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봉준호 감독이 <유레루>의 니시카와 미와 감독에게 묻다
2006-08-30
정리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사진 : 오계옥

<괴물>과 <유레루>. 봉준호와 니시카와 미와. 언뜻 상상이 안 가는 대구다. <괴물>의 봉준호 감독과 <유레루>의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서로의 열성 팬이고, 또 그들의 신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래서 반신반의했다. 게다가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봉준호 감독은 에든버러영화제에 가 있어야만 했다. 어차피 안 될 일 같았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시간을 쪼개 <유레루>에 관한 질문들을 꼼꼼하게 작성해 서면으로 보냈고,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거기에 정성스럽게 답했다. 그렇게 묶어놓고 보니 오히려 요즘은 보기 힘든 귀한 서신 왕래의 모양이 되었다. 국경을 넘어, 영화의 색깔을 넘어 오간 이 편지는 충분히 정겹고 흥미롭게 읽힐 것이다.

(<씨네21> 다음호에는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괴물>에 대해 묻고 봉준호 감독이 답한 내용을 실을 예정이다.)

To 니시카와 미와

안녕하세요. 봉준호입니다. <유레루>의 한국 개봉을 축하드립니다. 3년 전 제가 모리오카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갔을 때 당신의 데뷔작 <산딸기>를 처음으로 보았죠. 폐막식 직후 술자리에서 보았던, 영화만큼이나 총명한 당신의 눈빛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올해 5월,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괴물>과 <유레루>가 나란히 초청되었죠. 감독주간 인터뷰 장소에서 스쳐가듯 잠시 인사했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서로의 바쁜 일정 탓에 이야기를 나누지도, 영화를 볼 수도 없었지만, 은근히 반가웠습니다. 몇 주 전 뒤늦게 한국에서 <유레루>를 보았습니다. <산딸기>에 이어 또 한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주신 것 감사합니다. 당신 영화의 팬으로서 몇 가지 질문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짧게나마 서울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PS. 몇주 전 <괴물> 홍보차 도쿄에 갔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이 신작 <HANA>의 리플릿에 친필사인과 함께 축하의 뜻을 보내주셨습니다. 매우 감사했고, 영광이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님을 만나면 꼭 감사의 말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To 봉준호

안녕하세요. 니시카와 미와입니다. 이번 방한에서 뵐 수 없어 너무 아쉽네요. 그러나 한국 관객이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셔서 짧은 체류였지만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감독님이 선물해주신 <괴물> O.S.T도 정말 감사합니다. <괴물>의 대히트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요. 칸영화제에서도 평이 절대적이었지요. 그때 같이 간 오다리기 조는 감독주간의 공식상영 때 <괴물>을 보고는 흥분한 채 저에게 와서는 꼭 <괴물>을 봐야 한다며 추천하더군요. 그때의 짧은 만남은 많이 아쉬웠습니다. 사실 모리오카영화제 이후에야 <살인의 추억>을 보았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모티브도 세계관도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괴물>은 몇주 전 일본 배급사에서 비디오로 받아서 보았습니다(시사회장에서는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볼 수가 없더군요…). 군데군데 포복절도하며 즐겁게 보았고, 다른 종류의 작품에 도전하면서도 봉 감독님 특유의 사람에 대한 묘사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 등이 여전히 발휘되어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러고나서 일본에서 개봉하고 나면 스크린으로 다시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하여 한강을 보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당장 그날 밤 극장으로 달려가 심야상영을 보았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니 대사는 기억력에 의존해야 했지만, 더 집중이 되어 처음에는 못 봤던 디테일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훌륭한 작품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오락영화를 구축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봉 감독님이 보내주신 편지와 영화평에도 정말 감격했습니다. 이후에 저도 몇 가지 질문을 준비해 보내겠습니다.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추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봉 감독님 작품의 광팬이십니다. <괴물>도 기대를 많이 하고 계십니다. 봉 감독님의 메시지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이하 봉준호 감독이 묻고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답했다.)

