택한 친구 매트 르블랑과는 달리 그녀는 스크린에 레이첼이 아닌 배우 제니퍼 애니스톤의 이름을 새겨놓고자 분투해왔다. <브루스 올마이티>의 애니스톤이 짐 캐리의 그림자에 가리워 존재감이 희미했다면, <폴리와 함께>의 애니스톤은 파트너 벤 스틸러와 대등한 연기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루하루 희망없는 삶을 살아가는 촌구석 점원을 연기한 <굿 걸>에는 비평가들의 찬사가 쏟아졌고,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 <디레일드>는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스릴러 한편을 추가했다. “어디 감히 영화를 하려고. 본업에나 충실하시지”라던 조롱 섞인 비아냥거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사그라졌다.
그리고 2006년, 제니퍼 애니스톤은 <굿 걸>에 이어 다시 한번 인디영화를 선택했다. 올해 선댄스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한 <돈 많은 친구들>에서 그녀는 4명의 주인공 중 유일한 싱글이자 유일하게 돈이 ‘없는’ 인물인 올리비아 역을 맡았다. 마흔이 가까워오는 나이에 결혼은 고사하고 변변한 남자친구도 없으며, 남의 집 변기와 냉장고를 닦아 생활을 유지하고, 잘나가는 세 친구 사이에서 은근한 조롱과 멸시를 받기 일쑤인 여자. 프랜시스 맥도먼드, 캐서린 키너, 조앤 쿠색 등 쟁쟁한 여배우들과 한자리에 선 제니퍼 애니스톤은 한발도 밀리지 않았다. 철없는 발랄함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삶의 풍파에 닳은 피로와 억척스러움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성공에 대한 욕망도,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지만 허례와 위선을 배격하는 올리비아는 돈 많은 그들의 나약함과 위선을 비추는 거울이자 조각난 에피소드를 묶는 구심점이 됐다. “분명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일주일에 500달러를 벌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 웨이트리스를 하고, 올리비아처럼 화장품 샘플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시절. 그래서 자연스레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었다.”
<돈 많은 친구들>로 제니퍼 애니스톤은 레이첼 페르소나에서 한 발자국 더 벗어났지만, 지금 그녀에겐 극복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브래드 피트와의 결별, 빈스 본과의 로맨스가 불러낸 요란스런 가십을 넘어서는 것. <베니티 페어>가 그녀에 관해 쓴 6400자의 기사 중 6천자가 넘도록 작품과 연기는 한마디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로, 지금 제니퍼 애니스톤에 대한 모든 관심의 초점은 사생활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녀는 “반드시 가십의 대상이 아닌 배우로 각인될 것”이며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문을 두드리면 웃으며 반겨줄 것 같던 이웃집 소녀는 어느새 문밖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프렌즈>의 레이첼도, 브래드 피트의 전 아내도, 빈스 본의 새로운 연인도 아닌 배우 제니퍼 애니스톤으로 돌아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