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노골적이고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괴물> [2]
2006-08-16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사회적 인과응보의 집행자로서의 괴물

물론 박희봉의 연대기를 내가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매점 안에 걸려 있는 멧돼지의 박제머리와 ‘엽우회’(獵友會)라는 모임에 박희봉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기념사진은 그의 삶의 이력 가운데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박희봉이 그들 가족 중에서 괴물과 마주쳤을 때 유일하게 총을 잘 쏜다는 사실 이외에는 더이상 이 박제와 기념사진은 아무것도 증언하지 않는다. 혹은 멧돼지를 잡은 그가 그 반대로 괴물에게 붙잡혀 죽는 것은 인과응보라는 뜻일까? 물론 괴물은 박희봉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괴물은 그 무언가를 집행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괴물의 등장은 어떤 패턴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자. 괴물이 처음 한강 둔치에 나타나 닥치는 대로 잡아먹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달아난다. 그때 사람들은 철제 이동식 화장실 안으로 도망친 다음 미처 마지막 여자가 들어오기 전에 무정하게도 문을 잠가버린다. 그때 괴물은 이 여자에게 아무 관심도 없이 그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므로 그 창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창고에 들어가지 못한 그 여자뿐이다. 여기서 왜 창고 바깥에 남겨진 희생의 잉여가 필요해진 것일까? 이 살아남은 잉여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고 있는가? 혹은 괴물이 두 번째 나타났을 때. 비내리는 한강에 방역 가스를 뿜으며 달리던 차가 잠시 멈춰 서서 방역 요원 중 한명이 내려 떨어진 돈을 주우면서 좋아한다. 그때 괴물은 갑자기 나타나 그 돈을 주웠다고 좋아하는 사내를 바로 잡아먹는다. 여기서 왜 괴물이 나타나 그냥 잡아먹는 대신 돈이라는 미끼가 필요해진 것일까? 돈이라는 근본적인 유혹. 남의 것을 주인을 찾아주는 대신 자기가 갖는 행위. 그런데 돈에 주인이 존재하는가? 돈에 주인이 있다는 생각에는 무슨 믿음이 있는가? 화폐라는 물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모순의 치환. 세 번째 장면. 세진과 세주는 한강에서 사람들이 철수한 틈을 타서 매점을 턴다. 하지만 세진에게는 원칙이 있다. 매점 물건을 털긴 하지만 돈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러면서 세주에게 말한다. “이건 도둑질이 아냐, 우린 지금 매점 서리를 하는 거야, 매점 서리, 알어? 수박서리, 참외서리, 할 때 서리 (중략) 서리는 배고픈 자들의 특권이 되겠다, 이 말이야, 알겠어?”라는 말이 끝나자 세진과 세주 앞에 기다리는 건 마치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문득 나타난 괴물이다. 그리고 그 말은 세진이 한 마지막 말이다. 두 번째 희생의 논리에 대한 반대의 논리의 집행. 이번에는 상품의 유통이라는 과정에서 시장의 존재를 부정하고(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생산과 사적소유 사이의 모순에 대한 부정), 배고픈 자들에게는 가진 자들의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을 했을 때 괴물은 그것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현듯 나타난다. 사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괴물이 출현하여 벌이는 행위는 신기하게도 생물적인 본능을 따른다기보다는 사회적인 인과응보의 그 어떤 집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은 영화적으로 ‘느닷없이 나타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들지만, 동시에 괴물의 행위는 ‘제때에 나타나’ 현실 속의 불편한 행위를 중단시킨다. 여기에는 두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 괴물이 그의 본능에 따라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괴물 자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 그가 법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벌은 법이 내리는 벌보다 훨씬 잔인하고 피비린내 난다. 봉준호는 법이 내리는 벌이 너무 가볍다고 보여준다. 혹은 어쩌면 두개의 벌이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인과응보. 그런데 인과응보는 이 영화에서 거의 영화 전체에 집행되고 있는 잉여지식이다. 무자비하고 어떤 타협도 알지 못하는 지식. 말하자면 세상의 질서?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너무나 단도직입적이어서 외설적으로 느껴질 만큼 노골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법질서 혹은 도덕.

