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얇아서일까, 심사가 꼬여서일까. 남들이 ‘별로’라고 한 영화를 보면 ‘괜찮네’ 하면서 극장을 나서고, 남들이 ‘괜찮다’고 한 영화를 보면 ‘별로네’ 하면서 극장을 나서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아마도 귀가 얇아서 ‘만빵’으로 기대했다가 적이 실망하고, 심사가 꼬여서 남들이 별로라고 하면 만족도가 자극되나보다. 최근엔 <다세포 소녀>는 ‘별로’라는 말을 듣고, <천하장사 마돈나>는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봤다.
역시나 입소문은 정확했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시사회(언론시사가 아니라 일반시사였다)에는 시종일관 웃음꽃이 피어났고, <다세포 소녀>의 극장은 한여름인데도 한기가 돌았다. 심지어 영화를 보다가 거금 7천원짜리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관객도 있었다. 나도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면서 웃었던 횟수가 <다세포 소녀>를 보면서 웃었던 순간보다 많았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극장을 나서면서는 <다세포 소녀>가 왠지 기특하게 여겨지고, <천하장사 마돈나>에는 약간의 불만을 느꼈다.
다시 문제는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연애다. <다세포 소녀>는 어쨌든 관객을 시험에 들게 만든다. 인상도 험악한 조폭(이원종)에게 여고생 교복을 끈질기게 입히고, 멀쩡한 여고생(아니 예쁜 여학생)을 ‘물건’ 달린 트랜스젠더(성전환자)라고 우긴다. 더구나 그녀의 물건이 발기되는 순간을 산뜻하지도 웃기지도 않게 드러낸다. 하필이면 초절정 꽃미남 안소니가 그 트랜스젠더에게 끌린다고 설정한다. 외눈박이에게 보내는 축구부 주장의 눈길은 ‘뜬금없이’ 느끼하다. 이렇게 <다세포 소녀>는 “왜 그들이 그리 되었는지”를 구슬프게 설명하지 않고, “얘들은 원래 이래”라고 툭툭 뱉어버린다. 이렇게 <다세포 소녀>는 사람들이 “동성연애”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불편한 이미지를 재현한다(고 느꼈다). 여전히 문제는 ‘호모 포비아’(Homo Phobia)라기보다는 ‘호모섹스 포비아’(Homosex Phobia)다. <다세포 소녀>는 “동성애를 인정해야죠”라고 말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반 관객이 가슴속에 묻어둔 불편함을 건드린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잘 다듬어진 트랜스젠더 성장영화다. 드라마는 재미있고, 코미디는 적절해서 ‘웃음 반, 감동 반’이라는 황금비율도 맞춘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통념을 무심코 반복하지도 않는다.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녀’의 여성성을 과장하지 않고,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 Transgender) 여성들의 인생을 성전환 문제에만 가두지도 않는다. 대사도 깊이가 있어서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살고 싶은 것”는 새겨들을 만한 말도 남긴다. 줄거리도 정면승부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성장을 아버지와 대결이라는 정공법으로 다룬다. “있어야 할 것은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답니다”라는 <화개장터>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객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쌍수들어 환영할 만한 영화다.
그런데 영화관을 나서면서, 이건 너무 쉽게 찬성하는 것 아냐, 심보가 고약해졌다. 성소수자(혹은 동성애)를 ‘인정’하거나 심지어 ‘찬성’하는 비율로 따지면 한국은 더이상 나쁘지 않다. 네티즌의 성소수자에 대한 호의는 과반을 넘기도 한다.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을 생각하면 태도의 변화는 역시나 “다이내믹 코리아!” 그런데 가끔 무쓸모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들의 관용이 동성애뿐 아니라 동성연애에도 적용되는 걸까. 동구의 여성성은 씨름판에 서는 순간 모래에 묻혀버리지 않았나, 동구의 성생활(상상과 자위와 짝사랑)은 너무나 적절한 지점에서 유머와 뒤섞이면서 희석돼버린 것이 아닐까. 매우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트랜스젠더 성장영화를 보면서 품었던 무쓸모 트집이다. 아마도 <천하장사 마돈나>가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보아서 생긴 부작용이 틀림없다. 관객에게 버림받은 <다세포 소녀>가 ‘무쓸모 영화’는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