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 영화는 대략 100여편이다. 지난해 82편이 제작됐던 것에 비해 20% 가량 늘어난 수치다. 이동통신사 자금 유입과 우회 상장 등으로 메이저 제작사들이 라인 업을 확대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 영화 연간 100편 시대’. 한국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곳곳에서 영화 한편 만들어서 개봉하기가 갑자기 너무 힘들어졌다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영화 제작·배급 인프라는 그대로인데, 제작 편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스태프나 장비·세트장은 물론이고, 개봉일정 잡는 게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예전에는 배우 일정에 맞춰서 촬영 스케줄을 잡았지만, 요즘은 장비 스케줄에 따라 스케줄을 짠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종호 엠케이픽쳐스 프로듀서는 최근 충무로의 ‘장비 대여 러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카메라는 물론 조명이나 크레인까지 장비 하나 빌리는 게 배우들 스케줄 빼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촬영 기간이 길어지면 장비 대여료를 할인해주던 충무로의 훈훈한 미덕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 정도는 양호한 편. 지난 4월 개봉했던 <사생결단>의 경우, 카메라 렌즈 스케줄 때문에 한 장소에 두 번이나 촬영을 들어가는 수고도 감수해야 했다. 또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보름정도 촬영 시작이 늦어졌지만, 계약을 늦췄다가는 카메라 대여가 불가능해질 것 같아 촬영 시작 보름 전부터 계약을 맺기도 했다.
세트장 예약 역시 하늘의 별따기다. 남양주 종합촬영소나 익산 교도소 세트장은 물론 전국 지자체들이 운영하는 대부분의 세트장이 예약 만원 상태다. 세트 촬영 몇개월 전부터 스케줄을 잡아 예약을 해놓지 못한 경우 아쉬운대로 광고 촬영에 쓰이는 세트장이 사용된다. 하지만 광고 세트장은 공간이 협소하고, 방음 시설도 빈약하다. 동시 녹음이 주를 이루는 영화 촬영에 외부 소음은 치명적인 약점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이밖에 후반 작업 물량이 폭주하면서 작업을 급하게, 많이 하다 보니 네거티브 필름이 찢어지는 등 사고도 잦아졌다. 또 영화쪽 스태프와 장비가 턱없이 부족해 방송쪽 스태프와 장비들이 대거 영화판으로 급조되는 등 ‘한국영화 연간 100편 시대’를 맞아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바로 ‘개봉’이다. 산술적으로 한 주에 2편 이상의 한국 영화가 개봉돼야 해소될 물량의 영화들이 제작되다 보니, 한국영화들끼리는 개봉 날짜를 조정해 경쟁을 피해가던 충무로의 ‘관습’마저도 지켜지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심지어 지난 24일에는 <시간> <예의없는 것들> <아이스케키> <원탁의 천사> 등 4편의 영화가 동시에 개봉하기도 했다. 그나마 개봉 일정을 잡은 경우는 다행이고, 아예 개봉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경우 또한 많다. 이선미 청년필름 피디는 “아주 센 영화들이 아닌 이상 개봉 일정을 확정하는 게 어렵다”며 “후반 작업까지 다 마치고도 개봉 일정을 못잡는 영화가 허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