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소년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리턴>
2006-09-13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풍부한 성서적 모티브와 정신분석학적 틀을 차용한 남성 주체의 통과제의, <리턴>

중세 기사 이야기에서 신참내기 기사는 언제나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되고, 던전에 갇혀 예기치 않은 결투를 벌인다. 그러나 사실 그 길은, 또 그 용은 기사가 잘못 만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가야만 하고, 만나야만 하는 대상들이다. 그는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길 찾는 법을 배우고, 궁극적으로 이겨야 하는 큰 적을 상대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참내기 기사는 잘못된 길을 통해서만 올바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이 로망스 문학의 룰이고, 성장소설의 틀이며 인생의 법칙이다.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의 <리턴>은 12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난 소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언제나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떠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떠남’을 통해 어떻게 돌아오는지이다. 이 영화에는 두번의 ‘돌아옴’(return)이 있다. 한번은 가족을 떠났던 아버지의 ‘돌아옴’이고, 다른 한번은 그 아버지와 함께 떠났던 아들들의 ‘돌아옴’이다. 첫 번째 돌아옴은 떠남을 야기하고, 두 번째 돌아옴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이끌려 여행을 떠나 진창에 빠지고, 바다를 건너고, 폭우를 만난다. 그들은 신참내기 기사처럼 먼 길을 빙빙 돌아 처음 그 자리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온 그 자리에 아버지는 없고, 형제는 더이상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왜 돌아왔을까?

아버지가 돌아왔다. 12년이란 긴 세월 동안 부재했던 아버지의 자리가 단 한나절 만에 가득 채워진다. 어머니의 침대를 가득 채운 거대한 아버지. 큰아들 안드레이는 ‘아버지가 참 크다’라고 느끼며 미소 짓고, 의심 많은 둘째 이반은 아버지가 진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락방의 상자를 뒤져 사진을 찾아낸다. 흑백 사진 속의 젊은 아버지의 까만 머리는 이제 희끗희끗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건장하고 힘이 넘친다. 아버지는 마치 매일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고기와 술을 나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존재가 낯설지만 설렌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도, 자신의 갑작스런 귀환에 대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이반이 아버지의 사진을 찾아낸 곳은 오래된 그림책 사이인데, 우리는 책 속의 그림들을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림들은 신과 천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니까 이반과 안드레이는 성화(聖畵)들 틈 속에 꽂혀 있던 아버지를 찾아낸 것이다. 어머니가 말해준 아버지의 직업은 비행기 조종사이다. 이반은 그가 제복도, 모자도 쓰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그 사실을 의심하지만 안드레이는 그가 휴가 중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버지는 하늘과 관련된 어떤 것, 신적인 것에 연관된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강요하면서, 아들들의 기억 속에서는 잊혀졌지만 그들의 믿음 속에 자신의 존재가 재건되기를 희망한다.

아버지가 나타난 시점 또한 매우 시의적절하다. 안드레이와 이반은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날, 용기를 시험당한다. 형제와 그 친구들은 마치 바다처럼 펼쳐진 호수 위에 높이 솟은 망루 위에서 뛰어내려 자신이 겁쟁이가 아님을 증명해야만 했다. 안드레이는 자신을 따라 뛰어내리라는 말을 남긴 채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하지만 이반은 뛰어내리지도, 사다리로 걸어내려오지도 못하고 망루에 남겨진다. 추위 속에 버려진 그를 육지로 내려오게 한 것은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아들인 이반은 울면서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겁쟁이가 될 자신의 처지를 두려워한다. 이반은 입수(入水) 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영영 또래집단으로 올바르게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그가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춰줄 수는 있지만, 그가 물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어른이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반을 물속으로 데려갈 수 있고, 안드레이가 친구들의 조롱을 이겨내고 동생을 버리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강력한 존재가 필요할 때 아버지가 귀환한다.

이 영화는 아버지의 과거 혹은 현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가족으로 귀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왜 돌아왔느냐?”는 이반의 끈질긴 질문에 마지못해 “어머니가 원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상자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처음에 아버지는 마치 상자 때문에 두 아들과 여행을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아버지의 미스터리한 상자를 아버지와 함께 수장(水葬)시키는데, 그것은 그 속에 아무런 의미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상자의 역할은 신참내기 기사의 잘못된 지도처럼 형제를 외딴섬으로 인도하여 아버지와 함께 사라지는 데 있다. 상자는 여행의 거짓된 목적이며, 형제가 영원히 획득할 수 없었던 아버지이다.

