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랑하니까, 괜찮아> 곽지균 감독
2006-08-16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따뜻한 영화를 찍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곽지균 감독이 2000년 <청춘> 이후 6년 만에 찍은 신작 <사랑하니까, 괜찮아>는 아마도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밝고 활기있는 영화일 것이다. 열아홉살에서 스물한살에 이르기까지 짧은 사랑을 담은 <사랑하니까, 괜찮아>는 순애보와 불치병을 포개놓은 진부한 멜로드라마를 선택했지만, 죽음과 눈물에 매이기보다는 한순간에 불과할지라도 삶을 긍정하고자 한다. <겨울나그네> <젊은날의 초상> 등에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젊은이들을 그렸던 곽지균 감독은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었기에 오십이 넘은 지금에야 청춘을 가장 빛나는 시절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일까. 창문 활짝 열어놓고 혼자 지낸다는 대전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길을 잠시 묶어두고 나눈 대화는 <사랑하니까, 괜찮아>뿐만 아니라 그의 젊은 날과 중년에 이르러 겪게 된 변화로까지 이어졌다.

-6년 만에 영화를 찍었다. 그동안 한국 영화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어색하거나 새로운 점은 없었나.
=시사회가 끝나고 기자간담회를 한 건 처음이었다. 영화 제작 기간도 길어졌다. 촬영 기간이야 변함이 없지만 사전 준비나 후반작업에 시간을 오래 들이니까 예전처럼 한 호흡에 간다는 느낌이 없어서 작품을 자꾸 잊어버린다. (웃음) 홍보와 마케팅이 세분화돼서 스틸북이 없어진 점은 아쉽다. 전에는 스틸북이 홍보를 위한 자료가 아니라 현장에 두고 보면서 찍었던 장면을 확인하고 연결을 검토하는 역할을 했다. 아침에 사무실 나가서 촬영장소로 떠나기 전까지 스틸북 한장씩 넘겨보는 게 낙이었는데, 서운했다. 현장에 가면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을 뿐만 아니라 나 다음인 촬영감독하고도 열두살 차이가 나더라고. 나는 만만한 사람인데(웃음) 다들 필요 이상으로 어려워해서 그걸 풀어주는 것도 날마다 일이다. 감독은 어려운 점이 많은 직업이니까 그냥 하는 말로라도 이 장면 잘 나왔다, 그래주면 좋을 텐데. (웃음) 어린 배우들하고는 오히려 잘 지낸 편이다. 순수하고, 아직은 사람 대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툭툭 내뱉는 말들이 솔직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스무살 무렵 젊은 배우들하고 계속 일하고 싶다.

-<파리의 연인>의 김은숙 작가와 감독이 공동각색으로 크레딧에 올랐다. 어떤 식으로 작업했는가.
=사실은 김은숙 작가를 한번도 못 만났다. (웃음) <파리의 연인> 전에 썼던 시나리오 같았고 그걸 내가 받아 다시 각색을 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디테일이나 감정을 내 방식으로 고쳤고 주변 인물을 확실한 캐릭터로 잡았고 드라마를 좀더 강조했다. 김은숙 작가가 쓴 재미있는 대사는 살렸는데, 고등학교 시절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대사 채집하면서 연출부가 나더러 아저씨 같은 소리한다고 타박하면 나도 연출부한테 너희도 고등학생이 보기엔 아저씨라고 하고. (웃음)

-<청춘>도 열아홉, 스무살 젊은이들이 주인공이었지만 중심 스토리에서 벗어나는 그들의 일상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니까, 괜찮아>는 지금 십대의 분위기와 일상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는 느낌이 든다.
=<청춘>은 성(性)의 느낌이 메인이었기 때문에 일상을 담을 일이 많지 않았지만 <사랑하니까, 괜찮아>는 일상 속의 러브스토리여서 신경을 썼다. 그런 장면들이 아저씨스러워 보이지 않을지 걱정은 걱정이다. 사실 전반부를 조금 빠르게 가고도 싶었다. 하지만 민혁(지현우)과 미현(임정은)의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들 등 주변 인물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전반부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쌓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야만 후반부에서 그들의 감정을 얼핏 보여주더라도 느낌이 올 테니까.

-민혁과 미현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있다. 여러 명이 몰려다니는 모습에서 70, 80년대 하이틴영화가 생각났다.
=이 영화는 시한부 러브스토리여서 아무리 잘하더라도 진부한 느낌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모의 사연과 친구들 이야기로 두개의 축을 만들어서 영화를 풍성하게 하고자 했다. 부모야 어차피 필요한 인물이지만 친구들을 두고는 찬반이 분분했다. 멜로영화는 주인공에게 포커스를 맞추게 되는 법이니 배우들이 열심히 연기한 장면을 편집하게 되지 않을까, 나도 걱정이 됐고. 하지만 강래연과 주호를 비롯한 배우들이 조연이라는 느낌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연기를 해주었다. 지현우와 임정은까지 포함한 여섯명이 같이 술도 마시러 가고 나이트클럽도 가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경쟁하기보다 팀워크를 중시했다.

