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난 푸른 하늘이 될거야, <각설탕>의 임수정
2006-08-11
글 : 최하나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각설탕과 임수정. 새하얀 각설탕에는 비현실적인 매력이 있다. 반듯하게 떨어지는 입방체의 형태, 티끌 하나없는 순백은 순수함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임수정이 그렇다. 세월의 무중력 행성에서 찾아온 듯 소녀의 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이 그렇고, 남 모를 비밀을 하나쯤 감추고 있을 것 같은 묘한 아우라가 그렇다. 죄책감이 빚어낸 마음의 감옥에 갇혀버린 <장화, 홍련>의 수미, 외로움과 상처를 가슴속 깊은 곳에 꾹 눌러안은 <…ing>의 민아, 언제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 위태로워 보였던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은채. 임수정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언제나 순수함과 아픔을 동시에 간직한 조숙한 소녀들이었다. <각설탕>은 임수정의 매력을 새로운 방식으로 가공했다. 흙투성이 더벅머리에서 묻어나는 소년의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라는 낯선 동물과의 조화.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드는 각설탕처럼 임수정은 동물과 사람이 하나로 교감하는 달콤한 마법의 주인공이 됐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 아직까지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 없잖아요. 소재적인 측면에서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컸죠.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말의 순하고 아름다운 눈, 거침없이 달릴 때의 자유로움을 동경했었고, 그런 호기심이 작품 선택의 큰 동기가 됐어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징글징글한 고생”을 각오했다는 그는 <각설탕>을 촬영하면서 “매 순간 한계에 다다랐을” 만큼 몸고생, 맘고생을 두루 겪었다. 경마장의 모랫바닥이 얼어붙어 경주가 취소됐을 정도의 강추위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말을 타고 달렸던 고통스러움. 말도 차도 사람도 전혀 통제가 안 되는 도로 한복판에 서서 시은이의 복잡한 감정을 잡아내야 했던 막막함.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주인공 천둥이와의 소통이었다.

“말과 사람 사이에도 일종의 기싸움이 있어요. 말은 등에 올라탄 사람이 초보자인지 경력자인지 딱 알아요. 초보자가 올라타면 그 사람의 기를 눌러서 말도 안 듣고 떨어뜨리기도 하고요. 촬영하면서 몇번이나 낙마를 했어요.” 말이 통하지 않는 말(馬)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마음뿐. 어르고 달래고 화내고 애원도 하며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임수정은 결국 본능적으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꼭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체취를 느끼게 해주고, 그렇게 촬영 중반에 이르렀을 때 그는 비로소 천둥이가 마음을 여는 것을 느꼈다. “중요한 신일 경우에는 여지없이 딴 짓을 하거나 말썽을 피우지 않았어요. 부둥켜 안고 울거나 얘기를 할 때면 ‘내가 다 들어줄게’ 하는 어른스러운 눈빛으로 절 내려보더라고요. 그때 말이 단순히 동물이 아니구나, 사람이랑 똑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천둥이와 제가 교감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천둥이와의 인연은 배우가 아닌 자연인 임수정에게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제가 먼저 마음을 열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법을 배웠어요.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주위 분들이 밝아졌다고 말을 많이 하세요.”

타인으로부터 마음을 닫고, 세상 모든 것에 무감각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던 소녀. 놀랍게도, 임수정은 그랬다. 심지어 자신의 얼굴에 미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만큼. “<…ing>를 하기 전까지는, 살아오면서 한번도 활짝 웃어본 적이 없어요. 배우가 되고 싶어 오디션을 계속 봤음에도 불구하고 거울 보고 한번도 웃는 연습을 안 했을 정도예요. 내 얼굴에 웃음이 있을 리 없어, 그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때문에 배우가 된 것은 어쩌면 인간 임수정에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 작품을 할 때마다 캐릭터의 좋은 점들을 취해서 자신을 성장시켜온 그에게 연기란 인생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는 수업과도 같았다. 한 작품 두 작품, 발걸음이 길어질 때마다 조금씩 닫혀 있던 세계가 열렸고, 그는 서서히 자신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각설탕>.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캔디 같은” 시은이의 낙천성을 통해 임수정은 망설임없이 활짝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변화시켰다. “미지의 세계를 떠돌다가 마침내 이 세상에 도착해 기분좋게 ‘나 왔어요’ 하는 것처럼, 인간 임수정도 이 세상에 안착한 것 같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된 것 같고. 이제 비로소 ‘사람’이 됐네요. (웃음)”

뒤늦게 발견한 값진 미소, 스스럼없이 활짝 핀 미소가 자리한 곳은 성장의 중간에 잠시 멈춰선 듯 앳된 얼굴이다. 사람들이 임수정이라는 배우에게서 가장 쉽게 떠올리는 것이 바로 그 ‘동안’이지만, 언제까지나 소녀에 머무를 수는 없는 법. 임수정 자신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제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인 거죠.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조금씩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 그때 자연인 임수정에 맞는 주름과 성숙된 얼굴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천천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거예요.” 오래오래 연기를 하고 ‘안 예쁜’ 외모가 되더라도, 살아온 인생 자체가 아름다워서 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배우. 임수정의 넉넉한 꿈은 스스로 자신의 키워드라 말한 ‘하늘’과도 의미가 통한다. “하늘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올려다보며 때로는 웃고도 싶고, 때로는 하소연도 하고 싶고, 모든 걸 포용하고 받아주는 높고 푸른 하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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