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파울 페어회벤 감독의 <흑서>. 나치만행에 가담한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독일의 돈으로, 네덜란드와 독일 땅에서, 네덜란드와 독일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과연 <흑서>는 2007년 독일영화상 후보에 오를 수 있을까.
독일영화상의 전제조건은 이른바 “German Origin Certificate”다. 독일돈이 총제작비의 20% 이상 들어갔을 때 이 증명서가 발급된다. 그렇다면 프랑스 최고 흥행작으로 세자르상 13개 부문 후보로 올랐던 <아멜리에>는 사실상 독일영화여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독일영화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영화상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반면 오스카 외국영화상 부문 후보작인 팔레스타인영화 <천국을 향하여>는 독일영화상의 강력한 후보작이다. 왜냐고? 베를린의 라초어(Razor)영화사가 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대부분이 합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유럽에서 내 영화, 네 영화 가리기가 쉬운 일은 아닐 터. 하여 독일영화아카데미가 새로운 “독일영화” 분류기준을 내놓았다. 일단 오리지널 버전이 독일어일 것, 감독이 독일인일 것, 시나리오작가가 독일인일 것, 제작자가 독일인일 것 등 네 가지다. 이 네 조건 중 두개만 만족시키면 독일영화 스탬프를 찍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 최고의 기대작으로 9월14일 독일 개봉에 들어갈 <향수>는 독일영화일까? 제작자는 독일인 베른트 아이힝거, 감독 역시 독일인 톰 티크베어이니 주연배우들이 영미 배우들로 포진을 했건 말건 100% 독일영화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크리스티안 프로쉬와 한스 바인가르트너의 경우는? 두 감독은 독일에서 영화수업을 받았고 오래전부터 베를린에서 살고 있는, 향후 독일 영화계를 이끌어갈 유망주들이다. 이들이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촬영 중인 작품들의 주역도 내로라하는 독일 배우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제작사는 오스트리아에 본사를 두고 있다. 따라서 독일영화가 되기 위한 관건은 제작에 들어간 독일돈 액수와 시나리오작가인데, 프로쉬 감독은 시나리오까지 직접 써버리고 말았으니 일단 독일영화 자격은 박탈이다.
이들이 독일 국적을 가진 감독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결정은 제작지원 돈줄을 쥐고 있는 영화진흥청(FFA)에 달렸고, 그 심사기준의 초안을 마련하는 것은 독일영화아카데미다. 물론 아카데미의 제안은 연방문화장관의 동의를 거쳐야 하지만 이번 기준안이 독일영화 활성화를 위해 준비된 만큼 장관의 결재를 받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는 전망이다. 따라서 독일영화아카데미의 독일영화 분류기준은 롤라 트로피와 함께 주어지는 독일 예술계 최고액인 상금을 특정한 그룹에만 몰아주려는 의도라는 의심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