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가 되자 할리우드에 본격적으로 갱스터들이 출몰하였다. 갱스터영화의 연원에 관해서는 조셉 폰 스턴버그의 <지하세계>(1928)와 그리피스의 <피그앨리의 총사들>(1912)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뮤지컬 다음으로 사운드 출현의 수혜를 입은 장르라 할 만한 갱스터영화는 3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빛을 봤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고전적 갱스터영화의 원형으로 대표되는 영화는 <리틀시저>(머빈 르로이, 1930), <공공의 적>(윌리엄 웰먼, 1931), <스카페이스>(하워드 혹스, 1932)다. 이 세편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갱스터영화는 무엇보다 당대 사회의 ‘무질서’가 빚어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영화사가 로버트 스클라는 “할리우드의 갱스터들은 사회 무질서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들은 무질서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것에 복수를 감행했고, 또 그것의 희생양으로서 최후를 맞았다”라고 쓴 바 있다.
영화의 내용은 신문의 머리기사에서 풀어낸 것들이 많았고, 각본가들은 전직 일급 신문기자 출신들로 꾸려지기 일쑤였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시행된 금주법과 1929년 들이닥쳐 1934년까지 지속된 공황기를 거치면서 갱스터영화는 말 그대로 사회의 반영이었다. 가난한 소년들은 실제로 유명 범죄자가 되어갔고, 영화 속에서 그들은 타락했지만 매혹적인 주인공의 자리로 갔다. “이 영화의 목적은 범죄자를 미화하는 게 아니라 환경을 묘사하는 데 있다”(<공공의 적>), “이 영화는 정부에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스카페이스>)이라고 하워드 혹스와 윌리엄 웰먼은 각각 영화의 첫머리에 적고 있는데, 그건 사실 영화와 현실의 야릇한 동거를 인정하면서도 윤리적 부담에 대해서는 적절히 선을 긋기 위한 푯말에 가까웠다. 고전기 갱스터영화는 자본 경제와 경제 도시 안에서 쓰여지는 타락한 성공과 종교적 죽음에 관한 기록이었다.
1940년대, 필름누아르의 그늘이 짙게 깔리고, 갱스터영화에서 조역에 불과했던 험프리 보가트의 주연시대가 온다. <공공의 적>의 제임스 캐그니, <리틀 시저>의 데이비드 G. 로빈슨, <스카페이스>의 폴 무니로 대표되는 1930년대의 갱스터 배우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조금씩 밀려났고, 갱스터 장르는 1940년대 말에 이르러 거의 쇠퇴에 이른다. 갱스터 장르가 짧은 전성기를 보냈다는 말은 사실이다.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해오는 제작윤리강령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갱스터 장르는 생존의 변화를 꾀한다. 형사, FBI 요원, 사립탐정 등으로 주인공을 바꿔가며 기나긴 변주의 행로를 시작한 것이다. 8월25(금)일부터 31일(목)까지 열리는 ‘할리우드 갱스터 액션 영화제’의 상영작들은 어떻게 갱스터 장르의 면모가 후대 작품까지 이어지는지 그 궤적을 한눈에 보여준다. 30년대 고전 갱스터영화 전성기의 작품이라 할 만한 <공공의 적> <스카페이스> <더러운 얼굴의 천사> <광란의 20년대> 등을 비롯하여, 고전 갱스터영화의 마지막 기념비라고 할 만한 <키 라르고> <화이트 히트> 그리고 60, 70년대의 변주인 돈 시겔의 <형사 마디간>과 리처드 플라이셔의 <보스턴 교살마> 등 총 12편이 상영된다. 자세한 상영시간표는 홈페이지(www.cinematheque.seoul.kr) 참조(문의:02-741-9782).
주요상영작 소개
<공공의 적> The Public Enemy/윌리엄 웰먼/1931년/흑백
<스카페이스> <리틀 시저>와 함께 고전기 갱스터 장르의 원형이라 부를 만한 작품. 1909년 아일랜드인 거주지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톰 파워스와 매트 도일에서 시작한 영화는 성인이 되어 금주법 시대에 밀주업을 하며 갱스터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여준다. 어느 날 친구 매트가 라이벌 조직에 총을 맞아 죽자, 원수를 갚기 위해 톰이 찾아가고 톰도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제임스 캐그니의 갱스터 캐릭터가 각인된 작품이자, 후반부의 충격적인 장면으로 유명하다. 에드워드 미첼이라는 평자는 고전 갱스터영화에 존재하는 세 가지 패턴 즉, “세속화된 청교도주의, 사회적 다윈주의, 호라티오 앨거(소년의 성공담을 주로 쓴 19세기 미국 작가) 신화”가 있다고 지적했는데, <공공의 적>은 어린 소년은 어떻게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비뚤어진 성공을 하였고, 또 신의 심판에 이끌려 실패했는가를 보여주는 견본이라 해도 무방하다.