좀더 인상적인 장면. 현서의 합동분향 영결식장에는 많은 화환이 놓여 있다. 그런데 웃지 못할 화환 중의 하나. ‘대구 지하철 유가족 일동.’ 그게 왜 거기에 놓여 있을까? 한강에 나타난 괴물과 대구 지하철에서 불이 난 것은 무슨 동병상련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봉준호의 인터뷰(위의 <한겨레>). “(중략) 이 사람들은 시스템으로부터 소외되고, 도움은커녕 방해만 받지만 아무도 시스템 탓 안 하고 자기들끼리 보듬으며 재앙을 개인화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지 않나? 예를 들자면 대구 지하철 참사도 구조적 모순을 탓하기보다 내가 돈 잘 벌었으면, 대학입학했을 때 차 사줬으면, 안 당했을 변을 당했다, 는 식의 반응이 많았다. 이런 게 한국적이고 사실적이다. 재앙은 훨씬 더 구조적인 것에서 온 건데, <괴물>의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훨씬 더 구조적인 결과로서의 재앙. 하지만 재앙의 개인화. 봉준호의 이 말의 방점. “이런 게 한국적이고 사실적이다.” 괴물은 거기 훨씬 구조적인 결과로 나타나 현서를 납치하지만, 박강두 가족은 그 재앙을 개인화한다. 그런데 그게 박강두 가족만일까? 혹시 영화를 보는 당신도 그 재앙을 개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해일이 연기한 박남일은 ‘추억’의 타임머신

그런 다음 현서의 삼촌이자, 박강두의 남동생인 박남일. 그때 박남일을 박해일이 연기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같은 말이지만 우리는 <괴물> ‘이후’에 <살인의 추억>에 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할 엔딩이 뻔한 <살인의 추억>을 봉준호가 왜 만들어야 했는지 항상 궁금했다. 그 모든 노력에 대한 허망한 결론. 그런데 사실 <살인의 추억>은 그 이야기만으로 본다면 결국 <괴물>과 같은 이야기이다. 혹은 <플란다스의 개>까지도 봉준호는 이미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중이다. 그는 세번 모두 같은 이야기를 찍었다. 봉준호의 주인공들은 열심히 찾아다니고(seek and…) 그런 다음 찾는다(…find). 그런데 그들이 찾은 건 이미 죽었거나,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그때 봉준호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그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범인이 아닌 용의자. 이미 죽어버린 현서. 그러므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봉준호 영화의 두개의 그림. 거기서 봉준호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저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의 과정에서 반복되어 ‘보여지는’ 고문. 우리가 <살인의 추억>에서 보는 것은 고문장면이었다는 것을 환기해보자. 만일 이 영화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대신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빌려 1980년대 고문에 관한 ‘정치적인 영화’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허문영은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이) 흥미로운 건 이 인물에게서 대학생의 이미지가 나온다는 점이다. 대학생인데 뭔가 쫓겨서 운동하러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80년대 억압을 영화가 말하는데도 억압을 빚어낸 장본인인 살인범이 그 시대에 억압과 맹렬히 싸운 대학생 이미지를 가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이다(중략)”(<한겨레> 2003년 12월19일자, ‘소통 넓어진 호러-사극, 금기와의 대면 기념적, 그런데 ‘현재’는 어딨지; 2003년 한국영화 결산좌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봉준호의 다음 영화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괴물>에서 봉준호는 그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다. <괴물>에서 박해일은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하다가 졸업한 다음 백수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남일로 옮겨온다. 그런데 그는 말하자면 1980년대의 후일담, 아니 차라리 그림자처럼 보인다. 혹은 80년대에서 그냥 걸어나온 듯한 인물. 박남일은 그 선배의 말을 빌리면 “도바리의 천재”이고(그런데 이런 말을 2006년에 누가 쓸까? 혹은 10대 관객은 이 말뜻을 알 수 있을까?), 그가 ‘꽃병’ 만드는 걸 보면서 노숙자는 말한다. “아주 도사구만, 손이 안 보이는구만, 손이, 딸딸이 저리가라다”(그런데 21세기 대학교 시위에서 당신은 ‘꽃병’을 본 적이 있는가? 그는 그걸 어디서 배웠을까?)

