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영화를 보다가 내 이름이 나와서 놀라는 경우가 있다. 어린 시절 봤던 TV드라마 <달동네>에서 안소영의 애인 이름이 동철이었고 <살인의 추억>에선 송재호가 분한 수사반장 이름이 동철이었다.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흡혈형사 나도열>에 나오는 악당 이름은 성까지 같아서 남동철이란다. 꽤 촌스런 이름인데 그래서인지 캐스팅이 상당히 잘된다.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니 주인공 동구의 동생 이름이 동철이다. 주인공 이름으로 캐스팅되진 않아도 주변 인물 이름으론 그럴듯한 모양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동철이 이름으로 형 동구에게 편지 한통을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잘 지내? 형보다 20살도 더 많은 내가 형이라고 부르니까 어색하지만 감독이 동구 동생 동철이라고 이름지은 거니까 이해해줘. 옛날에 홍길동이란 사람은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못해 가출을 하기도 했다니까 나 확 가출해버리기 전에 그냥 내 맘대로 형이라고 부를게.
영화를 보고 나니까 그동안 형을 많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형은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형이 말했잖아. “난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라고. 맞아. 형에게 생존의 문제인 것을 사람들은 선택의 문제라고 알고 있는 거지. 아니, 선택의 문제라고 해도 그래. 왜 나의 선택이 남들과 똑같아야 하는 거지. 여자로 살고 싶어 성전환 수술 받겠다는데 한푼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미쳤다고 욕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아마 아버지는 평생 형을 이해 못하겠지. 당신이 실패한 인생이란 건 알지만 뭐가 문제인지 결코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만날 “가드 올리고! 상대 주시하고!”라고 말하며 센 척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무서워서 그랬던 거야. 링 밖의 세상이 너무 겁이 나서 자기 집 안방을 링이라고 생각하고 링 안에 있는 아주 약한 사람들만 괴롭혔지. 알고보면 불쌍한 아버지지만, 형이 아버지를 집어던진 건 정말 잘한 일이야. 자기 집 안방이라도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을 기회가 됐을 테지. 언젠가는 아버지도 형을 고마워할걸.
어머니가 그러더라. 형,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외로울지 모른다고. 그 말도 일리가 있지. 함부로 패고 욕하는 아버지는 냅다 집어던지기라도 하지,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는 아버지처럼 집어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난 어머니 말처럼 형이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남들이 힘들 때 위로할 줄도 알고, 부당한 일에 항의할 줄도 알고, 힘들어도 투정부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형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형이 춤추고 노래하면 누구라도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이며 박자를 맞출 거야. 아무리 슬퍼도 형은 귀엽게 노래 부르며 경쾌한 스텝을 밟거든. 아마도 형은 씨름을 배우기 전부터 뒤집기 기술을 알았던 거 같아. 험악하고 무서운 세상이지만 그렇게 춤과 노래와 웃음으로 겨드랑이를 간질이면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뒤집어지고 말 테니까.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던 싸움에서 형은 이겼고 앞으로도 지지 않을 거야. 남들이 아프다고 울고 겁먹고 물러설 때 형은 쓱 코피를 닦으며 툭툭 털고 일어설 테니까. 그런 형이 좋아. 형을 보고 있으면 이런 말이 하고 싶어.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적들이 모두 웃겨 죽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