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찾았다! 신상옥의 <열녀문>
2006-09-13
글 : 조영정 (한국 영화사 연구가)

2년 전 대만 발굴 작업부터 다음달 부산영화제에서 첫 공개 앞두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영화가 제작된 1919년부터 1969년까지 총 2097편의 영화가 발표되었고 그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영화는 646편에 지나지 않는다. 불과 30%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필름보관소로 출범한 한국영상자료원이 남아 있는 영화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 1974년부터이고 보면, 이 30%의 생존율은 어떤 면에서 기적적인 수치인지 모른다. 영화 한편을 만들고 사라진 영화사가 부지기수였고, 생명력이 있는 영화사들조차도 필름 보관실을 지니지 못했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남아 있는 한국영화의 수가 적다고 한탄하기보다는 이 정도라도 남아 있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자료원은 이 수치를 늘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왔고 이제 그 성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일제시기 영화들이 지난 2년간 7편이 수집되었고 여기에 신상옥 감독의 <열녀문>이 더해진 것이다.

발굴-맨땅에 헤딩하기

발굴은 맨땅에 헤딩하는 작업이다. 수없는 공문과 전화, 방문을 통해 이루어내는(많은 경우 빈손으로 끝이 나는) 지난한 작업이다. 국내에서 영화를 찾는 작업도 어렵지만 외국으로 나가게 되면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대답없는 이메일과 거듭되는 전화 통화와 쥐가 날 정도의 발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영상자료원이(당시는 한국필름보관소) 영화 수집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은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에 정회원으로 등록된 1985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FIAF에 가입한다는 것은 우리 기관의 국제적 위상과 공신력을 인정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외국의 자료원과 절차와 합의를 걸쳐 외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회수하는 공식적인 통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역시 쉬운 것은 아니다. 일단 특정 외국 자료원에 과연 우리 영화가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는 늘 조사의 1차 대상이 되어왔다. 중국전영자료관과 대만영상자료원 그리고 홍콩전영자료원과의 교류는 그래서 필수적이었다. 자료원은 지난 3년간의 노력 끝에 중국에서 7편의 일제시기 영화를 발굴하고, 대만에서 <열녀문>을 입수하였다. 그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우리 자료원이 <열녀문>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2004년 11월 FIAF 소속 필름 아카이브간 교류 및 한국영화 발굴을 위한 조사를 위해 대만영상자료원을 방문했을 때였다. 이에 약 6개월간의 조사와 협의과정을 거쳐, 2005년 4월 대만영상자료원에 필름에 대한 수집을 정식으로 요청하였고, 같은해 6월 16mm필름을 기증받을 것을 합의하였다. 그리고 11월 양국 영상자료원간의 상호 합의각서가 교환되고, 12월 드디어 필름을 기증받기에 이른 것이다.

복원-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한다

수집된 <열녀문>은 16mm필름 세벌이었다. 대만 자료원과의 협의사항은 영화를 HD로 전환하여 기증한다는 조건이었고, 이를 준수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오랜 세월로 인해 손상된 필름을 수선하는 일이 시작된다. 때묻은 프레임 하나하나를 닦아내고, 손상된 필름의 퍼포레이션 하나하나를 복구하는 일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데,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단순한 반복 작업인 것처럼 보이지만(사실 실제로도 그렇지만), 단 한번의 실수가 유일한 원천자료를 영구히 소멸시킬 수 있기에 작업의 중압감은 이루 설명하기 어렵다. 이 과정이 끝나면 복구된 필름을 텔레시네를 통해 자료를 변환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HD 변환작업이 끝나고, 드디어 시사의 순간. 이 감격적인 순간에 부산영화제 관계자도 자리를 함께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열녀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청상과부와 파란을 일으킬 성칠이 화면에 등장한다. 아름다운 자태의 과부 최은희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여자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시할머니 한은진의 따끔한 가르침을 받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얼마 뒤, 갑자기 잡음이 심해지고, 대사가 들리지 않는다. 뭔가 말을 하지만 통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대사가 잡음 속에 묻혀버린다. 문제다.

