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기다리는 자리에는 밀회(密會)에나 어울릴 법한 부적절한 긴장이 흘렀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소설 <환상의 여인>이 생각났다. 그 책에는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가 나온다. “낮게 매달린 원유회의 제등처럼” 실내를 비추는 그녀의 모자를 사람들은 못 본 체하지만 사실은 곁눈질하고 사로잡힌다. 고현정의 ‘모자’는 극적인 과거다. 미스코리아 출신 연기자로 인기를 얻은 고현정은 걸출한 드라마 <모래시계>(1995)의 윤혜린 역으로 기립박수를 받은 직후 재벌 3세와 결혼했다. 진주 단추를 턱밑까지 촘촘히 채우고 완강히 눈을 내리깐 신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미모를 떨치고, 재능을 인정받은 다음, 부(富)까지 얻자 사라져버린 셈이다. 젊고 아름다운 시신을 남기고 요절한 스타는 오로지 그리움을 남긴다. 그러나 소멸하지도 않은 채 불멸의 후광을 빌려입은 이에 대해 사람들은 어딘지 불공정하다는 감정을 품는다. 2003년 말 이혼한 고현정은 2005년 드라마 <봄날>로 배우 이력을 재개했고 올 들어 생애 첫 영화로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을 택했다. 그녀가 여전히 인터뷰를 꺼린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편으론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배우의 정수리를 베어 그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홍상수의 영화는 고현정이 누구인지, 10시간의 인터뷰보다 유능하게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돌연 인터뷰 약속이 잡혔다. 정작 그녀도 긴장한 모양이다. “어제는 시사회 꿈을 꾸었어요. <해변의 여인>에서 저의 첫 대사가 ‘왜 지랄이니?’거든요. 꿈속에서 기대하며 영화를 보는데 그 장면이 편집되고 또 예쁜 짓하면서 나오는 모습이 제 첫 장면인 거예요. 아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꽃분이로 또 나오는구나, 왜 자르셨는지 따지려고 감독님을 찾다가 깼어요. (웃음)”
마주앉을 카페를 찾아 삼청동 골목을 지나는데 고현정이 저 집 김치볶음밥, 이 집 수제비가 정말 맛있다고 줄줄 꿴다. 식성 좋은 고현정은 한때 식탁에 앉으면 맛있는 반찬은 아껴두고 맛없어 보이는 것부터 먹는 아이였다. 그런데 중학교 선생님의 교훈이 생각을 바꿔놓았다. “맛없는 순서로 먹으면, 제일 맛없는 것, 두 번째로 맛없는 것, 마지막으로 맛없는 것을 먹게 되지만 맛있는 음식부터 먹으면 제일 맛있는 것, 두 번째로 맛있는 것, 세 번째로 맛있는 걸 먹는다.” 오늘날 잘 먹고 잘 웃고 아름다운 것에 취하기를 즐기는 고현정이 질색하는 것은 민망함과 지루함이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지옥을 선사하고 싶으면 지루하거나 민망하게 만들면 된다. “가족영화를 예로 들자면, 아버지의 고생을 식구들이 뒤늦게 깨닫고 미안함에 울음이 복받치는, 그런 틀에 박힌 이야기가 딱 싫어요.” 고현정은 불행과 밀고 당기는 편이 아니다. 그녀의 협상은 짧다. 태연한 얼굴로 꼿꼿이 버티다가 순식간에 둥치를 베어 넘기고 뒤돌아선다. 눈더미 얹힌 지붕이 조짐도 없이 우지끈 무너지듯. “중간 중간 멈추어 푸는 법을 깨우쳐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중학교 시절 그녀가 우울을 이기기 위해 택한 수단은 삭발이었다. 깡마르고 창백한 소녀가 머리를 밀고 다니자 “뇌수술 받은 아이, 앞으로 얼마 못 사는 아이”라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다. 다들 발맞춰 대학 가고 취직하는 진로가 답답했을 때 고등학생 고현정은 한번 더 머리를 밀기 위해 미용실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러지 말고 키도 되는데 미스코리아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들었다. 다르게 사는 법이 그 문턱 너머에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저는 일보 전진이 늦더라도 다 끌어안고 가자는 입장은 아니에요. 꼭 가야 하면 몇 사람 손만 붙잡고 발을 떼요. 결단 전에는 많이 망설이지만 한번 일어난 일은 후회하지 않아요.” 그러나 아무리 단호한 그녀라도 스물세살에 연기생활의 종결을 뜻하는 특이한 결혼을 선택하는 순간 배우로서 충분히 이루었다고 확신했을까? “‘방송활동’이라는 네 글자에는 스물두세살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포함돼 있었어요.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굳이 맞춰가며 해나갈 의욕도 없었던 무렵에 연애를 했어요. 울고 싶은데 때려준다고(웃음), 어차피 결혼 안 한다는 고집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 빨리 겪을 뿐이라고 생각했죠.”
