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이승과 저승 사이에 서있는 중재자, <사이에서>의 이해경
2006-09-11
글 : 장미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그녀의 목구멍까지 슬픔이 차오른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곧 어깨를 들썩이는 통곡으로 바뀐다. “그녀의 남다른 신통력은, 그녀가 농사를 지어도 충분할 정도로 많이 흘렸다는 눈물의 대가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가 이외수의 표현은 굿판으로 흘러온 넋의 설움에 울고 또 우는 이해경의 모습을 적확하게 짚어낸다. 무당 혹은 무당 아줌마, 무당 선생님이라고 불린다는 이해경. 점집 근처에 가본 적조차 없던 그녀는 신병을 앓는 중에도 무당 되기를 맹렬히 거부했었다. “숙명은 타고나는 것이라서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숙명이다.” 이후 한 무당에게서 눈이 동그란 아기가 엄마를 살려달라며 자꾸 맴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이해경은 숙명처럼 내림굿을 받기로 결심한다. 5살 난 아들의 죽음을 되새기며 들어선 무속인의 삶.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사이에서>는 이처럼 자신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껴안”는 무당 이해경을 전면에 내세웠다. 신과 인간 사이, 이승과 저승 사이, 현실과 비현실 사이. 그 틈새에 선 무속인들은 온전히 흘러가지 못한 혼령들의 사랑, 증오, 뉘우침 따위를 자신의 몸을 통해 실어날라야 한다.

“무당을 앞세워 엉뚱한 짓거리 하는 건 용납 못한다고 냉정하게 잘랐는데 결국 꾐에 빠졌다. (웃음)” 이창재 감독과 만난 2003년 봄을 떠올리며 이해경이 말했다. Q채널에서 7년간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이창재 감독은 샤머니즘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60여명의 무속인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조언자의 역할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였을 이해경은 이것이 자신을 찍는 작업임을 알고 처음에는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때 이 감독이 주술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무당 내면에 감춰진 진실성을 찾아보겠다고 계속 설득하더라.” 무당을 상업적, 오락적으로 그려온 기존 언론에 질색하던 이해경은 대신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한달 동안 카메라를 들지 말고 지켜만 볼 것, 연출하지 않을 것, 편집 과정에 참여하게 해줄 것 등.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거의 다 자기 고집대로 해놨더라고. (웃음)” 6개월여의 기간 동안 찍지 말라, 찍겠다 언성을 높이길 여러 번. 불 같은 성격의 두 사람은 그럼에도 믿음 하나만은 놓지 않았고 그 속에서 피어난 98분가량의 다큐멘터리는 오프닝부터 강렬하다. 동틀 무렵 어느 바닷가. 해변에 나가 앉은 28살 인희는 접신하는 것이 두렵고 싫다며 연신 울부짖는다. 몸부림치는 인희와 달리 꼿꼿하게 등을 곧추세운 이해경은 몸에 힘을 빼고 신명을 받아들이라며 얼르고 또 달랜다. 여기에 갖가지 병에 시달리다 뒤늦게 내림굿을 받는 중년 여인 영희, 천왕신과 그의 아들을 목격한 뒤 귀신의 놀림을 받는 8살 동빈이의 사연이 얽혀들면 신내림을 끈으로 만난 사람들의 얘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인연의 고리는 영희의 기구함에 한숨을 내쉬거나 울먹이는 동빈이를 토닥이는 이해경에게로 오롯이 귀결된다.

“성질이 아주 더럽고 (웃음) 괄괄한 분”이라는 이창재 감독의 말처럼 이해경은 일상에서도 감정을 내지르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는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 록그룹을 사랑하는 록마니아라는 점이기도 하다. “록에는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힘이 있다. 그런 광적이고 폭발적인 부분이 나와 잘 맞는다. 내가 힘든 상황에서도 타락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록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애니멀스의 <해뜨는 집>을 들으며 키웠던 음악에 대한 열정. 거기에 신명을 쫓으며 익힌 몸짓을 내딛고 그녀는 황병기 창작활동40주년기념음악회, 한·일월드컵 축하공연, 춘천마임축제 등 갖가지 공연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황병기 선생님의 음악회 <우리는 하나>는 평생 기억에 남을 공연이다. 멋모르고 한 거라 부끄럽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대를 읽을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공연은 잠시 쉬고 있지만 이해경은 의식에 사용할 지화(紙花)를 만들거나 강신무를 가르치는 등의 활동으로 여전히 바쁘다. “<사이에서>가 무당은 모두 사기꾼이나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식의 선입견을 바꾸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 잊지 않고 던진 그녀의 말에서 오래도록 품고 있었을 소망 한 조각이 슬며시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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