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가이드]
회색빛 도시를 벗어난 갱스터영화, <키 라르고>
2006-09-07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EBS 9월10일(일) 오후 2시20분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이 세상에 나온 1941년, 존 휴스턴의 필름누아르 <말타의 매>가 개봉했다. 휴스턴의 데뷔작인 <말타의 매>는 험프리 보가트를 내세워 ‘남자들의 서사’를 장르 속에 안착시켰다. 이 영화로 휴스턴은 오슨 웰스만큼의 천재성을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할리우드의 흥행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대체로 최고의 배우들과 스탭, 그리고 이미 검증받은 원작을 선택하여 흥행과 영화적 완성도 사이에서 영리하게 균형을 잡았다. <키 라르고>는 또다시 험프리 보가트가 주인공으로 분한 갱스터영화로, 라울 월시의 <화이트 히트>와 함께 할리우드 갱스터 고전의 최후이자 새로운 개막을 알리는 작품이다. <키 라르고>에는 초기 갱스터 장르의 특성과 미국사회의 흐름에 따른 갱스터물의 변화된 면모가 공존한다. 그래서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 키즈 섬의 최대 산호섬인 ‘키 라르고’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지 않다. 중심은 그곳의 호텔을 장악한 갱들에게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전쟁과 인간에 대한 고민이나 원주민 인디언과 백인간의 관계에 대한 통찰 등이 담겨 있다. 휴스턴은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허리케인으로 고립된 호텔 내로 불러들여 자연스럽게 흡수시키고 치밀하게 구성해낸다. 무엇보다 영화가 태풍이라는 자연재해를 호텔의 외부에 배치하고 호텔 내부에는 갱들로 인한 불안감을 고조시킴으로써 긴장을 유지하는 방식은 효과적이다. 대부분의 갱스터 장르의 배경은 몰락하는 도시적 공간이지만, 이 영화 속에서 회색빛 도시는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섬, 바다와 같은 자연적 공간과 섬 속의 호텔이라는 또 다른 폐쇄적 공간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밀도를 유지한다.

험프리 보가트나 로렌 바콜의 카리스마도 훌륭하지만, 추방되었다 돌아온 전설적인 갱 두목 조니 로코(에드워드 G. 로빈슨)의 장악력도 만만치 않다. 그는 여전히 잔인하고 교활한 갱이지만, 이상하게도 고전기 갱스터영화 속의 갱들 같은 아우라나 권력을 뿜어내지 못한다. 휘몰아치는 비바람 속에 불안에 떨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자신의 내리막길을 응시하기 시작한 갱스터 장르의 슬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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