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몇 차례 발언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시간> 시사회 뒤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시작해서 <100분 토론>을 거쳐 사죄문 소동까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기덕 감독이 <연합뉴스>에 보낸 사죄문의 전문을 보지 못해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보도된 내용이 맞다면 그걸 사죄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당신들이 맞고 내가 틀렸다, 당신들을 우롱해서 죄송하다, 는 말이긴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자학과 자책은 김기덕의 진심이라고 믿기 어렵다. 정말 김기덕 감독은 자신을 “열등감이 낳은 괴물”이라고, 자신의 작품을 “모두 쓰레기”라고 생각할까? 역설에 관한 약간의 상식을 동원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의 글을 사죄문이 아니라 차라리 격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쓰레기로, 괴물로 이름 붙인 사회를 비판하는 격문.
“쓰레기통을 뒤지면 향기가 난다.” 언젠가 김기덕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그는 <악어>에서 <나쁜 남자>에 이르는 영화들에서 사회의 쓰레기로 취급될 만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런 밑바닥 인생에서 숭고함을 발견하는 것이 김기덕 영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자신의 영화를 쓰레기라 부르는 것은 김기덕의 자기 부정처럼 들리지 않는다. 쓰레기에서 예술을 만드는 감독에게 쓰레기와 예술의 이분법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괴물을 끄집어내는 감독이기도 하다. <사마리아> 개봉 때 했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가 어떤 그물망을 던져서 그물에 걸리는 사람은 악이고 빠져나가는 사람은 선으로 정리될 뿐이다. 그물코에 따라서 다 걸린다. 이 사회의 법과 제도는 그물코다. 그물코가 좁으면 걸리고 넓으면 빠져나오는 것뿐이다.” 단순히 말하면 김기덕 영화는 그물에 걸려든 괴물로 시작해서 실은 그물 자체가 괴물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를 괴물로 명명한 것은 김기덕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의 그물망을 고발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 영화는 한번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이게 우리 모습이 아니냐. 극장에서 우리 모습을 한번 확인하고 살아가자는 거다.” 그때랑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엔 극장이 아니라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그걸 확인했다는 것일 뿐이다. 어쩐지 나는 이번 사태가 김기덕의 행위예술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보다 몇십배 많은 관객이 찾아와 관람평을 남긴 퍼포먼스.
그의 신작 <시간>은 남자의 사랑을 회복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만날 똑같은 얼굴 지겹지 않아, 라고 묻는 이 여자가 사랑을 되찾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자기 얼굴을 고치는 것이다. 새로운 얼굴로 나타난 여자는 남자를 다시 차지한 뒤 울먹이며 관객을 향해 말한다. “제 뜻대로 됐네요. 그런데 제가 행복해 보이나요?” 김기덕의 사죄문이라는 걸 접하면서 나는 <시간>의 이 장면을 떠올렸다. 김기덕의 글을 이 장면의 대사로 바꾸면 이렇게 될 것이다. “당신들 뜻대로 제가 괴물이 되고 쓰레기가 됐네요. 그래서 당신은 행복해졌나요?” 대중의 사랑에 목말랐던 그가 이제 더이상 구애를 포기하고 절망적 제스처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게 나만의 착각이고 오해일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그의 글이 사죄문도, 은퇴선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사죄문이나 은퇴선언으로 읽어선 안 된다고 믿는다. 제발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서둘러 묻고 제사 지내려 들지 말자. 그의 진심이 무엇이든 나는 그의 글을 오직 김기덕의 퍼포먼스로 받아들인다. 그래야만, 그가 돌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