<스카페이스> Scarface/ 하워드 혹스/ 흑백
원형적 갱스터영화 중에서도 나머지 두편에 비해 수준 높은 만듦새를 성취해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폴 무니가 연기한 토니 카몬테는 실제 갱단 알 카포네를 모델로 삼았으며, <리틀시저>와 <공공의 적>의 주인공에 비교해도 훨씬 더 악의적이며 극단적이다. 기자 출신의 벤 헥트가 각본을 썼고, 성 밸런타인데이 학살 등 알 카포네가 저지른 실제 사건들을 영화의 플롯으로 적극 활용했다. 영화는 토니 카몬테가 보스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첫 장면의 구성부터 시선을 압도한다. 승승장구하며 세력을 넓혀가던 토니가 파국의 전환점을 맞는 건 아끼는 여동생과 자신의 동료 리틀 보이가 육체적 관계를 가진 것에 화가나 리틀 보이를 죽이면서부터다. 이 영화 속의 토니는 여동생에 대한 유별난 사랑, 즉 근친적 코드를 지닌 갱스터로도 유명하다. 1983년, 동명의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는데, 올리버 스톤이 각본을 쓰고 브라이언 드 팔마가 연출을 맡았으며, 알 파치노가 연기했다.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 Angels With Dirty Faces/마이클 커티스/1938/흑백
빈민가의 거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내던 로키와 제리. 그러나 15년 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제리는 빈민가 소년들을 가르치고 보호하는 신부가 된 반면, 로키는 소년원을 거쳐 유명한 갱이 되어 나타난다. 소년들은 그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로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르려고 든다. 그러나 두 사람을 죽이고 마침내 경찰에 잡힌 로키에게 제리는 아이들이 범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라도 교수형을 당할 때 약한 모습을 보여달라고 부탁한다. 제임스 캐그니는 이 역으로 제11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제임스 캐그니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벽면의 그림자와 그의 비명만으로 처리한 이 서늘한 장면을 보고 어린 시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포효하는 20년대> Roaring Twenties/라울 월시/1939/흑백
다재다능한 영화작가 라울 월시가 당시 갱스터영화를 주도하던 워너브러더스를 위해 만든 첫 번째 영화. 이 영화를 끝으로 제임스 캐그니는 라울 월시의 1949년작 <화이트 히트>에 다시 출연할 때까지 근 10년간 갱스터 역을 맡지 않았다. 1918년 전쟁의 막바지 포화 속에 전우로서 같이 있던 세 사람 에디(제임스 캐그니), 조지, 로이드는 전후에 합심하여 밀주 사업에 손을 댄다. 그러나 로이드는 에디가 좋아하는 여자 진을 사랑한다며 함께 조직을 떠나고, 조지는 에디를 배신한다. 1929년 경제공황으로 파산해버린 에디는 택시기사로 삶을 연명하다, 조지가 로이드를 죽이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막기 위해 찾아갔다가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된다. “갱스터가 반드시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는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 장르의 가장 견고한 관습”이라는 평론가 콜린 맥아서의 소견을 증명하듯 거리의 죽음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영화.
<키 라르고> Key Largo/존 휴스턴/1948/흑백
미국 플로리다주 키 라르고 섬. 전직 군인 프랭크가 죽은 전우의 미망인이 운영하는 호텔을 찾아온다. 그때 마침 해외로 추방되었던 갱단의 두목 조니 로코도 사업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섬에는 허리케인이 밀려오고 조니 로코 일당이 호텔을 장악한 채 일당과 프랭크 사이에는 최후의 일전이 벌어진다. <화이트 히트>와 함께 고전기 갱스터 장르의 최후를 장식한 영화이자, 여러모로 자기 반영적 서술성을 내포한 작품. <화이트 히트>에서 정신분열증적 상태를 연기한 제임스 캐그니에 버금갈 만한 갱스터 배우 에드워드 G. 로빈슨의 비열하면서도 유약한 연기가 돋보인다. 쫓겨난 갱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악전고투한다는 내용은 마치 밀려나는 갱스터영화의 처지에 대한 자기 반영적 맥락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
<형사 마디간> Madigan/돈 시겔/1968/컬러
갱스터 장르에 관한 돈 시겔의 변주이자 더티 하리와도 같은 냉혹한 경찰 마디간의 범인 추적기. 영화는 헨리 폰다가 연기하는 경찰 국장을 따라, 한편으론 로버트 시오드막이 연기하는 형사 마디간을 따라 병렬로 진행된다. 헨리 폰다가 동료의 부패 사실을 알아가는 사이, 마디간은 자신의 총을 탈취해 달아난 범인을 잡기 위해 맨해튼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다. 말하자면 두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이야기. 돈 시겔의 시멘트처럼 딱딱한 정서가 영화 전면에 깔려 있을 뿐 아니라, 마치 30년대 갱의 최후를 옮겨온 듯한 장면으로 마감된다. 감독 돈 시겔뿐 아니라, 유물론적 필름누아르 <악의 힘>으로 오랫동안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에이브러햄 폴론스키의 각본 참여가 눈길을 끄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