-민혁 아버지(정한용)와 미현 어머니(정애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아픔이 있다. 하지만 아내를 먼저 보낸 민혁 아버지의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데 반해 유부남을 사랑해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운 미현 어머니의 이야기는 옛날영화를 보는 듯하다.
=처음엔 미현 어머니를 철없고 소녀 같은 엄마로 그리고 싶었다. 한때 사랑을 했고 미혼모가 됐지만, 상처받기보다 그 사랑에 젖어, 솜처럼 보송보송하고 여리게 사는. 그런데 미현을 지켜주는 강인한 모습하고 균형이 맞지 않아 곱고 예쁜 모습을 많이 빼서 지금도 아쉽다. 정애리씨에게도 미안하고. 미혼모와 유부남인 생부의 이야기는 상투적일 수도 있겠지만, 미현이가 가지고 있는 자기 공간이 너무 없어서, 그런 설정을 택했다. 대신 최대한 쿨하게 가고자 했다. 아버지에 대한 농담도 툭툭 던지고, 남은 삶을 정리하면서 엄마를 부탁하는 식으로. 민혁과 아버지의 관계는 내 아버지와의 관계가 많이 투영돼서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온 것 같다. 나이를 먹어보니 아버지가 내 나이일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났다. 지금 내 나이가 외로움을 느끼는 나이 아닌가. 그건 치유도 되지 않는 것이고. 정한용씨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와 민혁 사이의 감정이 이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그 느낌, 내가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는 느낌을 정한용씨가 잘 살려주어서 고마웠다.

-<사랑하니까, 괜찮아>는 스무살 무렵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그대로 담으려고 한 듯하지만, 향수나 추억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느낌을 섞고 싶었나.
=나는 최대한 젊은 감각을 살리려고 노력했고, 배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내 손길이 묻어난 것 같다. 그래서 완전히 모던하지도 않고 복고적이지도 않고. 젊은 관객이 보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내가 의도적으로 스물다섯살 청년처럼 영화를 찍으려고 했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가증스러웠을 것이다. 사실은 <청춘>이 복고와 고전의 느낌을 강하게 담아 만들고 싶은 영화였다. 그런데 초반 기획단계에서 반대가 엄청났다. (웃음) 안 그래도 고전적인 멜로영화 찍던 감독이 마음먹고 복고로 가느냐고. 굳이 60, 70년대 느낌을 살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클래식한 느낌을 담고 싶었는데, 타협을 하다보니 결과가 어정쩡했다. <청춘>은 외설적인 느낌이 날 수도 있어서 최대한 서정적으로 클래식하게 담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스타일에는 복고가 있어도 멜로에 복고가 있나 싶은 의문은 생긴다. 인터넷 소설이 가지고 있는 연애의 감정이나 관계의 구조가 20년 전 연애소설과 비슷한 걸 보면.
=사랑하는 감정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나 스타일은 바뀌었지만, 감정은 그대로인데, 그걸 영화에 반영하는 게 어렵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캐릭터만 바꿀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어떤 영화는 사랑하는 방식도 바뀌었다며 요즘 아이들은 가볍게 사랑하고 쉽게 상대를 바꾼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옛날에도 있었다. 단지 매스컴에 부각되는 아이들이 그런 아이들일 뿐이다. 사랑하는 방식은 화려하게 보이는 연예인이라도 남들과 똑같다. 이젠 나이가 들었는지 그런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지만(웃음) 예전엔 멜로영화 감독이라 연애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들어보면 다들 비슷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한없이 여리고 순수해지고, 도도해지고. (웃음)

