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모호함의 공간 시학, <빅 리버>
2006-08-30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공간, 관습, 관점의 세가지 이항 대립 <빅 리버>

<빅 리버>는 무엇보다 먼저 <천국보다 낯선>과 <파리, 텍사스>를 떠올리게 하는 로드무비이다. 후나하시 아쓰시 감독은 짐 자무시 감독을 가장 좋아한다고 공언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연상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짐 자무시는 빔 벤더스가 <사물의 상태>를 찍고 남은 필름 일부를 얻어 <천국보다 낯선>을 찍었으니 이러한 기억의 연쇄 고리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후나하시는 후나하시이고 자무시는 자무시이다. 지금부터는 자무시도 벤더스도 잠시 제쳐두고 후나하시 아쓰시의 <빅 리버>를 자유롭게 유영하고자 한다.

균질적 공간 vs 이질적 공간

유클리트 기하학의 공간은 절대적인 공준에 의해 동일하고 불변하는 공간을 상정하지만 현대의 물리학은 이러한 전통적인 공간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다. 관점들의 수만큼 서로 다른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비단 과학적 논증에 의해 밝혀지는 것만이 아니라 현대 시각예술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주관적이고 창의적으로 증명된다. 이렇게 탄생된 공간들을 우리는 이질적 공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시간과 공간의 예술이라고 다소 범박하게 말한다면, <빅 리버>는 아무래도 공간에 방점이 찍힐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로드무비라는 장르의 속성상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좀더 중요한 점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실제적 공간과 스크린에 투사되는 프레임으로 구획된 공간의 의미작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미국 서부라는 영화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지도상의 미국 아니 현재 가장 강력한 패권국가로서 미국을 영화의 배경이라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빅 리버>를 독해하는 방법은 설득력있지만 의미의 자장을 좁힐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하필이면 일본인, 파키스탄인, 미국인 셋이 모여 여행을 한다는 설정은 요즘 같은 시기에 정치적 함의를 충분히 부여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빅 리버>의 공간적 배경은 균질적 공간으로서 미국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이질적 공간으로서의 서부 혹은 사막이라는 느낌이 더 두드러진다. 마치 <캔디>류의 일본 순정만화의 배경이 지도상 어디에 존재하는 이국인지 모호한 것처럼 <빅 리버>의 서부는 후나하시 아쓰시의 본원적 심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고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단지 불모의 지역으로 독해될 수 있는 낯설지만 왠지 친숙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모뉴먼트 계곡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수색자>의 존 웨인이 서 있던 서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마도 그건 구획되지 않은 공간, 나침반의 효용이 무용한 공간으로 간혹 공간 이동하고 싶은 우리의 소망을 투영할 수 있는 영화적 배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공간적 의미는 프레임 안에 담긴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환기 효과에 있을 것이다. 익스트림 롱 숏으로 잡은 사막 풍경 안에 들어 있는 사람과 자동차는 아주 작은 움직이는 물체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막을 횡단하고 그의 눈에 비친 새로운 풍광을 보여준다기보다, 사막에 들어선 존재로 인해 풍광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떨림이 담긴 프레임들이다. 미 서부의 사막은 텟페이의 대사처럼 먼지와 바위와 하늘뿐이다. <빅 리버>에는 인물이 들어가지 않은 풍광만이 가득 찬 프레임이 많다. 특히 하늘을 화면 가득 잡은 숏이 많은데 맑고 푸른 하늘, 석양에 물든 하늘, 구름에 다소 가려진 보름달이 떠 있는 밤하늘, 초승달이 어렴풋이 빛을 내는 밤하늘,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 등 무수한 하늘을 영화에선 보여주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 시간 안에 존재하는 인간을 공간적으로 표상하는 영화적 방식이다.

관습의 준수 vs 기대의 위반

여로형 서사는 보통 일상에서 비롯된 문제를 등에 지고 여행을 떠나 길에서 마주치는 풍경과 사람과 사건들을 보고 겪으며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빅 리버>는 그러한 서사 관습을 준수하기도 하고 위반하기도 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세 주인공 텟페이, 알리, 사라가 같은 길을 가게 된 동기부터 살펴보면 어디서 관습과 만나고 헤어지는지 답이 보일 것이다. 영화의 중심인물 텟페이는 짊어진 문제가 없다. 세상을 두루 둘러보기 위한 여정에서 사막에 들어섰을 뿐이다. 그에 비해 알리는 아내를 찾으러 파키스탄에서 피닉스로 온 확실한 이유가 있다. 마지막으로 사라는 사실 여행객이 아니다. 미국인인 그녀는 우연히 텟페이와 만나게 되었고 사막은 그녀에게 낯선 공간도 아니다.