박남일은 <살인의 추억>의 시간을 고스란히 들고 <괴물> 안으로 옮겨온 일종의 ‘추억’의 타임머신이다. 혹은 이 말이 과장되었다면 박남일은 2006년에도 1980년대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더이상 연대는 없다.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그의 선배는 졸업한 다음 대기업 이동통신 회사에 취직했고, 그런 다음 현상금을 타(서 빚을 갚)기 위해 그의 후배를 신고한다. 그때 선배는 단 한 숏에서도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현상금에서 얼마나 세금을 떼는가뿐이며, 다만 그 자리에 남일이 그의 누이마저 데리고 나타나지 않아 두배로 현상금을 받지 못한 것에 아쉬워할 뿐이다. 그때 이 장면이 <괴물>에서 유일하게 한강 강변 바깥의 도시를 다룬 신이라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강변 저편의 휘황찬란한 도시. 이제 어떤 정치적 연대도 기대할 수 없는 배신과 신고로 이루어진 저편. 납치당한 손녀, 딸, 조카를 찾기 위해 가장 보잘것없는 가족이 그렇게 애를 쓰는데 누구도 관심없는 시대. 카드와 빚으로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디지털 시대의 스산한 사리사욕의 이해관계만 남아 있는 저 거대한 빌딩. 거기에 남일의 자리가 있을 리 없다. 그는 ‘꽃병’을 들고 한강에 가야 한다. 거기만이 그가 서 있을 장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싸우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괴물이 무엇의 결과이며, 결국 그 결과를 없을 때 그가 없애는 것이 그 결과가 제공하는 원인의 이유를 말소시킴으로써 그것을 제공한 미국에 무죄를 안겨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직 남일에게는 눈앞의 투쟁만이 그의 목표이다. 봉준호의 냉소적인 웃음이 여기서 울려퍼진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지 봉준호는 남일이 던진 꽃병을 보면서 한껏 웃는다. 그는 단 한번도 괴물을 ‘꽃병’으로 맞추지 못한다. 심지어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 그는 그만 어처구니없게도 ‘꽃병’을 떨어트려 깨트리고 만다. 남일은 현서의 영결식장에서 묻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남일에게 봉준호는 묻는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런 다음 힘든 질문이 남아 있다. 13살 중학교 1학년 현서는 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괴물에게 잡혀가야 하며, 그녀는 무엇을 대가로 결국 죽어야 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이미 대답했다. 그러나 두 번째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그냥 영화에서 보여준 대로의 대답. 괴물은 현서를 잡아다놓았고, 현서는 하수구 틈새에 숨어 있었으며, 괴물은 그 다음 세주를 잡아왔고, 현서와 세주를 잡아먹은 다음, 강두가 괴물의 입에서 꺼냈을 때 현서는 이미 죽었고, 세주만 살아남았다. 괴물은 아무 생각이 없었고, 현서는 그냥 운이 없었다.

하수구에 있는 현서가 강두의 꿈이라면?

그러나 여기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숏이 있다. 그걸 생각해보아야 한다. <괴물>은 시작하면 바로 현서를 가족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부서진 가족이고(합동분향소에서 박희봉의 대사, “행여, 애만 싸질러 놓고 도망간 게 벌써 13년짼데…”), 그런 다음 괴물이 나타나서 현서를 그들과 떼어놓는다. 그들은 영화에서 단 한번도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없다. 아마 영화 시작 이전에도 모인 적이 없을 것이다(같은 자리에서 박희봉의 대사, “우리가 현서 덕에 다 모였다”). 박강두의 눈앞에서 괴물은 현서를 잡아먹는다. 그런데 그게 아주 멀리 떨어진 밤섬 저편에서 삼키는 게 희미하게 롱 숏으로 보인다. 그걸 보는 사람은 박강두이다. 그런 다음 현서는 가족과 떨어진 채 괴물이 살고 있는 원효대교 북단 하수도에서 네번 보여진다. 그런데 42번째 신, 현서의 두 번째 하수도 장면 보여주기 직전의 신. 그러니까 매점 내부의 장면. 병원에서 강두 가족 일행은 도망쳐 나와서 다시 매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여 앉아 맛있게 라면을 먹는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붙잡혀간) 현서가 부스스 일어나서 라면을 함께 먹는다. 