출연이 성사된 <봄날> <해변의 여인> <여우야 뭐하니> 외에 배우로 돌아온 고현정이 합류를 논의한 작품을 되짚어보면 허진호 감독, 임상수 감독, 표민수 PD, 인정옥 작가의 이름이 보인다. 일하지 않는 동안 관객으로 열광하며 그녀가 눈뜸을 들였을 법한 이름들이다. 내내 연기를 그리워한 건 아니라고 그녀는 말한다. “할 일들이 있었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기 때문에 마치 졸업한 모교를 돌아보듯 남의 연기를 보았어요. 이혼하고 한참 뒤 일을 다시 하기로 결심한 무렵에야 시선이 달라졌어요. 계속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전혀 새로운 자격증을 따거나 학교에 입학해야 할까. 그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여겨졌어요. 처음엔 생활인으로서 예전에 그랬듯 덤덤히 연기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돌아오고 나니 작품 한편을 골라도 지금까지 내 삶과 생각이 묻어나야 옳지 않을까, 자꾸 명분을 찾게 되더라고요. 모험적인 기획에 배우로서 힘을 싣는 것도 명분이고, 제 취향도 명분의 하나가 될 수 있고.” 문제의 취향을 그녀는 촉각으로 묘사했다. “보통의 영화나 드라마는 사람들이 지닌 결의 방향대로 순응하며 들어와요. 그런데 저는 반대 방향으로 소스라치게 쓸어주는, 섬유 한 가닥이라도 일으켜 세워주는 작품에 끌려요. 무의식과 기억 저쪽에 있었지만 게을러 외면했던 부분을 깨워주는 작품이요. 팬들은 <노팅힐> 같은 영화를 권하는데 저는 보고 나면 얼굴이 (이목구비를 구기며) 이렇게 되는 영화가 좋아요.” 고현정은 홍상수 영화를 즐겨봤다. <오! 수정>은 일곱번 봤다. “굉장히 마초적인 영화 같지만 동시에 감독님이 중간중간 빠지는 웅덩이까지 보이니까 웃음이 났어요. 영화 속 남자들이 여자를 쉽게 상대하지만 결국 뜻대로 되는 여자는 하나도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웃음)” 그리고 짓궂게 덧붙인다. “극장에 가면 바로 표를 사서 ‘한적하게’ 볼 수 있는 점도 좋았어요.”
<해변의 여인>에서 고현정이 분한 여자의 이름은 문숙이다. 몇해 전 청진동 한 식당의 점심시간. 유니폼을 입은 한 무리의 여직원들이 몰려나간 테이블에 앉은 홍상수 감독은 바닥에 떨어진 명찰 하나를 발견했다. ‘김문숙’의 것이었다. 작명은 우연이었지만 문숙의 행동거지는 고현정과 홍상수 감독의 대화가 빚어낸 필연의 덩어리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식은 아니고 배우의 머릿속을 되도록 많이 알아내 적당한 도구를 쥐어주세요. 오늘 내가 한 말이 과연 내일 촬영분에 쓰일까 설레는 재미가 있었어요. 아무 말 안 하면 어떻게 쓰시나 볼까 궁리한 날도 있었고요. (웃음) 아침에 쪽대본을 받을 때마다 한번도 실망하지 않았어요.” 구애하는 남자에게 ‘댁이 사랑을 하긴 뭘 하냐’고 콧방귀를 뀌던 <극장전>의 영실만큼 <해변의 여인>의 문숙은 다부지다. 애인 창욱(김태우)을 따라 영화감독 중래(김승우)의 여행에 동행한 문숙은, 중래와 뜻을 맞추어 창욱을 따돌리고 사랑을 나눈다. 이튿날 중래가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앞질러 싸늘하게 돌아서는 문숙. 그러나 그녀는 이틀 뒤 중래가 머무는 해변을 다시 찾아와 다른 여자(송선미)와 함께 있는 중래의 방 앞에서 고함을 지른다. 하긴 고현정은 <봄날>에서도 <모래시계>에서도 눈물을 뿌리되 막말을 하며 우는 여자였다. <모래시계>에서 윤혜린은 여자가 담배 피운다고 욕하는 남학생 뺨을 후려갈기며 처음 등장했다. 고현정 특유의 ‘어르는’ 표정도 문숙에게 제격일 터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상대방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고현정의 눈빛은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너도 참 딱하구나”라고 속삭인다. “남자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어떤 역을 맡아도 측은지심이 어린 표현이 나오나봐요. 여자도 딱한 존재인 건 마찬가지지만 저로선 남자를 대하는 연기가 많으니까요.” 그럼 문숙은 ‘희생자’의 위치에 처하기 전에 애인의 팔뚝을 먼저 꼬집어 뜯고 내빼는 여자일까. 고현정은 꼼꼼히 바로잡는다. “아뇨, 상처는 이미 받은 거죠. 그런데 문숙은 상처를 안고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라, 가해자에게 들고 가서 왜냐고 되묻는 여자예요. 딴 여자와 있는 애인을 상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기어이 찾아가 눈으로 보아야만 성이 풀리는 여자고요. 그녀의 많은 장면이 확인하는 행위에 속해요.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고나 당하자는 주의죠.”