아버지를 향한 두 아들의 인정투쟁

<리턴>의 내러티브 타임은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딱 일주일이다. 감독은 관객에게 그것을 충분히 인지시키기 위해 자막을 통해 요일을 고지한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신이 세계를 창조했던 시간과 일치한다. 아버지의 사진을 찾아냈던 그림책처럼 영화는 기독교적인 아이콘들이 가득하다. 형제의 아버지는 구약성서 속의 하나님과 닮았다.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과 달리 구약 속의 하나님은 계율과 복종을 강조한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강력한 지배는 시계와 칼로 표상된다. 형제는 아버지가 지시한 시간 안에 돌아와야 하고, 그것을 어기면 아버지는 강력한 폭력으로 응징한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장자에게 모든 재산과 축복을 물려주었던 것처럼 아버지는 안드레이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고 모든 칭찬과 벌은 그의 몫이 된다. 아버지가 식당에서 계산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도, 진창에 빠진 차를 꺼내는 법을 가르쳐준 것도 모두 안드레이다. 아버지의 거대한 손은 언제나 안드레이에게 향한다. 안드레이는 그의 손에 얻어맞고 코피를 흘리기도 하지만 지갑이나 자동차 핸들을 건네받기도 하므로 언제나 충만한 믿음의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이반이 아버지를 불신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버지가 한번도 ‘잘했다, 안드레이’ 대신 ‘잘했다, 이반’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형제의 긍정과 부정은 똑같은 대상을 향한 인정투쟁에서 비롯된 다른 반응일 뿐이다.

안드레이와 이반은 아버지가 데려간 섬에서 그전에 그들이 올랐던 것과 비슷한 망루를 또 만난다.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면서 아들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만 망루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안드레이뿐이다. 안드레이는 거기서 자신이 밟고 있는 대지를 신과 좀더 가까운 위치에서 바라본다. 아버지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한번도 섬의 전경을 바라본 적이 없는 이반만이 ‘여기 정말 섬 맞아?’와 같은 의문을 품는다. 여행이 계속될수록 아버지를 더 믿고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안드레이와 달리 이반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명령에 불복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애쓴다. 오이디푸스 단계에 진입하는 아들이 아버지를 선망하면서 넘어서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두 아들의 상반된 태도를 통해 발현되는 셈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싶지만 성장하기 위해선 그를 죽여야만 한다. 아이들과 호수로 뛰어들어 자신의 용기를 증명했던 아들은 아버지를 인정하지만, 망루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기다렸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한다.

형제는 어떻게 돌아왔는가?

아버지의 칼을 훔친 이반은 아버지가 정한 시간 내에 돌아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분노를 도발한다. 이반은 ‘그렇게 심하게만 하지 않았으면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이라며 그에게 칼을 겨눈다. 하지만 스스로 아버지에게 칼을 꽂기에 그는 너무 어리고 약하다. 이반은 울면서 달려가고, 아버지가 그를 쫓는다. 그리고 안드레이는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며 그 뒤를 따른다. 이반에게 높은 망루는 공포스럽지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두려움을 이기게 한다. 이반이 망루에서 밑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아버지는 망루에서 떨어져 죽는다.

아버지가 죽는 그 순간부터 안드레이는 아버지를 대신한다. 그는 당황한 이반에게 침착하게 지시를 내린다. 어느새 그는 아버지의 화법을 그대로 반복한다. 종업원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나무를 어떻게 잘라야 할지 몰랐던 안드레이에게 아버지는 ‘입으로’, ‘손으로’라는 너무나 간결한 답을 줬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옮겨야 하냐는 이반의 질문에 ‘손으로’라고 대답한다. 그는 아버지가 진창에 빠진 타이어 밑에 나뭇가지를 깔았던 것처럼, 흙바닥에 널브러진 시신 밑에 나뭇가지를 깐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섬으로 들어올 때 가르쳐준 지식을 섬 밖으로 나가는 데 사용한다. 이제 섬은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공간으로 의미 변화한다. 아버지와 두 아들은 돌아올 때와 똑같은 구도로 배 위에 있지만, 살아서 명령을 내리던 아버지는 시신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장난기 가득했던 아들들의 표정은 한없이 엄숙해졌다.

여행이 끝나고 난 뒤 그들은 다시 한번 가족사진을 발견한다. 하지만 사진 속의 아버지는 사라지고 까만 암흑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하지만 아들들은 더이상 아버지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장대 같은 비와 거친 파도에 익숙한 존재로 만들어 물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게 한 뒤 물속으로 사라졌다. 12년 전 홀연히 사라져 아들들의 기억 속에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던’ 아버지가 이제 두 아들의 손에 의해 제대로 된 장례의식을 치른 것이다. 이제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아들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온전히 상징계에 통합될 것이다. <리턴>은 아버지의 귀환이 어떻게 아들들의 귀환으로 치환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남성적 주체가 어떻게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제의를 치러내는지를 그린다. 풍부한 성서적 모티브를 담고 정신분석학적 틀을 차용하면서도 주인공들을 신화나 이론의 박제로 전락시키지 않는 감독의 탁월한 솜씨가 빛난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