더 이상한 것은 가족들 중 아무도 놀라지 않고 현서의 라면에 이런저런 반찬을 올려놓아준 다음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라면을 먹는다. <괴물>이 초현실주의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가 초현실주의적인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 신은 둘 중 하나이다. 이 신을 앞장면, 그러니까 세진과 세주 앞에 괴물이 나타난 다음 도망치기 위해 매점 문을 열었는데 그걸 할아버지 박희봉의 손으로 연결한 트릭 숏으로 연결하지 않고, 그 신의 다음 신, 그러니까 하수구 아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현서의 얼굴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수구에서 거의 정신을 잃어가는 현서가 잠시 생각한 숏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순서를 뒤바꿔 붙인 이 숏은 ‘서프라이징’ 이외의 어떤 기능도 없다(상식적인 편집은 정신을 잃어가는 현서를 보여주고 그런 다음 이 매점 숏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놓으면 두개의 신은 설명이 되지만 갑자기 편집이 뒤죽박죽이 된다. 한번은 앞으로 가고 다음번은 뒤로 가보자. 먼저 매점의 숏을 놓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그 앞은 할아버지 박희봉이 매점 문을 여는 인서트 숏이다. 그런데 이 인서트는 마치 그 앞의 신에서 세진과 세주가 괴물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쳐서 매점 문을 여는 것처럼 매치-트릭-숏으로 연결하였다. 그 앞의 신은 매점을 ‘서리하는’ 세진과 세주이다. 그런데 세진과 세주는 한강 다리 지하도 하수구에서 총을 쏘는 강두 가족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등장한 인물이다. 영화는 여기서 세진과 세주가 나타난 다음 옆으로 빠져서 세진과 세주를 따라서 진행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숏에서 강두 가족으로 넘어왔다. 그 다음 매점 숏에서 뒤로 가보자. 라면을 먹는 숏이 나온 다음 하수구의 현서의 얼굴로 이어붙였다. 그때 괴물이 나타나서 세진과 세주를 버리고 간다. 현서는 세진의 코에 손가락을 대본 다음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 이 숏은 박강두가 매점에서 그들의 가족 곁에 누워 잠을 자는 쇼트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강두는 계속 자고 있는 데 박희봉은 남주와 남일을 앉혀놓고 그 자신과 강두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 미묘한 문제가 생겨난다. 매점을 현서의 꿈으로 보지 않고, 하수구에 있는 현서가 강두의 꿈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매점의 숏은 꿈속의 꿈이 된다. 반대로 현서가 꿈을 꾼 것이라면 강두가 자는 장면은 시간적 동시성의 숏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매점 안에 들어와 라면을 먹은 장면은 꿈인지 실재인지 모호하게 된다. 나는 이 숏을 무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좀더 앞으로 가야 한다. 그것도 맨 처음으로. <괴물>은 제목이 보이고 나면 박강두가 매점에서 잠자는 숏으로 시작한다. 그는 항상 잠을 잔다. 매점에서 잠든 강두를 보면서 하는 박남일의 대사, “진짜 신비롭지 않냐? 이 상황에서…”. 할아버지 박희봉의 대답, “그냥 냅둬라, 얜 짬짬이 눈을 붙여줘야 돼”. 제목이 나온 다음 잠든 박강두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등장인물은 ‘매점 서리하러’ 온 세진과 세주이다(그런데 그때 자막이 계속 흐르고 있어서 놓치기 쉽다). 박강두는 그들을 보지 못했지만 세진과 세주는 그를 보았다. 그런데 세진이 본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세진은 두번 다시 강두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아서 다시 강두를 보는 건 세주뿐이다. 현서는 세진과 세주가 매점 앞을 떠난 다음에 등장한다. 그 둘은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 차지한다. 하나가 등장하면 하나가 퇴장한다. 처음에는 이게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서가 납치되고 난 다음 이 자리는 일종의 포르-다 게임처럼 진행된다.