홍상수 감독은 <해변의 여인>을 ‘이미지가 가하는 고문’에 관한 이야기라고 흘리듯 말했다. 문숙은 중래에게 다른 여자와 섹스했냐는 질문보다, 만취해 쓰러진 자신의 몸을 두 남녀가 넘어나왔는지 아닌지를 더 집요하게 추궁한다. 고현정은 문숙이 직면한 ‘지옥’을 이렇게 설명한다. “남편이나 남자친구와 싸울 때 보통 그렇지 않아요? 결국 바람 피운 사실이 중요한데도 그런 일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면 후져 보이니까, 다른 명제에 꽂히는 거예요. 남자한테 따질 때 틀을 갖추려고 애쓰는 거죠. 난 네가 바람을 피우건 뭘 하건 괜찮아. 다 괜찮은데, 내 생일날 그랬어야만 해? 그날이 너랑 나한테 어떤 날이니? 너 똑바로 들어. 난 다른 애들이랑 달라. 바가지도 투정도 아니야.” 그녀의 엔진은 정지상태에서 눈깜짝할 사이에 시속 100km에 도달한다. 리듬을 탄 그녀의 설명은 어느새 입센이 쓴 독백처럼 휘몰아친다. 몇초간 영화를 미리 본 기분이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에서 고현정과 작업한 김종학 감독은 오래전 “한줄 대사로도 파괴력을 갖는 배우”라고 그녀를 평했다. 송지나 작가는 “한마디로 여우”라고 고현정을 요약했다. 그처럼 배우 고현정은 극히 장르적이다. 감정을 뭉뚱그려 때로는 세모로 때로는 동그라미로 자유자재한 형상을 만드는 그녀는 보는 사람의 감정을 조장하고 조율하고 조작하는 멜로드라마 장르의 특기를 혼자서도 부릴 줄 안다. “제 안에 굉장히 신파적인 구조가 있어요. 드르륵 문이 열리며 등장하고, 계단을 올라가 절정에 달하고 클라이맥스에서 흐르던 음악이 확 숨죽이면 내레이션이 흐르고, 잠시 뒤 다시 쿵쿵 음악이 울리는 식의 전개를 좋아해요. 사람 관계에서도 잔정은 없고 따뜻한 말을 못하는데, 붉은 노을 속으로 발길을 옮기는 비장한 의리에 매혹돼요. 근데 제 의리는 일상에서 발휘할 기회가 없어요. 전쟁, 호환, 마마 같은 극한 상황을 필요로 하니까. (웃음) 아무튼 장난은 좋아하지 않아요.” 고현정은 온갖 허울이 벗겨진 홍상수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인생이 고이 취급해야 할 무엇이나 되는 양 안간힘을 쓰는 여자로 남을 것 같다. <해변의 여인>은 어쩌면, 처연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지난 7월 초 <연예가중계>와 인터뷰에서 그녀는 비 오는 날 비를 맞기 싫으면 아예 외출을 하지 말아야지 우산을 써도 옷은 젖게 마련이라고 은유했다. 떠도는 말들에 다치지 않냐는 질문에 돌려준 답이었다. “말하자면 저는 지금 ‘시장’에 나온 거잖아요. 제가 ‘상품’이잖아요. 그럼 이 물건이 좋네, 싫네, 색깔이 마음에 안 드네 하는 소리는 당연히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서슬에 하루 기뻤다 하루 슬펐다 흔들릴 거라면 나서기 전에 좀더 생각했어야죠.” 생각이라면 충분히 했다는 단언으로 들렸다. 후배 연기자가 그녀의 말투를 흉내낸 일화에서도 고현정은 생활의 지혜를 집어낸다. “희화화도 공감대가 있는 대상이어야 가능하겠죠. 협의하지 않은 대중이 보고 동시에 웃었다면, 저는 몰라도 남들은 다같이 보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저는 여러분이 제가 보여드리는 모습만 보시는 줄 알았지만, 실은 가당치도 않은 거죠. ” 그래도 <해변의 여인>에서 직접 부른 노래로 나중에 음반이라도 낼 계획인지 무심코 묻자 펄쩍 뛴다. “연기하면서 먹는 욕도 힘들어 죽겠는데 제가 왜요? (웃음) 비는 몰라도, 우박은 피할 수 있어요. 우박은 자초해서 맞는 거예요. 후드득 소리가 들리면 나가지 말아야지. 그걸 왜 맞아요?” 인터뷰하는 동안 익숙해진 그녀의 야무진 마무리 스윙이 어김없이 뒤따랐다. “그렇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