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무모한, 전함 야마토와 같은 대도시. <일본침몰>의 원작자인 고마쓰 사쿄는 1973년의 도쿄를 전함 야마토라고 묘사했다. 고마쓰 사쿄가 2006년에 <일본침몰>을 썼더라도 똑같은 표현을 썼을 것이다. 긴자에 자리한 도호영화사의 시사실로 가는 길. 창밖으로 비치는 도쿄의 모습은 서울을 지방 소도시로 느껴지게 할 만큼 화려하고 거대하다. 이러니 괴수와 지진을 총동원해 끊임없이 도쿄를 파괴해온 일본 영화계의 집념에 공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교외를 합쳐 3천만명의 일본인이 살아가는 제국의 수도가 야마토처럼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라는 상상은 끔찍한 공포와 허무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고마쓰 사쿄의 73년 원작과 같은 해 65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일본침몰>은 야마토처럼 가라앉는 일본의 종말에 대한 묵시록이다. 일본섬의 지각 아래에 있는 플레이트의 대이동으로 일본 전역에서 지진이 발생하고, 과학자 다도코로(도요카와 에쓰시)는 일본의 침몰이 338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곧 일본 전역이 지진과 화산폭발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위기관리의 전권을 이양받은 문부과학장관 다카모리(다이치 마오)는 다도코로의 도움으로 열도의 완전한 침몰을 막기로 결심한다. 핵폭탄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N2 폭탄을 투여함으로써 바닷속으로 열도를 끌고 들어가는 플레이트를 열도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1차 시도에서 폭약은 심해 속으로 사라지고, 잠수정 파일럿 오노데라(구사나기 쓰요시)가 돌아올 길 없는 2차 시도에 나선다.
재미있는 사실은 제작비 200억원이 투여된 <일본침몰>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문법보다는 전통적 일본 특촬물의 향수와 아니메(일본 애니메이션)적인 감수성을 강렬하게 발산하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히구치 신지라는 감독의 이름에 좀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히구치는 일본 괴수 특촬물의 신기원을 이룩한 <평성 가메라> 시리즈와 가이낙스의 아니메에 참여하며 일본 영화계의 기대주로 떠오른 인물이며, 그의 첫 극장용 실사영화 <로렐라이>(2005)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후쿠이 하루토시 원작의 블록버스터(<망국의 이지스> <전국자위대 1519>)보다도 아니메적인 요소들이 더욱 두드러진 작품이었다. 새로운 <일본침몰>이 ‘가미카제 같은 경제적 발전을 계속해온 일본’에 대한 고마쓰 사쿄의 통렬한 비판정신 대신 재난영화로서의 쾌감에 더욱 주목한 것은 감독의 태생상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감독이 자랑하듯 “8개의 일본 내 특수효과 회사가 7개월의 후반작업을 거쳐 총예산의 절반을 투여하며” 만들어낸 재난의 스펙터클 역시 하이퍼 리얼리즘보다는 아니메와 특촬물적인 쾌락을 위해 박력있게 달려간다. 물론 일본인 피난민을 거부하는 한국에 대한 묘사는 국내 관객이나 언론으로 하여금 <일본침몰>을 배타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영화로 손쉽게 비판하도록 만들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일본침몰>은 정치적 은유와 인간의 투쟁보다는 무너지는 도쿄타워와 분출하는 사쿠라지마 화산의 스펙터클에 영화적 힘을 쏟아내는 순도 100%의 오락거리에 가깝다.
좋은 방식으로든 나쁜 방식으로든, 일본 상업영화의 어떤 정점에 달해 있는 <일본침몰>은 이미 개봉 16일 만에 200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고, 여름 방학 시즌을 맞아 관객 동원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제작사인 TBS 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TBS 프로듀서인 요시노 유코는 “일본영화는 현재 새로운 상승세를 맞고 있다”며 자국 영화산업에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고, 이 같은 자신감은 도호영화사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작 영화들의 포스터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일본 영화산업의 야심을 안은 블록버스터 <일본침몰>은 오는 8월31일 일본영화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인 한국 내 200개관에서 동시 개봉할 예정이다.
