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영화적 재미의 새로운 경지, <해변의 여인>
2006-09-13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원칙을 밝혀내려는 강박을 가볍게 조롱하고 넘어가는 영화 <해변의 여인>

‘fun’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한 한 학생의 평이다. 집약적 평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해변의 여인>을 볼 때 이제까지 한국영화를 보는 어떤 태도와도 닮지 않은 모드로 즐기는 내 자신과 영화 이웃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디오 관람이 아닌 극장에서 볼 때 말이다. <극장전>을 시사하러 갔을 때도 그랬다. 극장 안 여기저기서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의 속내를 알아차린 화답격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극장전>이 끝난 뒤 난 종로 조계사쪽으로 걸어갔는데 연등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영화는 일상처럼 누덕하게 <극장전>을 들려주고, 길가엔 마술 같은 점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기분 좋은 영화 보기 경험이었다. 과도한 의미 부여도 경박한 의미 빼기도 아닌, 그 어디쯤에 홍상수 영화들은 존재하며 그러한 영화들을 ‘한국영화’로 즐기는 것은 분명 신체험이다.

남자 둘, 여자 하나의 여행

<해변의 여인>은 간명한 필기체로 크레딧 소개가 끝난 뒤, 침대와 앉은뱅이 책상만 덜렁 놓인 방에서 시작한다. 감독 중래(김승우)와 창욱(김태우, 단편영화에 세트를 만들어준 적이 있단다)이 여행 계획을 두고 가벼운 설왕설래를 벌인다. 줌인이 슬며시 들어간다. 중래와 창욱의 대화장면은 사실 별 사이즈 변화가 필요없다. 그래도 카메라는 가벼운 줌인을 유희처럼 해낸다. 이후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김형구의 촬영은 프레이밍이나 줌인이 유희적이고 은근히 대담하다. 영화 전반에 슬금슬금 끼어드는 놀리는 듯한 피아노와 기 소리의 반복, 변주처럼 이 영화에서 줌인은 시선의 긴장을 요구하기보다는 ‘알고 싶어? 뭘 알고 싶은데?’ 하고 툭툭 치며 서사의 추임새를 넣는 쪽이다.

중래의 설득을 가장한 윽박지름에 창욱은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의 선후배들처럼 남자 2, 여자 1의 여행을 떠난다. 흔히 삼각관계라 이르는 관계다. 이 여자 1은 장안의 화제, 고현정이 맡은 문숙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독일에서 오래 살았고 작곡을 해왔으나 최근 직접 노래한 데모테이프를 만들었다.

영화 도입부에 소개되자마자 문숙은 “왜 지랄이야”는 대사를 친다. 이후 나는 문숙에게서 귀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 명대사를 잇는 것은 “인사 잘하시네”라는 낡은 농담이다. 문숙이 중래에게 옷에 무엇이 묻었다는 신호를 보내자 중래가 고개를 숙이고, 문숙이 바로 위와 같은 대사를 하는 것이다. 중래 역시 만만치 않아 그녀를 때리는 시늉을 하고, 문숙은 이 느닷없는 친밀한 장난에 잘도 응답한다. 고현정의 스타 이미지를 이리저리 뒤집는 페르소나로서의 문숙의 등장은 신선하고 재밌다.

이들은 신두리 해변가의 숙소에서 묵게 된다. 중래와 창욱과 술을 마시다 문숙은 자신이 외국에 있을 때 외국 남자 2∼3명을 만났다는 고백을 한다. 그리고 창욱의 눈을 피해 중래와 자게 된다. 그러나 중래는 다음날 뚱하게 문숙을 대하고 둘은 우리 이제 별 볼일이 있을까 하는 태도로 헤어진다.

바로 다음, 이틀 뒤라는 자막이 나오고 우리는 서울로 돌아간 줄 알았던 중래가 신두리 해변으로 돌아왔음을 알게 된다. 이윽고 두명의 다른 여자들에게 접근하는 중래를 발견하는데, 중래는 둘 중 문숙과 마찬가지로 키가 큰 선희(송선미)에게 관심을 갖는다. 자신을 배신한 남편을 피해 여자친구와 신두리에 놀러온 선희는 여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중래와 어울린다.