영화의 30분가량이 심한 잡음으로 손상되어 있는 것이다. 상영을 위해 사운드를 복원해야 한다는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제안에 따라 영화제는 복원 업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몇 군데 접촉을 해보았지만 반응이 좋지 않았다. 돈은 둘째치고라도 이런 복원이 익숙지 않은 작업인데다가 보통의 노력과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곤란한 상황에서 고민 중에 우연히, 정말 우연히 HFR이 이런 복원 작업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장비 후원을 해준 업체였다는 이야기에 다짜고짜 연락을 취했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HFR의 옥임식 실장은 적극적으로 호의적으로 답변을 주었다. 이제 둘째 문제였던 돈이 우선 문제가 되었다. “후원해주십시오”와 “그러죠”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간단히 문제가 해결되었다.

신상옥 감독

본격적인 복원작업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복원실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HFR의 욕구와 소리가 제대로 들렸으면 하는 영화제의 기대가 만난 것이었지만 HFR의 욕구는 우리의 기대 이상이었다. 사운드뿐만 아니라 이미지까지 개선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해온 것이다. 사실 이 회사의 주업무는 이미지 복원이다. 사운드를 복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일차 사운드 복원은 다른 두벌의 프린트에서 음질이 좋은 사운드트랙을 옮겨오는 것이었다(사실 이것이 우리가 바랐던 정도였다). 그러나 60년대 영화들이 그렇듯, <열녀문> 역시 일정한 잡음과 대사에 쇳소리가 묻어나왔고, HFR은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영화 전체 사운드의 잡음 청소에 들어갔다.

HFR은 원래 D.I.(Digital Intermediate: 오리지널 네거를 디지털로 변환하여 이미지를 변형 개선시키는 기술) 작업을 주업무로 하는 회사이다. <달콤한 인생> <친절한 금자씨> <형사>와 <웰컴 투 동막골> 등 스타일 넘치는 영화들의 작업을 도맡아 해왔다. 이 회사가 복원에 뛰어든 것은 복원이 “미래사업”이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복원기술은 현재 영화에도 사용된다. 촬영 중 혹은 현상 중에 손상된 이미지를 복원하거나 녹음 중에 발생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복원기술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은 믿음은 영화를 새로 만드는 것만큼 만들어진 영화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경영적 사고와 부딪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다는 실험적 도전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이들의 믿음이 우리 영화를 지키는 첫발이 복원에 있음을 깨닫는 사회적 인식과 맞물리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랄 뿐이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에도 <열녀문>은 HFR의 신충섭씨와 이용기씨의 마우스의 쉴새없는 클릭과 단축키를 누비는 화려한 손놀림하에 서서히 아름다운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열녀문>는 신상옥 작품성을 국내외에 재확인시킨 작품

<열녀문>(1962)은 <연산군>에 이어 신상옥에게 두 번째 대종상 작품상을 안겨준 작품이었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 이어 아시아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작품이었다. 상업적인 성공과 영화적 완성도에서 신상옥의 위상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과부>를 원작으로 한 <열녀문>은 1960년 조긍하 감독이 <과부>(1960)라는 제목으로 이미 영화화했었다. <열녀문>에서 머슴 성칠을 맡은 신영균은 <과부>에서 같은 역으로 데뷔하였다. <열녀문>에서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한은진이다. 그녀는 열녀문을 하사받은 근엄한 시할머니에서 바싹 말라 독기만 남은 노인네로 변해하는 모습을 열연하며 연기력의 절정을 보여준다. 여기에 신상옥 감독의 “사각 앵글의 미학”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며 뒤틀린 시대에 갇힌 인물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열녀문>은 “과거는 현재를 밝혀내는 단초”(사극을 만드는 이유)이며, “굴곡에 찬 여성의 삶이야말로 영화적인 것”(여성이 늘 주인공인 이유)이라는 그의 주장이 만나며 그의 영화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거기에 인간의 욕망에 대해 누구보다 적극적인 탐험에 나섰던 그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갔고, 우리는 남아서 그의 빈자리를 당당하게 지키는 그의 영화를 만난다. 이제 영화 <열녀문>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 과거 한국 영화사의 한 조각을 맞추는 것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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