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적을 암시하는 개의 시간
하얀 진돗개가 잘 차려입은 부부와 함께 봄의 해변을 거닐고 있다. 남자가 얼굴 나이에 비해 머리숱이 적고 둘 다 우울한 말투를 지녔으며 해변의 여행객들이 돌이를 예뻐하는 걸 귀찮아하는 기색이긴 하지만 부부는 기품이 있어 보인다. 해변에는 고즈넉한 평화가 깃들어 있고, 오후의 햇살은 화사하며, 개의 털은 햇살로 더욱 새하얗다. 그러나 개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은 ‘돌이’다.
돌이는 해변에서 한번 더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 뒤, 부부에 의해 버려진다. 돌이를 내버려두고 기품있던 부부가 낡은 프라이드 승용차를 타고 떠나버리자, 버림받은 돌이는 프라이드 뒤를 있는 힘을 다해 아스팔트길을 따라 달려간다. 며칠 뒤, 돌이는 펜션 종업원이자 펜션 주인의 조카에 이끌려 다시 해변에 나타난다. “삼촌이 키우기로 했다”고 그는 말한다. 여행객이 “차라리 잘됐다”고 말한다.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 <해변의 여인>은 개의 영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 개가 중요한 영화다. 돌이는 자주 나오진 않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역정을 겪는다. 인간들이 모텔과 횟집과 해변에서 짝짓기 수작을 벌이고 있는 동안, 그는 주인과 함께 우아하게 해변의 걷다가 다음날 주인에게 버려져 생사의 갈림길에 섰고 며칠 뒤 새로운 주인을 만나 다시 평화를 찾는다. 그 사이에 그의 이름은 ‘돌이’에서 ‘똘이’ 혹은 ‘똘’로 오인돼 불렸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새 주인에게 ‘바다’로 명명된다.
돌이는 인간의 서사를 옹호하거나 보충하기 위해 혹은 비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누가 주인 행세를 하든 그는 살아간다. 우리는 그 개를 알지 못한다. 진돗개이긴 하지만(주인은 “진돗개라서 이발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말한다), 그가 순종인지 잡종인지, 어떤 짝을 만나왔는지, 게다가 수컷인지 암컷인지도 알지 못한다(돌이는 대개 수컷의 이름이지만 바다는 대개 암컷의 이름이다). 또 그의 전 주인이 부유한지 가난한지 혹은 병들었는지 건강한지 알지 못하며, 주인 부부가 그를 왜 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위험한 아스팔트길을 달리다가 어떻게 바다로 돌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죽음 같은 시간을 거쳐 다시 바다로 와 있다. 개가 자신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의 시간이 홍상수 영화에서 마련된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2. 홍상수 영화 = 무의미의 형식
홍상수의 영화에선 무의미가 의미보다 더 강렬하게 체험된다. 나는 여전히 그의 영화가 ‘무의미의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그의 영화가 무의미하다는 일반적인 용법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영화가 의미작용을 중단하거나 지연시키다 끝내 무화하며, 그럼에도 그의 영화가 매우 단단하고 매끄럽고 신속하다는 뜻이다. 그 형식의 단단함과 매끄러움과 신속함이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지는 홍상수 영화의 가장 큰 비밀에 속하는 문제다.
예컨대 <해변의 여인>에서 세 남녀의 특이한 속도와 몸짓의 걸음걸이, 그것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는 파도, 대사를 주고받을 때의 그들의 어정쩡한 표정과 머뭇거림과 말꼬리 흐림과 짧은 침묵의 순간, 누워 있는 두 남녀를 비추는 햇살, 그날 마침 찾아온 혹은 찾아오지 않은 황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리드미컬한 배열은 그것이 그 자리에 있어서 좋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견고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이것이 홍상수의 뛰어난 점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는 데뷔작 때부터 “상투적인 것을 부정하고 귀여운 것을 찾는다”고 표현했는데 이 말에 그의 영화적 방법론이 다 있는 것 같다. 부정하는 자로서의 홍상수의 태도는 근본주의적이다. 왜냐하면 의미가 무의미보다 가치있다든가 인간이 존엄하다든가 삶이 죽음보다 우월하다든가 하는, 많은 의미들이 비롯되는, 비유컨대 수학의 공리에 해당되는 최초의 전제조차 그의 영화에선 부인되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비판자가 아니다. 비판하기 위해선 비판의 기준이 되는 가치를 전제해야 하는데, 홍상수는 그런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시간이 지속되고 삶이 지속돼야 할 이유가 그의 영화에 없다. 죽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영화에서조차 그의 영화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무엇이 귀엽다는 것일까. 그 판단은 전적으로 그의 직관에 속하는 영역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가 일관되게 심리주의를 거부하며 행위의 표면에 집중해왔다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개별 요소들이 생생하면서도 구체적이면서도 전체는 단단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직접적인 형식이다.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내용과 형식을 분리할 수 없는 형식. 홍상수가 “언젠가 완전한 구형, 블랙홀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할 때, 그는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완전한 합일을 말하고 있다.
홍상수의 이야기가 짝짓기라는 건 자연스럽다. 그가 그림이나 음악이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영화를 만들어야 할 때, 시간은 진전해야 하며 서사는 전개되어야 한다. 먹는 것을 제외한다면 짝짓기만이 의미의 간섭 없이 또한 부연설명 없이 서사를 진전시키는 유일한 동기가 된다.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낙천적인 <오! 수정>의 마지막 중간 타이틀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은 매우 자기 반영적이다.