영화에는 두명의 중래가 있다

짐작건대 중래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는 3번의 우연과 마주친 어떤 사람이 그 우연을 필연으로 생각하면서 그 인과법칙을 밝혀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연성을 필연으로 엮어내는 서사가 영화감독 중래의 강박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문숙과 선희가 닮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진술은 둘을 함께 목격한 식당 주인 그리고 선희에 의해 반복된다. 그러나 이 반복에 대한 의미화로 가는 대신 영화의 서사적 추동성은 문숙이 이것을 잘라내는 중단, 정지로 간다. 즉, 그녀는 중래에게 놀리듯 말한다. 나는 반복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해변의 여인>의 재미는 바로 이런 데 있다. 위와 같은 우연적 반복, 유사성의 원칙을 밝혀내려는 강박이 어떤 상징이나 해명으로 나타나는 대신 서사나 대사는 가볍게 그것을 넘어버리거나 끊어낸다. 이러한 탈구나 해체가 득세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중래는 자신에 대한 자의식없이 액면 그대로 자신의 강박(이미지와의 싸움)이나 고집(횟집에서의 싸움) 그리고 우유부단을 드러내는 반면, 문숙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번 꺾어 액자 속에 넣어 들려준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문숙이 화자와 행위자로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메타적인 태도로 이러한 문숙과 중래들을 배열해, 이들을 중래의 영화 속 이벤트로 재배열하는 방향으로 가 끝난다. 중래는 영화의 마지막에 시나리오의 중요한 골격을 잡아 몇장의 종이에 끼적여 신두리를 떠난다. 감독이 떠난 신두리에서 해변의 여인 문숙은 해변을 차로 달리다가 모래 사구에 빠지고, 두 남자의 도움을 받아 그 사구를 빠져나온다. 이제까지 중래와의 관계 속에 배치되어 있던 문숙은, 여기서 중래없이 에필로그를 만들어낸다. 물론 영화에서 자체 구축된 읽기 방식은 이 장면에 과잉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막아낸다. 중래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종용하는 사람이다. 먼저 그는 문숙에게 무엇이 가장 무서운가 하는 질문을 던져, 아버지라는 대답을 받아내고 선희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 어머니라는 대답을 듣는다. 문숙과 선희는 중래의 질의에 고백 형식으로 대답해야 하는 반면, 중래는 문숙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이미지와의 싸움’을 털어놓는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영화에는 두명의 중래가 있다. 자신의 친구의 여자친구에게 욕망을 두고 안달하는 중래와 예의 영화의 메타적 태도를 담보하는 중래가 있다. 이러저러한 경로를 거쳐 중래는 위 두명의 중래를 만족시킨다. 해변의 두명의 여인, 문숙과 선희는 영화가 메타적으로 구성해놓은 중래의 시나리오 내용을 모른 채 남겨진다.

이미지와 싸우는 환상의 돌림병

‘이미지와의 싸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중래가 주저리주저리 도형까지 그리며 설명하는 사악한 이미지와의 싸움은 사실 슬라보예 지젝의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책의 첫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자와 섹스를 했다고 하자, 뭐 괜찮아 하고 넘겼다가 이후 섹스 체위 등 온갖 것에 대한 환상으로 시달리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환상의 돌림병>의 서두다. 중래가 털어놓는 아내와 자신의 친구와의 관계 묘사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남긴 영향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 환상의 돌림병을 구성하는 이미지다.

중래는 제법 심각하게 이런 이미지와의 싸움을 털어놓고, 또 도형까지 그려 이미지의 구성을 그래픽하게 설명한다. 이와 엇비슷하게 그러나 문숙의 시각에서 제기되는 것은 자신이 방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중래와 선희가 어떻게 방을 나갔을까? 자신을 넘어 나갔을까? 하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에 중래는 위의 이미지와의 싸움이라는 강박으로 대응한다. 중래가 자신의 트라우마처럼 제시하는 위의 환상의 돌림병은 그러나 문숙에 의해 결국은 의미 폄하를 당한다. 이 영화의 전반적 의미 훼손의 태도다. 이처럼 의미를 구성했다가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 외에 영화가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은 일단 사용했다가도 슬그머니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영화적 기호 중 일단 한번 사용되기만 하면 그것이 결정적 의미화를 가져오게 되는 예 중 하나가 그 유명한 기침이다. 특히 여주인공의 기침은 불치병은 물론 거짓말, 불륜 등의 재앙을 예고한다. 문숙은 황사가 오고 있는 봄날, 기침을 하면서 등장하는데, 영화의 서두에서 문숙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중래와 창욱도 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문숙은 그 무관심, 그 무언급 중에서도 몇번 더 기침을 하고 , ‘이틀 뒤’ 나타났을 때 기침은 멈추어져 있다.

또, 중래는 ‘이틀 뒤’ 해변에서 나무가 늘어선 사구에 가 나무에 절을 하면서 콧물이 나올 만큼 엉엉 우는데, 이런 의외의 의례를 뒷받침할 만한 설명은 거기 가면 그렇게 절을 하게 된다는 것 외에는 별로 제공되지 않는다. 위의 기침이 통상적 기호라고 한다면 나무에 절하는 행위는 제의적 기호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 둘 모두 은유나 환유로 가는 대신 표면 위에 정지한다. 이미지와의 싸움도 트라우마로 규정되는 대신 조롱거리가 된다. 이러한 태도가 <해변의 여인>을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한국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의 새로운 경지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나 <극장전>보다 이 재미는 훨씬 더 명료해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신랄한 조소마저 조롱하는 되돌이과정은 영화감독의 환상의 돌림병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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