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홍상수 감독, “고현정은 옆에 함께 선 느낌 주는 배우”
2006-08-31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해변의 여인>까지 7편의 영화를 만들고 숱한 인터뷰를 해오면서 홍상수(45) 감독은 인터뷰 자체에 지친 듯했다. “아무래도 난 인터뷰 하기에 적합한 감독이 아닌 것 같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영화 만드는 방식이 똑 같고 그래서 같은 말 또 하고….” 그래도 홍 감독에게선, 이런 저런 얘길 하다보면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쥐어 짜내는 수밖에.

-이 영화를 시작하게 한 모티브가 있다면.
=내가 영화판에서 알던 한 여자와 비슷한 여자를 시골에서 만난 적이 있다. 전혀 모르는 여자인데, 내가 그 여자를 아는 것처럼 미소 짓고 하더라. 그 여자는 나를 생판 모를 텐데. 그런 내 모습이 재밌었다. 그게 출발점이다. 비슷한 두 여자가 있다. 한 여자가 떠나고, 다른 비슷한 여자를 봤다…. 거기에 ‘이미지’라는 말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영화에서 고현정은 다른 때보다 살쪄보인다.
=나는 찌우라고 한 적 없다.(웃음) 배우들이 열심히 자발적으로 도와줬다. 고맙다. <생활의 발견> 때 후반부에 경주에서의 일들을 찍으면서 김상경에게 혼자 여관가서 자라고 했다. 꿀꿀한 기분에 젖으라는 뜻이었지만 농담처럼 한 거다. 배우에게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하겠나. 그런데 진짜로 그렇게 하더라. 그런 자발성이 있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배우들이 그랬다. 내가 배우와 작업하는 방식을 두가지로 나눠 본다면, 하나는 배우 자체가 주는 느낌에 내가 의도하는 모습들을 대입시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우가 내 의도 안에 들어와 섞이는 것이다. 둘 다 장단점이 있을 텐데, 고현정은 후자에 가까왔다. 고현정은 아침에 쪽지를 주면 바로 반응을 보인다. 어색하고 꺼려지는 대사가 있을 법도 한데, 고현정은 매우 고무적이고 의욕적인 반응을 보인다. 옆에 딱 서주는 느낌을 준다. “우리 같이 가요”하는 느낌.

-중래는 힘들어 하면서도 계속 그렇게 살 것같다. 어떤 자조 같은 게 느껴진다.
=나는 자조는 안 한다. 다 같이 아이러니를 하지. 자기 연민적인 자조는 재미가 없다. 그건 도망갈 구멍이 있으니까 하는 거다. 나는 정말 안 되면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면서 소주 마시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되는 거지, 자조는 안 한다. 자조는 아직도 어떤 대상에 어린애처럼 기대는 거다. 응석이다. 그것도 폼이고 허구이다.

-홍 감독 영화에서 처음으로 섹스씬, 노출씬이 없다.
=고현정이 기자회견에서 자기 때문에 노출씬을 못 찍은 것같아 미안하다고 하던데, 참 말도 잘해.(웃음) 그게 아니고, 난 처음부터 안 찍으려고 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때 베드씬 찍기가 참 힘들었다. 다음부터 안 해야지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목까지 차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극장전>에서 한번 더 하고 나서,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도 안 하려고 한다. 단, 노출이 어떤 다른 쾌감이나 생명력을 줄 수 있으면 할지는 몰라도, 이전과 같은 톤으로는 안 한다.

-문숙의 캐릭터가 무척 현실감이 있다. 문숙과 중래가 마지막까지 다투는 게, 문숙이 중래가 묶는 펜션 문밖에서 잘 때 중래와 선희가 문숙을 넘어서 나갔느냐 여부이다. ‘날 넘어갔단 말이야?’하고 따지는 그 모습이 여러모로 재밌다. 그 캐릭터는 그런 걸 중요시할 것 같다.
=그 설정은 일찍부터 염두에 뒀다. 왜 자기 발만 넘어가도 난리를 떠는 사람들 있지 않나. 나도 남이 날 넘어가는 것 안 좋아하는 것 같고. 이 영화에선 문숙에게 그게 핑계일 수 있는 거지만.

-마지막 장면이 밝다.
=마지막 문숙의 웃음은 정말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뒤에 지어보이는 웃음을 의도했다. 내가 전에 그랬던 적이 있다. 지하철 안에서 어떤 여자가 내 팔을 갑자기 때리는 것이었다. 애 업은 아주머니였는데, 내 팔에 모기가 붙어 있었던 거다. 그 여자는 죄송하다고 했고 실제로 남의 팔을 치는 행위가 실례라는 생각도 했겠지만, 그 이전에 모기가 남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걸 보고 있기가 힘들었던 거다. 그만큼 남에 대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받은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그걸 떠올리면서 썼다. 하지만 사실 밝은 이야기도 아닌데. 남자 속이라는 게 그렇게 드러나고, 여자도 어떤 면에선 비슷하고. 밝게 하겠다, 어둡게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한 건 아니다. 처음엔 남자 중심으로 끝까지 갈까 하다가, 중간에 여자로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래로 대표되는 우리 세대는 그렇게 늙어갈 거다, 문숙으로 대표되는 너희 세대는 좀 더 씩씩하게 가라. 그런 느낌이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늙는 게 좋다. 몸이 변해가는 게 좋다. 눈에 노안이 오고, 이런 게 재밌다. 나는 의도를 못 믿으니까. 하지만 몸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확실한 게 없는 삶에서 늙으면서 오는 신체 변화는 확실하지 않은가. 어릴 때 신 김치 좋아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갓 담근 김치가 맛있어졌다. 내가 의도한 게 아닌데, 확실한 변화가 생긴 거다. 이런 게 재밌다.

사진 김경호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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