처음부터 여정의 확실한 이유가 있던 알리는 비록 우울하고 참담한 결론이지만 답을 얻는다. 아내의 행방을 확인하고 돌아올 것을 종용하나, 결국 아내를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돌아가려던 그의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영화에선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알리는 이 여정을 통해 단순히 패배자로 귀향하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아내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힘겹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그는, 소모적인 미망이나 엉뚱한 분노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는 나름대로의 답을 얻은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텟페이와 사라인데, 둘은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얻었는지 모호하다. 그것은 처음부터 둘이 짊어지고 있는 문제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행 초기에 텟페이는 사라에게 알리와 헤어진 다음 같이 동쪽으로 여행하자고 제안했지만, 막상 사라가 텟페이에게 아이슬란드를 거쳐 뉴욕에 가자고 말할 때는 할 일이 있다고 수락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버스 터미널에서 텟페이는 사라의 자동차를 뒤늦게 쫓아가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은 채 화면은 페이드 아웃된다.

이렇게 보면 로드무비의 공식이 무색해진다. 여행을 떠난 사연도 없고 길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도 모호하고 여정이 끝나는 이유도 불명확하다. 달리 말해, 우리가 기대하는 의미의 완결성이 없는 이야기 구조이다. 오래전부터 의미는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열린 체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어딘지 허전하다. 그 영화적 해답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이 영화의 끝부분에 제시된다. 자동차 안에서 아무 의미없는 연상되는 낱말 잇기 게임을 하는 세 사람이 제시하는 단어는 그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불멸, 모호함, 폭발, 상실, 사막 등을 연상해내는 텟페이, 사라와는 달리 알리는 담배, 죽음, 두려움 같은 단어를 잇는다. 텟페이와 사라가 추상적인 단어를 연상하는 데 비해 알리는 당장 손에 든 담배나 자신이 겪을 현실적인 문제들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비어 있음 vs 흘러넘침

영화의 배경은 사막인데 영화 제목은 강이다. 사막은 비어 있는 공간이고 강은 물이 흘러넘치는 장소이다. 이렇게 대비되는 두 이미지는 이 영화를 사유하는 또는 독해하는 방식과 상통한다. 사막이 강이 되기까지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을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로 치환한다면, 균질적인 공간에 적용되는 원근법적 시각이 아니라 이질적인 공간에 적합한 다관점주의적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사막에서 강을 읽어내는 방법은 두 이미지의 간극만큼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 가령, 세 사람이 잠시 들른 소도시 바에서 카우보이 복장의 남자가 보여준 태도라든지 알리에게 이유 없이 돌을 던지는 아이들의 행동은 외국인을 배척하는 미국인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이방인이 겪을 수 있는 억울한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후나하시 감독은 설명해주기보다 보여주기를 선호한다. 낯선 카우보이와 춤을 추는 사라에게 텟페이가 다가가지만 아무런 충돌없이 세 사람은 바를 나온다. 달리 말하면 극적인 사건이 없다. 영화에는 대사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짧은 단문이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사실 서로의 의견과 감정을 교환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상황을 이어가는 신호 같은 성질이다. 그건 이들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세 사람의 관계는 의심-도움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막에서 차가 고장난 알리는 텟페이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텟페이는 그를 도와준다. 그러나 텟페이가 알리의 돈을 가지고 기름을 사러 갈 때 알리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 의심하는 식이다.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처하게 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선 누구나 도움을 원하지만 도와줄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게 마련이어서 이들은 계속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세 사람이 버스터미널에서 헤어지는 까닭은 아무 근거없이 조우한 이들이기에 사막이 아닌 도시에선 의심-도움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이 절제된 영화 전반에서 유일하게 감정적인 신은 교통경찰의 검문을 받는 장면이다. 과속 때문에 차를 세우게 한 경찰은 기이한 구성원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과도한 검문을 한다. 이 때문에 화가 난 알리는 미국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킨다. “미국이 내 가족을 망가뜨렸어.” 그러나 “그게 사실일까요?”라는 텟페이의 질문처럼 알리의 가족이 해체된 이유는 미국에 있지 않다. 설령 있다 해도 결과론적인 설명이다. 해답을 얻기 위해 사막에 들어선 알리에게 검문 사건은 삶의 일부였고 그래서 그는 화가 났지만, 목적없이 사막을 횡단하는 텟페이와 사라에겐 이마저도 굳이 해석할 필요없는 스쳐가는 사건일 뿐이다.

<빅 리버>는 많은 것이 비어 있는 영화이다. 무심한 하늘과 모뉴먼트 계곡만 프레임을 꽉 채운 일련의 숏들이 쭉 이어진 마지막 시퀀스가 상징하듯 감독은 사람보다는 공간을 보여주는 시학을 완성하고자 한다. 공간에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연이 없다. 그 공간에 사연을 투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가 부여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이항 대립적인 의미들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지만 이분법적이진 않다. 모호함(ambiguity)은 우리를 불만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예술에는 건강한 모호함이 절대 필요하다. <빅 리버>가 얼마나 건강한가는 강물 속을 헤엄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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