“일본이 침몰하면 한국으로 도망가지 않을까”
<일본침몰>의 히구치 신지 감독·구사나기 쓰요시 기자간담회
<일본침몰>의 시사회가 끝나자마자 감독인 히구치 신지와 주연배우인 구사나기 쓰요시가 시사실로 들어섰다. 인기 아이돌그룹 SMAP 출신의 구사나기는 한국에는 다분히 희화화된 캐릭터 ‘초난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일본 내에서는 진지한 극영화와 연극 활동에 힘입어 사려깊은 젊은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더 큰 남자다. 이날도 검은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구사나기는 “최근에는 한국어 공부를 할 시간이 없어서 말이 잘 나오지는 않는다. 부디 귀기울여 잘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는 인사와 함께 간담회 내내 과묵한 태도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그에 반해 히구치 신지 감독은 “저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는 싶지만 한국에 대해 익숙한 것은 불고기와 김치뿐이다. 입에서 나가는 것보다는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더 인연이 깊은 것 같다”는 말로 회견을 시작해 시종일관 유쾌한 농담으로 회견을 이끌었다.
-73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을 지금에 와서 다시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히구치 신지/ 한국에는 지진이나 화산활동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부럽다. (웃음) 알다시피 일본은 지진과 화산활동이 많은 나라다. 이미 많은 재난이 일어났고 지금도 재난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굉장히 위험한 도시에 오신 거다. 기자회견이 끝나면 얼른 서울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웃음) 일본인은 언제나 위기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만약 거대한 재난이 벌어지면 일본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걸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일본침몰>을 만들었다.-재난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은 무엇인가.
=히구치 신지/ CG 기술이 예전보다 훨씬 발전했기 때문에 재난장면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동시에 재난에 말려들어가는 사람들의 심리와 감정, 그리고 재난 앞에서 싸워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이 같은 요소들을 잘 살리기 위해서 고생한 이들은 구사나기 쓰요시 같은 배우들이다.-구사나기 쓰요시는 요즘 한국영화에 출연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
=구사나기 쓰요시/ 한국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기회만 있으면 앞으로도 계속 출연하고 싶다. 곧 개봉할 <천하장사 마돈나>는 일본어 선생님 역할이어서 매우 편하게 연기한 편이다.-아시아적 재난영화인 <일본침몰>은 할리우드의 재난영화와는 다른 점이 많이 보인다.
=히구치 신지/ 할리우드 재난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연장선인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보지도 못한 미국의 도시가 파괴되는 것보다야 훨씬 실감이 나지 않을까. 물론 한국 관객은 일본이나 미국이나 모두 외국이므로 차이점을 크게 느끼지 못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이 침몰하면 아무래도 일본인들은 미국보다는 가까운 한국으로 도망치게 될 것이니(웃음), 한국의 관객도 같은 동양인이 도망치는 장면들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꼈으면 좋겠다.-영화를 보면 일본의 난민에 대한 외국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나온다. 일본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히구치 신지/ 사실 <일본침몰>이 해외에까지 수출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일본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묘사에 집중하다보니 외국과의 관계 등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시나리오상으로 보자면, 이는 외부의 정보를 일부러 차단함으로써 일본인들의 공포를 더욱 강하게 유발하고 싶었던 의도이기도 하다.-주인공인 오노데라의 캐릭터는 어떻게 설정했나. 73년작의 마초적인 주인공과는 많이 다른데.
=구사나기 쓰요시/ 참고모델이 특별히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히구치 신지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아니메 감독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나 <건담>의 도미노 요시유키 등이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아니메나 특촬물을 만든 경력이 <일본침몰>을 감독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히구치 신지/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실사영화를 만들기 전에 아니메와 특촬물계에서 먼저 활동했다. 그래서 아니메 업계에는 아는 사람이 많고, 또 아니메 업계에는 괴상하고 특이하게 생긴 사람들이 많다. (웃음) 그들에게 불고기를 사주면서 출연을 부탁한 것이다. 나중에 그들에게는 ‘특수배우’라는 명칭을 붙였다. (웃음)-한국은 최근 서구의 특수효과 회사들과 기술적인 합작으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일본침몰>의 특수효과는 모두 일본 자국의 기술로 창조한 것인가.
=히구치 신지/ 모두 8개의 일본 특수효과 회사가 참여했다. 이미 <망국의 이지스>나 <로렐라이> 같은 블록버스터들을 만든 경험이 있는 회사들이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할리우드 회사들은 단가가 너무 비싸지 않은가. 그 돈을 들일 바에야 8개의 일본 내 회사들을 믿고 하자는 생각이 있었고, 결과도 좋았던 것 같다.-만약 일본이 실제로 침몰한다면.
=구사나기 쓰요시/ 한국은 지진이 없으니까 한국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