현서는 괴물에게 유괴된 다음 강두의 가족에게 휴대폰으로 그녀의 생존을 알린다. 우리가 현서의 생존을 알게 되는 것은 그녀를 본 다음 그녀가 휴대폰을 거는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병원에서 골뱅이를 먹다가 강두에게 걸려온 현서의 잡음 심하게 섞인 목소리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봉준호는 그 전화를 무참하게 그냥 끊어버린다. 단지 전화만 끊은 것이 아니라 실제의 숏도 그렇게 한다. 현서는 이 신에 뒤이어 붙어 있지 않고 그 사이에 방독 가스를 뿌리고 다니는 자동차의 남자들이 돈을 줍기 위해 나온 다음 괴물에게 붙잡히는 신이 있다. 그들을 잡아먹은 괴물을 따라 카메라는 느리고 우아하게 그 서식지에 까지 쫓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거기서 현서를 보여준다. 그런 다음 다시 영화는 병원으로 돌아온다. 사실 방독가스 차에 탄 남자들이 붙잡혀 가는 것을 (한번이라도 더 괴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런데 봉준호는 이 신의 진행을 일단 중단시키고 그 사이에 괴물을 개입시킨 다음 현서를 보여주고,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다. 병원에서 다시 병원으로. 좀더 정확하게 병원 신 안의 하수구 신. 이 말의 핵심. 그리고(and)가 아니라 그 안(into)에.

현서가 하수구에 붙잡혀 있는 두 번째 장면과 매점장면 사이의 편집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세 번째 현서의 신. 다시 붙잡힌 박강두는 한강에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더글라스 부소장과 김씨를 만난다. 물론 박강두는 눈앞의 더글라스가 현서를 납치해간 골뱅이-괴물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박강두는 지금 마취제를 맞아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그 박강두를 침대에 묶어놓고 카메라가 하이 앵글로 내려다볼 때 한참을 난동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문득 하수구의 현서로 옮겨간다. 현서는 세주에게 “뭐가 제일 먹고 싶어?”라고 물은 다음 자신은 “시원한 맥주”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 대답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괴물이 나타나서 트림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뼈가 쏟아져 나오고,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캔 맥주를 토해낸다. 캔 맥주에 대한 두개의 대답. 그 하나. 그 캔 맥주는 잡혀가기 전 현서가 발로 찬 것을 먹은 다음 소화가 되지 않자 이제야 토해낸 것이다. 두 번째 질문. 그런데 이 신이 박강두가 마취제를 맞으면서 진행되는 신 ‘사이’에 있다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그런 다음 현서가 희생자들의 옷을 묶어서 탈출하기 위한 동아줄을 만들지만 실패한 다음 이어지는 신은 (다시 앞으로 돌아와?) 병원에서의 박강두의 장면의 연속이다. 나는 이 신이 처음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그 까닭은 병원에서 진행되는 사건을 일단 중단하고 왜 그 안으로 편집을 나눈 다음 그 ‘사이’에 현서의 에피소드를 끼워넣었느냐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야기의 진행을 구태여 번잡하게 만들고 있다. 나의 두 번째 대답. 만일 현서의 이 신이 마취제를 맞으면서 의식이 흐려져가는 박강두의 비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왜 괴물은 그 순간에 나타나 트림을 한 다음 많은 토사물 중에 캔 맥주를 토해냈을까? 그때 그 맥주는 매점에서 아버지와 딸이 사이좋게 앉아서 남주의 양궁 중계를 보면서 박강두가 건네주던 그 캔 맥주라는 기억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캔 맥주라는 기억의 매듭. 그러니까 이 현서의 신 전체는 병원장면의 일부이며, 이 신은 박강두가 마취제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문득 떠올린 현서의 비전이라는 편이 이 편집을 이해할 수 있는 순서가 아닐까?

네 번째 현서의 신. 박강두는 병원에서 탈출하고 난 다음 원효대교를 향하여 달린다. 그리고 현서의 이름을 외친다. 그때 현서가 있는 하수구의 신이 텔레파시처럼 등장한다. 여기서 나는 현서가 아니라 현서가 ‘있는 하수구의 신’이라고 썼다. 현서는 세주를 깨운다. 그런 다음 잠들어 있는 괴물을 보면서 세주에게 말한다. “누나가 금방 나갔다 올게, 빨리 나가서 의사랑 119랑, 군인 아저씨, 경찰 아저씨, 죄다 데리고 올게.” 하지만 우리는 설혹 현서가 나갔다 할지라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강두 가족의 ‘사투’를 보면서 잘 알고 있다. 현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서 괴물을 밟고 동아줄을 잡지만 그러나 괴물은 깨어나고 만다. 도망치는 현서를 향해 괴물이 달려들면 화면은 페이드 아웃된다. 그런 다음 이 장면은 박강두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이어진다. 박강두는 괴물의 은신처에 도착했고, 괴물은 입 속에 현서와 세주를 물고 원효대교 북단을 향해 가는 중이다. 현서가 나오는 네 번째 하수구 장면도 세 번째 장면과 같은 편집을 하고 있다. 박강두의 행동을 일직선으로 따라가지 않고 그 사이에 현서의 에피소드 신을 넣어서 그 행동을 나누고 있다. 여기에는 편집에서 신 안의 인서트의 주관성이라는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나는 이 세 번째와 네 번째의 편집에 의지해서 두 번째 매점에서 현서가 나타나는 장면은 박강두가 꿈속에서 현서를 만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설명된다면 세 번째와 네 번째도 모두 박강두의 신 안에서 생각하는 현서의 신이다.

