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해변의 여인>의 김승우
2006-09-13
글 : 김수경
사진 : 오계옥
“두 작품이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전환점이다”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해변의 여인>의 남자주인공은 김승우다. 연방 휴대폰을 꺼내 자랑하는 10개월 된 딸 라희의 아버지가 된 때문일까. 두편에서 나타나는 김승우의 연기는 전과 달리 일상의 냄새가 짙게 묻어 있다. 거기에는 <호텔리어>로 얻은 한류 스타의 화려함도 <라이터를 켜라>의 ‘어리버리’ 봉구의 어눌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기원을 찾으면 <궁>으로 부활한 황인뢰 PD의 역작 <연애의 기초>에서 낮은 목소리로 얼굴을 내밀던 한수의 자연스러움에 가깝다. 물론 11년 전 숫기없던 한수와 달리 <연애…>의 영운과 <해변의 여인>의 중래는 비루한 일상을 이기적으로 견뎌내는 속물이다.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17년차 배우 김승우의 사람 좋은 미소는 여전했지만, 작품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연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눈빛에는 어떤 결심이 반짝거렸다.

-주연한 <연애…>와 <해변의 여인>이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한다. 17년간 연기하는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일 것 같다.
=17년뿐만 아니라 유사 이래 처음 아닌가? (웃음) 어떻게 이렇게 돼. 그래도 그나마 하나 개봉돼서 좀 홀가분하다. 사실 개봉일자를 듣고는 기분이 별로였다. 두 작품을 촬영하며 뒤늦게 정말 큰 복을 받았다고 느꼈고 영화에 대한 좋은 평가도 내심 기대했다. 그 평가를 한번에 받아야 하는 과정이 부담스럽다. 주변 친구들도 이틀 간격으로 두 영화의 시사회를 가니까 “김승우의 모든 것이냐?”라고 농담을 하더라. 가까운 개봉일정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두 작품이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전환점이다.

-중래는 기존 홍상수 영화의 캐릭터와는 다르다는 반응이 많다. 게다가 영화감독이라는 자기 반영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 홍 감독님 영화 캐릭터들이 말 그대로 연출자의 페르소나였다면, 중래는 자기 반영성과 페르소나가 겹쳐져 나타나는 면이 있다. 사실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직업인 배우들은 상대적으로 안과 밖이 다르게 보여야 할 때 계산이 좀더 잘 선다. 그런 면이 캐릭터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됐다. 감독님은 중래가 멋있게 양복 입고 돌아다니다가 혼자 생활할 때 치졸함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문숙(고현정)이 있을 때는 개똥철학을 펼치며 잘난 척하다가, 그가 사라지면 답답해서 처울고 이런 거지. (웃음)

-현장 상황은 녹록지 않았을 것 같다.
=과거 주인공들이 감독님의 틀 안에서 정교하게 움직였다면, 이번에는 그 틀 자체가 넓어진 느낌이다. 배우들을 편히 놀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좁은 틀 안에서 하는 연기는 정말 못한다. 감독님이 그런 특성을 많이 배려해주고 감안해주셨다. 감독님이 ‘예전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라고 말씀해준 부분이 도움이 많이 됐다. 난 엄격하게 명령만 할 줄 알았는데 거의 “너 이거 할 수 있겠니?”라고 묻더라. 못하겠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시킬게”라고 하셨다. 이를테면 세 가지 이야기를 과거에는 1, 2, 3으로 하라고 지시했다면 내게는 2, 1, 3이건 2, 3, 1이건 원하는 방식으로 하라고 여유를 주셨다. 이야기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면. 대사의 어미나 토씨도 과거에는 엄격했다던데 별로 제재를 받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런 데 약한 걸 파악하고 배려하신 것 같다. 배우의 능력을 암기력과 이해력으로 구분하면 나는 암기력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아침에 받아드는 물리적인 대사량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학교다닐 때 암기과목도 엄청 안 좋아했으니까. (웃음) 다행인 건 감독님 말로는 리듬을 잘 탄다더라. 이해력은 나쁘지 않은 편인가보다.

-중래가 문숙에게 이미지론을 설명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은 즐겁지만 촬영할 때는 무척 고생했을 것 같다.
=그날 대본 받자마자 나를 비롯해서 배우들 모두 이건 오늘 안으로는 촬영을 못 끝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베개를 끌어안고 감독님이 설명을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 사실 그게 귀에 들어가기 쉬운 대사가 아니잖아. (웃음) 중래가 자기 영화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다. 촬영하기 전에 그걸 바로 주고 하라고 그러는데 완전 미치는 거지. 그래서 내가 오죽하면 “차라리 성경책을 다 외우라고 하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암기력을 이해력으로 커버할 수 있도록 감독님이 조율해서 지금의 결과가 나왔다. 처음에는 대사 때문에 좀 불안했는데 갈수록 우리끼리 보면서도 웃겨서 즐거웠다.