-복잡하면서도 생생한 하룻밤 당신의 ‘꿈’이 <유레루>의 출발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꿈을 꾸다가 깨어났던 그날 아침의 순간이 궁금합니다. 꿈속의 이미지와 상황들을 잊지 않기 위해 그 즉시 노트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나요? 그리고 그 꿈에서 출발하여 한편의 장편영화를 만들겠다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까지 어떤 고민이 있었습니까?
=(살인인 듯한 장면을 목격하는) 꿈을 꾸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살인자와 관련을 맺게 된 나의 앞으로의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비록 꿈속에서 ‘허구의 나’라는 사람이 겪은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제 자신의 본질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망하고 경악하는 것과 동시에 그 발견이 저를 자극하기 시작했고, 제작 의욕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아침 고레에다 감독을 만나자마자 꿈 얘기를 했더니, “재미있네, 영화로 하지” 하며 미소를 지으시더군요(니시카와 미와는 <아무도 모른다>의 고레다 히로카즈가 연출한 <원더풀 라이프>에 스탭으로 참여한 바 있다-편집자).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이동 중인 차량 안에서 공책에 메모를 해놓았던 걸 기억합니다. 고민이었던 건 당시 준비하고 있던 제 다른 시나리오였습니다. 저로서는 준비 중인 시나리오를 꼭 완성하고 싶다는 의욕도 있었지만, 프로듀서들은 이 꿈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을 더 지지했습니다.

-(<유레루>와 비슷하게) 데뷔작 <산딸기>에는 가족이지만 상반된 성격의 남매가 등장합니다. 이번 <유레루>에서도 일본적인 색채가 물씬 나는 가족 안에 서로 다른 형제가 등장합니다. 당신 영화에 ‘가족’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당신 영화의 궁극적인 화두인지 아니면 캐릭터를 펼쳐나가는 단순한 출발점인지 궁금합니다.
=<산딸기>는 ‘가족이란 무엇일까’라는 주제를 영화로 옮긴 작품이었으니, ‘가족’이 확실히 그 영화의 중심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밀접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형제’라는 모티브는 가장 관계가 분명하고 관객 역시 받아들이기 쉬운 보편성을 가질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이야기가 형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 비추어 보여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경위를 통해 다시 ‘가족’의 주제를 다루게 된 것입니다. 가족이란 그야말로 혼잡한 우주이고, 더 넓게 볼 때 인류는 그 혼잡함을 영원히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저한테는 무한히 매력적입니다.

-당신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의 섬세한 방식으로 예리하게 캐릭터를 묘사합니다. 도입부에서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나가버리는 오다기리 조의 모습이라든가, 아버지와 동생의 싸움을 말리며 허둥지둥하는 미노루(가가와 데루유키)의 다리 위로 똑똑 떨어지는 술의 인서트 같은 장면들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사소한 듯 보이는 세부묘사로 인물의 본질을 순식간에 표현해내는, 매우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이렇게 간접적, 영화적으로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당신만의 방식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것은 오다기리 조의 애드리브였습니다. 본인도 무의식이라고 하더군요. 그 신은 촬영 첫날에 처음 찍은 컷으로, 여러 테이크를 거치고 난 뒤 마지막 오케이 테이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행동에 부정적인 의견을 낸 스탭도 있었지만 저는 이것이야말로 타케루의 성격일 거라 느꼈고, 그래서 오케이를 냈습니다. 이러한 현장의 순간에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이번 영화에서 되도록 설명적인 대사를 쓰지 않으면서 인물의 특징이나 심리를 보여주는 ‘그림’을 만들어보려 했습니다. 저는 사실 글로 씌어진 세계의 가능성을 믿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 제 습관을 바꿔보는 의미로서 ‘영화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짜낸 아이디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의 포스터에도 볼 수 있듯, 오다기리 조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자 이 영화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면회실 장면과 법정장면에서의 클로즈업도 인상적이었지만, 빨래를 정리하는 형과 문틈으로 대화를 나눈 뒤 미닫이문을 닫아 완전히 어두워진 오다기리 조의 얼굴을 컷하지 않고 상당 시간 보여준 장면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사실 감독이라는 직업상 우리는 늘 카메라의 안과 밖에서 배우의 얼굴을 바라보게 됩니다. 당신이 보기에 오다기리 조의 얼굴과 눈빛이 뿜어내는 그만의 독특한 느낌이나 정서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먼저 그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아름다움은 확실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름답게 태어난 자(또는 뛰어난 자)’의 내면에 묻어 지워지지 않는 ‘우월감’, ‘나르시시즘’, ‘오만’, ‘냉혹’ 그리고 그것 때문에 타인에게 시기를 당하거나 내면적인 본질에 오해가 생기는 고독. 타케루는 그런 것들을 안고 사는 인물이고, 그 역을 맡은 오다기리 조도 인생에서 적지 않게 그런 ‘아름다운 자’의 빛과 그늘을 경험하고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저는 관찰했습니다. 그의 불꽃같은 아름다움이 타케루의 고독감을 짙게 표현해내 영화를 더 섬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가가와 데루유키의 연기가 놀랍습니다. <귀신이 온다>에서도 그의 인상적인 연기를 볼 수 있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더욱 조용하고 절제된 톤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놀라운 경지를 선보인 것 같습니다. 법정장면에서의 독특한 손동작과 몸놀림, 다다미방에 무릎 꿇고 앉아 빨래를 정리하는 모습, 면회실에서의 변화무쌍한 연기, 라스트신에서의 잊지 못할 표정…. 모두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와의 작업은 어떠했습니까? 대사와 동작에서 즉흥적인 부분들도 많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선까지 세밀하게 연기 주문을 했는지, 촬영현장에서 그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가가와 데루유키는 대단한 열정가입니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미노루는 내 자신”이라 느꼈다며 역할과 자신을 결합시켰습니다. 촬영 전에는 “감독님이 망설이는 부분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미노루는 저한테 맡기면 되니까요”라고 하더라고요. 한번은 촬영 중에 러닝타임 조정관계로 면회실 장면의 후반을 깔끔하게 다시 고쳤더니 그가 심하게 항의를 했죠. “나중에 편집을 해도 되니까 원래 있던 대로 해달라”고 하면서요. 저는 그 열정에 감동받아 원래대로 진행했습니다. 연기구성 방법도 논리적인 배우고, 마치 작게 쪼개진 연기 파편을 담은 서랍이 무수하게 몸에 갖추어져 있어서, 주문에 맞추어 그것들을 정확하게 펼쳐 보여주는 듯 확실합니다. 그러면서도 대사를 철저하게 따르고 현장에서 크게 다르게 하는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가가와가 송강호씨의 열광적인 팬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봉 감독님이 관심을 가져주셨다는 걸 알면 많이 고마워할 것 같습니다.