현서의 죽음에 우리 모두는 정치적으로 유죄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어떤 텔레파시가 있다. 구태여 <괴물>을 본 다음 어떤 영화를 떠올려야 한다면 봉준호의 <괴물>이 왜 피터 잭슨의 <킹콩>이 아니냐고 묻는 대신 이 영화가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의 ‘사우스 코리아’ 버전으로서의 대답이라는 편이 어떨까? 네티즌들 사이에서 봉준호를 부르는 표현, ‘봉필버그’. *^^* 어느 날 도시 한복판에 느닷없이 나타난 낯선 그 무엇. 그런 다음 무지비한 공격. 납치당한 자식, 그 아이를 구하려는 아버지의 악전고투. 여기에는 있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텔레파시와 구원을 향한 드라마. 하지만 둘 사이의 유사성은 여기까지이다.

나는 신42의 매점장면에서 현서가 나타나는 장면이 현서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가 갑자기 현서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마지막 장면에는 현서를 죽여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더 비장하게 만들기 위해서? 보는 사람을 울리기 위해서? 아니, 그 반대이다. 만일 현서를 죽이게 되면 봉준호는 괴물 영화의 컨벤션과 정면으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봉준호는 괴물영화라는 장르와 싸우는 데 관심이 없다. <괴물>은 비장한 척할수록 웃겨지는 영화이다. 박강두는 심각해질수록 보는 사람을 웃긴다. 혹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조차 웃는다. 이를테면 박남일이 ‘꽃병’ 투척에 실패하는 대목. 한강에 괴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봉준호는 지금 2000년 2월9일에 벌어진 실제 사건을 끌어안고 끔찍한 질문을 하는 중이다. 내 생각에 <괴물>의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할리우드 괴수영화가 한강 강변에서 매점을 하는 가족 앞에 나타났을 때 벌어지는 이 우스꽝스러운 소동 속에서 보여지는 스펙터클에 대한 휴머니즘의 무관심과 영화 속과 같은 날 벌어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서 그 둘을 할 수 있는 한 거의 맞닿을 만큼 서로 가깝게 다가갔을 때 그 사이에서 선택이란 있는가? 그 대답. 외양이 실재와 가까이 다가갈 때 그 사이에서 선택이란 없다. 왜냐하면 그 둘은 여기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의 고리를 끊으려 할 때 정치적 무관심을 포기하고 휴머니즘의 무관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이미 그 역은 구하기에 틀렸다. 맥팔랜드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미군 기지가 이전하고 있는 지금 같은 사태가 심지어 반복되고 있다). 그것을 끊을 때 사실상 둘 다를 잃는 것이다. 그때 현서는 그 매듭이다. 그러므로 봉준호는 현서의 죽음을 놓고 내기를 한다. 무슨 내기? 피할 수 없는 질문(의 내기). 현서의 죽음 앞에서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걸 괴물에게 떠넘길 것인가? 만일 괴물이 마지막 순간에 현서를 잡아먹어서 죽은 것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무죄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현서는 그 순간 왜 그 매점에 나타나서 함께 라면을 먹은 것일까? 차라리 현서는 그보다 훨씬 앞, 그러니까 괴물이 현서를 꼬리로 붙잡은 다음 그의 서식지로 데려갔을 때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그런 다음 그 모든 현서의 신은 박강두가 현서를 되찾기 위해 그 자신에 동기를 부여하는 비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나에게 현서의 죽음은 사실상 현서가 매일,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와야만 하는, 봉준호의 말을 빌리면 “훨씬 더 구조적인 데서 온 재앙”, 즉 그녀의 계급적 운명의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야 옳다. 현서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정치적으로 죄를 지었다. 이것이 정치적 정의의 죄의식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남주의 마지막 화살을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괴물과 싸우는 마지막 장면은 여러 가지 판본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결국 남주의 화살에 괴물을 쓰러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나는 남주가 아니라 그 화살에 주목한다. 사실 남주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녀가 대전에서 어떻게 자라나서 양궁선수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아무 설명이 없다. 왜 강두가 병든 닭처럼 졸기만 하는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건만” 4년 제 대학을 나온 다음에도 왜 남일이 한강 강변에서 술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지, 그리고 왜 현서에게 엄마가 없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남주가 왜 매번 제시간을 놓쳐서 시위를 당기지 못하는 “거북이”인지(남일은 그렇게 부른다)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도 남주의 심리적인 망설임을 더이상 읽을 수 없다. 그 불투명성. 이 네명의 설명의 영화적 판본의 공통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봉준호는 이 가족의 내면적 심리(의 과정)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 화살은 이 영화의 마지막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걸 설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남주의 화살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제스처