-<해변의 여인>은 연기만 잘하면 되지만, <연애…>는 여러모로 깊숙이 연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해곤 감독은 미안해서 시나리오도 안 주려고 했다던데.
=김해곤이라는 든든한 영화적 버팀목이 있으니까 그저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연애…>에 대한 평가가 갈리지만 독특한 감독이 한명 등장한 것은 사실 아닌가? 솔직히 말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이 영화가 완성된 것 자체가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연애…> 시나리오를 읽고 김해곤 감독에게 뭐라고 말했나.
=처음 시나리오 읽고나서 “형, 이런 새끼가 세상에 어딨어?” 그랬다. 해곤이 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짜 있어, 만나게 해줄까?”라고 답하더라. 지금도 그 실존 인물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처음에는 이야기 자체에 놀랐다.

-<연애…>는 영운이 연화(장진영)를 택하는 사랑을 원하지만 그게 불가능하고 거래에 가까운 결혼에 들어서야 하는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영운이 너무 불쌍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징그러운 놈이 맞다. 두 여자와 엄마까지 기만하고 농락하는 비열한 남자니까. 하지만 영운이 편을 굳이 들자면, 엄마 등쌀에 못 견디는 안타깝고 한심한 놈이지만 나름의 진심은 있다. 촬영 막바지에는 모니터로만 봐도 연화가 안쓰럽고 불쌍하더라. 여성관객은 싫어할지도 모르는 오럴섹스 장면에서 연화의 캐릭터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대로 쓰러질 만큼 피곤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놈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사람. 하지만 그런 그녀도 결혼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부담스럽고 힘들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진정한 양다리는 결혼이 개입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연애로만 끝났으면 그렇게 참혹하지는 않았겠지. <연애…>의 연애담이 <해변의 여인>처럼 끝났으면 관객이 덜 불편했을 수도 있지만 두 영화의 이야기와 인물은 각각의 미덕이 있다.

-<연애…>는 개런티를 기다려 받으면서 찍은 영화다. 현장진행비, 세트비도 사재를 털어 돕기도 했는데 제일 힘들던 상황은 언제였나.
=내가 연기하는 영화니까 그랬다. 비슷한 상황이면 내 성격상 또 그럴 수도 있다. 게다가 <연애…>는 해곤이 형 영화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연초에 다들 머리를 맞대고 거의 엎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적도 있었다. 더이상은 한계라고 생각했다. 작은 고비는 무수히 많았고, 그게 제일 큰 고비였다. 대부분 최선을 다해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그 말이 쉽게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연애…>는 어떻게 생각해도 최선을 다한 영화다.

-촬영순서로 따지면 <연애…> <멋진 밤, 내게 주세요> <해변의 여인>이었다. <멋진 밤…>의 촬영현장은 어떠했나.
=아오모리에서만 6주 동안 촬영했다. 나카하라 &#49804; 감독은 천재감독으로 통하는 분이다. 생활에서는 그렇게 조용하고 인텔리전트한 사람이 현장에서 느껴지는 기품은 대단하다. 밥먹는 장면을 찍으면 집기를 만질 때도 장갑 끼고 이렇게 만진다. 경건하다고 할까. 그런 촬영장에서 같이 일해서 행복했다. 무엇보다 제작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전혀 로스가 없다. 만약 내일 비가 올 것 같으면 촬영스케줄이 두개가 나온다. 비가 올 때와 안 올 때. 갓난아이가 나오는 장면에도 아이가 세명 준비된다. 얼굴은 상관없으니까 그중에서 안 우는 애만 데리고 촬영한다. 한국처럼 애 달래며 시간이 늘어지는 상황이 없다. 재밌는 건 나카하라 감독님은 오히려 한국 현장의 풍요로움이나 열정을 부러워하더라. 조금만 더 찍으면 정말 좋은 게 나올 수 있는데 일본은 워낙 엄격하게 스케줄을 관리하니까 그런 식으로 욕심을 낼 만한 기회가 별로 없다. 빈틈없이 타임테이블대로 움직이는 스탭들을 보고 자주 놀랐다.