-영화의 핵심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치에코의 추락장면에서 당신은 독특한 장면 배열을 보여줍니다. 사운드의 드라마틱한 변화와 함께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의 롱테이크… 사진작가인 오다기리 조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 신의 느낌은 여러 측면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을 연상시킵니다. 혹시 의도적인 오마주였는지요? 만일 그렇다면 평소에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을 좋아하시는지요?
=‘시각기억의 불확실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안토니오닌의 <욕망>과 공통점이 있다고 초기단계에서 고레에다 감독도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작품을 의식한 적은 없습니다. 추락장면의 구성은 편집 작업 내내 끝까지 고민했습니다. 무엇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 이번 영화에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라도 잘못하게 되면 영화의 만듦새 자체가 전혀 달라지게 되니까요. 다리 위에서 일어난 것을 보여주는 대신 나무들 정경을 보여준 것은 관객의 적극적인 추측이나 억측이 개입할 수 있도록 의도한 계획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관객이 각자 상상력을 키우면서 능동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즐거운 행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담스러운 스토리와 주제를 끝까지 받아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전체에 독특한 느낌의 인서트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잘린 토마토의 단면, 빅클로즈업된 물고기의 눈 등등. 나름의 리듬을 가지고 등장하는 인서트들이 인상적인데요, 어떤 느낌을 의도한 것인지요?
=저는 정물과 풍경이 때때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나 심리를 깊이있게 표현해내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생 때 사진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말없는 정경’은 보는 사람의 상상의 범위와 해석을 끊임없이 허용하는 것이라고 배운 적이 있습니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말없는 컷들이 들어감으로써 시각, 청각의 양면에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에 관객은 익숙해집니다. 혹은 그 부족함 속에서 관객은 상상력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대부분은 ‘세상의 떠들썩함에 대한 마음속 무서운 정적’을 의도한 컷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은 한국이나 일본의 동세대 젊은 감독들과 뭔가 다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통찰 또는 신중한 접근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캐릭터를 놓고 일종의 정면승부를 펼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굳이 야구에 비유하자면, 직구로 승부하는 투수 같다고나 할까요. 젊은 감독으로서 이런 ‘정공법’이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어떤 감독이다’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애매한 질문이지만 편하게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본 문학에서 받은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내면의 깊고 어두운 부분에 관심이 많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이 앞으로도 공통의 주제가 될 것 같고요. 단 미국영화도 많이 보고 자랐기 때문에 구성이 좋고 재미난 스토리의 영화도 좋아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깊은 내면을 찾아내는 여정과 강렬한 줄거리가 공존하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현재 제가 특이한 존재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결코 뭔가 새로운 것에 매달리는 타입은 아닙니다. 어쩌면 올드하다고 할까요? 봉준호 감독님도 그러시겠지만, 저도 제 자신이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답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여간 지금까지 좋은 질문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자신의 작품 습성을 알게 된 좋은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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