그 설명의 판본에서 내가 택한 것은 이 신 전체가 사실상 이 영화에 처음 괴물이 나타난 신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때 이 반복 안의 차이 혹은 차이처럼 보이는 반복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괴물이 나타나는 첫 번째 신(이하 첫 번째 신). 여의도 둔치에서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한가롭게 즐기는 가운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난다. 그 다음 괴물과 싸우는 마지막 신(이하 마지막 신). 원효대교 남단, 그러니까 여의도 둔치에서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에이전트 엘로우’ 살포를 반대하면서 시위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 갑자기 나타나는 괴물. 첫 번째 신. 이 괴물이 나타나자 박강두는 철제 주차표지판을 들고 달려든다. 마지막 신. 박강두는 ‘1급 오염구역’ 철제 표지판을 들고 괴물에게 달려든다. 철제 표지판. 첫 번째 신. 모두가 도망가는데 미군 도날드 하사관이 보도블록을 깬 다음 이걸 들고 괴물에게 달려가 싸운다. 이걸 맞자 괴물이 잠시 멈칫거린다. 마지막 신. 모두가 도망가는데 거기 설치된 ‘에이전트 옐로우’ 풍선을 터뜨려 괴물에게 황색분말을 쏟아붓는다. 이걸 뒤집어쓴 다음 괴물은 비틀거린다. 미군. 첫 번째 신. 괴물이 나타났을 때 박남일은 한강변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마지막 신, 괴물이 나타났을 때 박남일은 한강변에서 소주에 휘발유를 넣은 ‘꽃병’을 들고 괴물에게 던지지만 단 한개도 맞지 않는다. 박남일의 소주병. 첫 번째 신. 박남주는 괴물이 한강변에 나타났을 때 전국체전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그때 박남주는 시간을 놓쳐 활시위를 당기지 못한다. 그걸 본 현서는 실망하고 매점에서 나왔다가 괴물에게 납치당한다. 마지막 신. 박남주는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남일이 마지막 ‘꽃병’을 떨어트려 깨트리자 화살 솜방망이에 불을 붙인 다음 괴물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질문. 그래서 오직 남주만이 그의 행위를 성공시켰는가? 내 대답은 반대이다. 남주의 행위도 사실상 남일의 행위의 반복이다. <괴물>은 대부분의 장면이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숏이 평행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의 신 안에서 두개의 신이 진행된다. 영화의 앞부분. 괴물이 나타났을 때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보여지는) 남주는 화살을 쏘고 있다. 그런데 그 화살은 결국 시간을 놓쳐서 쏘지 못한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 그 화살은 결국 과녁을 제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남주는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실망한 현서는 매점 바깥으로 나왔다가 괴물에게 납치당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괴물이 나타난다. 그 괴물을 향해 남주는 활시위를 당긴다. 그런데 이게 남주가 괴물을 향해서 활 시위를 당긴 네 번째라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처음은 비오는 새벽, 할아버지 박희봉이 괴물에게 죽을 때 그녀는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제지당한다. 두 번째는 달려오는 괴물에게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그만 괴물에게 하수구에 처박힌다. 세 번째는 괴물에게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현서를 입에 물고 있기 때문에 강두에게 제지를 당한다. 그리고 지금 괴물에게 활시위를 당긴다. 그러나 이미 현서는 죽은 다음이다. 그것이 복수의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현서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것은 남일이 ‘꽃병’을 던지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그 화살은 대상을 향해서 날아가 맞기는 했지만, 그 화살은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상과 목표의 분리. 그때 목표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괴물이란 무엇일까? 당신은 정말 한강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는가? 그 활시위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일종의 공허한 몸짓의 반복이다. 남주의 화살보다 더 우리 시대의 정치적 제스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알레고리가 있을까?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봉준호의 차가운 냉소주의이다. 그는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걸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안에서 역설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향해 깔깔대고 웃으면서 공허한 제스처처럼 다룬다. 