-<해변의 여인> 출연 제안을 <멋진 밤…> 촬영 중에 받은 것으로 안다.
=<해변의 여인>이 정상적으로 움직였으면 나는 출연할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2주 동안 무조건 쉬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감독님이 그걸 수용해주셨다. 홍 감독님은 다른 작품 때문에 3~4년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그 프로젝트는 영화화되지 않았다. 해곤이 형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이 사람에게는 나를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웬만한 현장에서는 최고참이 되면서 아프거나 불편해도 티를 내기 어렵다. 그런데 홍 감독님은 어른이잖아. 그래서 촬영하면서 불편하면 “나 안 해, 안 해” 이러면서 어리광도 피우고 그랬다. 내가 상수 형에게 툭하면 “세계적인 명감독이잖아. 김승우 출세했어, 이런 명감독님이랑 술도 먹고”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고 이놈아, 알았다”라며 받아준다. 촬영 중반부터 형이라고 불렀는데 정말 큰형 같다.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기준이 궁금하다. 이제까지 작품들을 택할 때 가장 중시했던 점은 무엇인가.
=옛날에는 좀 무모했다. 영화를 산이라고 치면, 산을 보고 택해야 하는데 나무나 숲만 본 경우가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100신 중에 한두신에 꽂혀서 작품을 택하기도 했다. 바보처럼. ‘그래 니들이 다 안 된다고 그러는데 한번 해보자’라고 오기를 부린 적도 있다. 멍청하게.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내가 갑자기 혜안이 생긴 건 아니고 요즘은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잘 듣는다. (웃음) 일본에서 <해변의 여인>을 제안받고도 해곤이 형이랑 (장)동건이한테 전화를 했다. 해곤이 형은 “몸이 좀 힘들더라도 홍 감독님 영화니까 배우는 입장에서 네가 꼭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물론 요즘은 “개봉일정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괜히 하라고 했어”라고 농담한다. (웃음) 동건이는 “형이 홍 감독님이랑 작업하는 건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고 했고 와이프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때 그렇게 세 사람에게 전화해서 상의했다. <연애…> 시나리오도 와이프는 무척 좋아했다. “오빠가 하면 배우로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에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제는 사후에는 묘비명에 필모그래피가 새겨질 텐데 그걸 관리할 필요가 있다. 좀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작품을 골라야 할 것 같다. 예전보다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게 선택받아야 일을 하는 배우의 타고난 운명이다. 연기 잘하고 젊고 잘생긴 친구들도 많아졌고 배우층도 자연스레 두터워졌다. 연기인생에서 몇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는데 지금은 내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는 게 최선인 것 같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알고 있는 모든 상식과 감정을 연기로 나오게 만드는 일이다. 억지로 메이크업해서 멋있게 보이려 하거나, 억지로 뽀글뽀글 파마해서 웃길 필요도 없다. 지금은 내 삶의 모습에 집중해서 연기를 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장군의 아들> 오디션이 배우로 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에 영화감독이라고 쓸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 대학 3학년 때 <장군의 아들> 공모가 났다. 당시에는 가짜 공모로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유령 영화사가 많았다. 그런데 <장군의 아들>은 태흥영화사, 임권택 감독, 홍성유 원작이니까 보증수표였고, 붙기만 하면 좋아하는 영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작정 찾아갔다. 운이 좋았던 건 그게 액션영화였고 내가 체육과를 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몸무게가 93kg 정도였다. 연기를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냥 막 졸랐다. 3차시험 보고 나오는데 이태원 사장님이 “너 아무 역할이나 시켜도 할 수 있겠어, 꼭 김두한만 해야 하는 거 아니지?” 하시기에 붙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처음에 “저 김두한이랑 닮지 않았어요? 저 시켜주세요”, 막 이랬거든. (웃음) 막내아들보다 어린 놈이 그러니까 어른들이 귀엽게 봐주신 것 같다. 선발된 50명 중에 내부에서 배역을 정했는데 꽤 비중있는 쌍칼 역을 하게 됐다. 나는 연기 경험도 없고 연극영화과를 다니는 것도 아닌데 괜찮은 역을 맡으니까 연기를 해도 되겠다 싶었다. <장군의 아들> 마지막 촬영 끝나고 펑펑 울었다. 이제 이 재밌는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났다. 배우가 선택받는 직업이란 걸 처음으로 알아버린 거지. 그때는 촬영장은 그냥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노는 놀이터였다.

-당신에게 배우 혹은 연기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놀이터였고 놀이수단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직업이 됐다. 나는 좋아서 하는데 심지어 돈을 주는 거지. (웃음) 지금은 또 그 단계는 벗어난 것 같다. 예전에는 재미없어지면 관둬야지 하고 건방진 생각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을 안 줘도 재미있게 하고 싶어졌다. 처음 시작할 때와 비슷한데 물론 그때보다 재미의 층위는 넓어졌다. <연애…> <해변의 여인>은 재미가 사라지려고 할 때 다시 재미의 불을 댕겨준 영화들이다. 아기도 있으니까 놀면 안 되지만 몇 개월 버틸 여력은 있다. 지금은 연기가 내 생의 다른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재밌는 연기를 끝내고 나서 그걸 바라보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올해는 체력적으로 너무 소진돼서 쉴 생각이다. 좋은 게 생기면 또 맘이 바뀌겠지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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