-평범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장면에서 애처로움이 묻어나는 것도 감독의 색깔 때문인가? 미현이 병원 문 앞에 서 있는 장면은 아직 죽음을 암시하지 않는데도 왠지 슬퍼 보인다.
=원래 그 사이에 미현이 죽음을 선고받는 짧은 장면이 있었다. 그날 임정은이 몸상태가 좋지 않은데다가 촬영 초반이어서 많이 힘들어했기 때문에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편집쪽에서 그 장면을 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주었다. 생략하면 더 애틋해질 것 같다고. 예전엔 그런 도움을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좋아진 것 같다. 전문 모니터 집단도 처음 봤다. 일반인으로 이루어진 집단인데 영화 시작 부분에 있던 민혁의 내레이션이 이 영화를 세대가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보이게 한다고 하더라. 나도, 다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이전까지는 청춘의 어둡고 비극적인 요소에 끌리는 감독이었다. 톤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사랑하니까, 괜찮아>도 죽음으로 끝나는 러브스토리고.
=내 안에 그런 요소가 많이 있다. <겨울나그네>의 민우(강석우)는 내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양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청춘>도 섹스를 빼고 다시 보면 수인(김정현)이 나와 비슷한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 영화를 찍으면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지고,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사랑하니까, 괜찮아>의 민혁은 아주 밝고 건강한 아이라서 즐겁게 찍었다. 요즘은 그렇게 하고 싶다. 내 젊은 날에 침투해 있었던 어두운 정서가 무의식적인 선택이었다면, 따뜻하고 희망적인 영화를 찍으려는 지금의 마음은 의식적인 선택이다. 마음의 고통은 고통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리얼리즘영화를 찍는 감독도 아니고,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따뜻함을 심어주는 영화를 하고 싶어졌다. 40대 중반 즈음부터 그렇게 변한 것 같다. 살아가며 힘든 일이 많은데 왜 영화에서까지 그런 걸 보여줘야 하나, 이런 갈등이 생기고, 그러다보니 상실감이 생겨났다. 그러던 끝에 고통과 외로움 같은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더라도 밝게 살자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변화가 언제부터 생긴 건가. <청춘>과 <사랑하니까, 괜찮아> 사이에 <하나에>라는 영화를 준비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는데, 그 영화도 지금 말한 것과 비슷한 톤이었나.
=장르는 SF와 멜로가 섞인 영화였지만 톤은 <사랑하니까, 괜찮아>와 비슷하다. 아마 <청춘>을 찍기 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럴 나이가 됐으니까. (웃음) 마흔두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맘때였나보다. 나는 어릴 적에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옛날 아버지들이 다 그렇듯 형제들에게 엄하고 무뚝뚝했지만, 막내인 내게만 요즘 아버지들처럼 살갑게 대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같은 데가 있어서 사랑받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시절이 끝나고, 세상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생의 한막이 내려오는 것 같은. 그래서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젊었을 때는 그렇지 못해서 <겨울나그네>의 민우와 다혜(이미숙)가 행복하게 데이트하는 장면 하나 넣어주지 못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민우는 내 모습이 많이 반영됐다. 현태(안성기)는 현실타협적인 인물이지만 순수에 대한 갈망이 있어 민우를 아끼는 거다. 하지만 그 마음이 민우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내 경험도 그랬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내게 가장 독한 상처를 주곤 했지만, 그렇더라도 그 사람과 원수가 되어 살지는 못하는 거다.

-<청춘>의 수인 또한 당신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 시절 성(性)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문제였는가.
=6년이 지났으니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청춘>을 성애영화로 찍었다고 해서 서운한 점이 많았다. 정사장면을 제대로 찍어본 적이 없어서 얼굴이 빨개져 있으면 김래원이 씩씩하게 촬영을 이끌었는데 말이다. (웃음) 나에게 <겨울나그네> <젊은날의 초상> <청춘>은 통과의례 3부작 같은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리지 못한 젊은 날의 코드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섹스였고, <청춘>이 된 것이었다. 나는 수인이었지만 또한 자효(김래원)이기도 했다. 내가 극복하지 못했던 것을 자효를 통해 극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겨울나그네> <젊은날의 초상> <상처> 등에 20대 초반 대학생들이 등장했고, 가장 최근에 찍은 <청춘> <사랑하니까, 괜찮아>는 인물의 나이가 조금 더 어려졌다. 단지 젊음이 좋다는 이유 말고 이 나이대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전까지 만들었던 멜로는 시간을 타는 영화들이어서 스무살 무렵의 주인공들이 20대 후반이 되는 뒷부분이 영화의 메인이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두는 나이는 20대라고 폭넓게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막 어른이 되려고 하는 소년기에서 사회로 들어서기 직전까지의 나이. 그때가 내가 세상과 가장 많이 대화하고, 사람들과 부딪쳤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이도 해봤는데 잘 안 됐다. <이혼하지 않은 여자>가 그 경우였다. 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어서 30, 40대의 일상을 잘 모르지만, 20대의 감정은 거의 대부분 남아 있다. 지금까지 청춘보다는 멜로쪽에 포커스를 맞춰왔으니, 이제는 <겨울나그네>보다 나이 폭을 넓혀서 어른이 되기까지의 라이프스토리를 담아보고 싶다.

-나이를 먹어서 청춘영화를 만드는 건 즐겁지만 서글픈 일이기도 할 것 같다. 20대 방식으로 기억하고 느낀다고 해도, 몸은 계속 나이를 먹어가니까.
=지금 젊은 시절을 추억하면 나쁜 기억보다는 그리움이나 애틋함이 남아 있다. 아무 진동도 없이 살았다면 얼마나 심심했을까. 나는 연애가 아니더라도 많은 감정을 겪었고 감독으로 영화도 많이 찍었다. 살아볼 만큼 살아봤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은 삶에 욕심이 없다. 나이 먹어 제일 좋은 점은 삶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관조하는 시선으로 이십대의 열정을 품어주고 싶은 느낌이다. 이런 걸 이십대에 알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살아보려고 한다. 조금 늙기는 했지만. (웃음) 젊었을 때는 영화가 먼저였지만, 이제는 새로운 느낌을 영화로 만들기보다, 그저 내 삶이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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