그는 여전히 항의한다. 그러나 한참 항의한 다음 그 항의라는 행위가 지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서 환멸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나는 봉준호가 이 외설적일 만큼 노골적인 ‘정치적인 영화’에서 무엇을 은폐하려는지가 궁금하다. 나는 현서의 시체 앞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괴물>에서 끝내 지켜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질문하였다. 그 하나는 가족이다. 그러나 영화 <괴물>은 가족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부서졌고, 그런 다음 더 부서져가는 과정을 밟을 뿐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괴물이라는 것이다. 괴물이 죽었을 때 사실상 이야기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순환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이 영화가 끝난 다음 (다시 시작하는 현실 속의 속편의) 첫 장면은 당연히 다시 주한 미8군 부대에서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는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선택이 남는다. 괴물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선택할 것인가?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정치적 어젠다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 속의 모호함 속에서 반식민지 상태로 ‘그냥’ 살 것인가? (더글라스 부소장의 말을 빌리면) “한강 큽니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집시다”. 양자택일.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의 선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선택. ‘정치적인 것’의 상태와 탈정치적인 일상 사이의 선택.

정치적인 각성을 일깨워 실재를 보라고 외치다

영화는 여기서 갑자기 끝난다. 그런 다음 음산한 에필로그가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무대는 눈 내리는 한 겨울 밤 한강 강변으로 옮겨간다. 거기 강두의 매점이 있다. 남일과 남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헤어져서 아마도 이전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 현서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모일 일은 없을 것이다(박희봉의 대사 “현서 덕에 우리가 다 모였다”). 그 매점에 박강두와 세주가 살고 있다. 현서의 자리를 대신한 세주. 일종의 유사 가족. 여전히 어머니의 자리의 부재. 나는 이 장면에서 현서의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애도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 에필로그는 왜 필요했던 것일까? 괴물은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일까? 또 새로운 골뱅이가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먹고 있는 것일까? 강두는 여전히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아마도 현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방송일 텐데 그는 발가락으로 채널을 꺼버린다. 눈이 내리고, 강변에는 강두의 매점만이 홀로 쓸쓸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이때 이 장면은 단지 낮과 밤의 차이가 아니다. 혹은 현서에서 세주에로의 대체가 아니다. 여기에는 좀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박강두는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 그런 게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낮에도 밤처럼 잠을 잔다. 그런데 괴물과 싸우고 난 다음에는 한강에 언제든지 괴물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소리에도 총을 잡는다. 그래서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바깥을 살피면서 두리번거린다. 사실상 박강두의 입장에서 한강에 괴물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그걸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서 그 차이가 지금 정치적인 것의 위기감과 탈정치적인 것의 나른함 사이의 차이와 불길할 만큼 닮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이 마지막 장면이 만족스럽거나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그 만족과 불만은 정확하게 위기감과 나른함 사이의 차이의 반복이다. 만족스러운 위기와 나른한 불만족. 이 비대칭의 공존. 그때 우리 앞에 나타난 어두운 하수구. 화성에서는 연쇄살인이 벌어져 시체들이 발견되었던 그 하수구, 한강에서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그 하수구. 현실 속의 실재가 있는 그 블랙홀. 말하자면 정치적인 것의 어두운 구멍. 나는 정확하게 <괴물>의 거기까지만 지지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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