홍상수가 회피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과 역사의 시간, 그리고 타자의 시간이다. 대신 홍상수는 주관적이고 반복적이며 폐쇄적인 시간을 택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은, 그 영화가 끝났을 때 육중한 무의미의 형식만 남고 모두 증발한 듯한, 마침내 홍상수 자신의 영화조차 더 존재할 수 없을 듯한 심원한 공허를 체험케 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모방과 반복은 서사의 운율을 만들어내는 수사학을 넘어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이 실은 동질적이며 시간의 진전이 불가능한 폐쇄된 시공간임을 드러내는 징표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명숙과 선영 사이에서, 춘천과 경주 사이에서, 신라와 현재 사이에서 경수는 반복의 폐쇄회로를 오가고 주체는 사라진다.
<극장전>도 비슷한 길을 밟았다. 그러나 다르게 끝난다. 동수는 끝내 사라지지 않으려 한다. 동수가 본 남산타워는 <생활의 발견>의 경수가 춘천과 경주에서 본 오리배와 같지 않다. 춘천에 있던 오리배를 경주에서도 발견할 때, 경수는 같은 자리를 맴돌며 비슷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보통명사로 전락하며 반복하는 기계이고 오리배와 동질적인 존재다. <극장전>의 남산타워는 물리적으로 고정된 고유한 대상이다. 오리배를 보고 “저건 어디서나 보이네”라고 말하던 경수의 김상경이 동수라는 이름으로 <극장전>에서 남산타워를 보며 “저건 여기서도 보이네”라고 말할 때 그건 끝내 사라지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안간힘이다. 그는 결국 “생각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3. 심리적 차원의 개입과 시간의 확장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의 전작들이 그러하듯 느슨한 대구를 이루는 두개의 이야기가 이어 붙여져 있다. 그리고 두 이야기 사이에는 ‘이틀 후’라는 중간 타이틀이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영화감독 중래는 후배 창욱, 창욱의 애인 문숙과 ‘서해안 최고의 휴양지’ 신두리에 왔다. 중래는 창욱 몰래 문숙과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함께 서울에 올라온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중래는 이틀 뒤에 혼자 신두리에 왔다가 여행 온 여자 선희를 만나 문숙과 닮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인터뷰한다. 둘이 술 먹고 자고 있을 때 문숙이 찾아온다. 두 이야기는 비슷한 요소들이 있지만 같지는 않다.
나는 ‘이틀 후’라는 중간 제목에서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이틀이란 시간은 홍상수 영화에서 긴 시간이다. <극장전>은 하룻동안에 일어난 이야기다. 그 시간을 건너뛰고 주인공이 다시 나타날 때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했다. 이틀 뒤 중래는 신두리의 사구에 나타나 나무에 절을 하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도와주소서”라고 흐느낀다. 이 장면은 충격적이다. 카메라는 아주 가까이에서 그의 모습을 잡는다.
홍상수 영화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의 주인공이 짝짓기에 연관된 게 아니라면 이런 절실함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이 없다. 나중에 중래는 문숙에게 “나무에 절을 했더니, 신기하게 손에 박힌 가시가 빠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시를 빼달라고 울며불며 절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아마 두 가지 소망을 빌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쓰려 하는 시나리오 <기적에 관하여>의 진척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 시나리오가 세 가지 우연에 연결된 가느다란 선을 밝혀내면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이후에 밝히는 나쁜 이미지와의 싸움에 관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목숨 걸고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참으며 평생 이 싸움을 해왔다고 한다. 후자는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므로 이 장면의 감정은 과잉으로 느껴진다. 김소영은 이 장면도 표면 위에 정지하며 의미작용을 중단한 전형적인 홍상수식 표현이라고 봤지만, 나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장면 이후로 펼쳐지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홍상수가 어떤 이유에서건 영화적 방법론을 부분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그 변화의 하나는 표면장력을 이완시키며 심리적 차원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시간을 확장하는 것이다.
중래의 눈물을 제외하더라도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의 영화 중에서 이례적으로 선명한 감정이 전해지는 영화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동화적(同化的)인 음악에 있는 것 같다. 홍상수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무조 현악이나 <극장전>의 라데츠키 행진곡처럼 이화 효과를 위한 경우가 아니면 음악 사용을 최소화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두었던 음악을 갑자기 한꺼번에 풀어놓은 것처럼 로맨틱한 선율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문숙이 중래와 침대에 누워 “나, 당신 언젠가 볼 줄 알았어… 그래도 사랑해요…. 오늘, 김중래는 내 거야”라고 말하며 포옹할 때 흐르는 아름다운 주제 음악은 이 순간만은 달콤한 로맨스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지게 한다. 비감한 현악이 깔리면서 돌이가 펜션 종업원에 이끌려 해변에 다시 나타나는 장면에선 오히려 음악이 감정을 이끌어간다. 이 점 때문에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홍상수 영화가 멀리해온 관습적인 심리주의적 표현의 일부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인터뷰 형식을 통해서나마 인물들의 고백을 듣는 시간도 따로 마련된다. 우리는 홍상수 영화에서 이처럼 인물들의 내력을 많이 전해들은 적이 없다. <극장전>의 영실의 내력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한때 잘나가는 배우였지만 다쳐서 흉터가 생긴 이후로 영화 출연이 뜸해졌다는 것 외엔 없었다. 하지만 해변의 여인들은 자신의 삶과 더 중요하게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극장전> 때부터 과감하게 사용된 줌인도 여기선 마냥 유희적이거나 형식적이라기보다, 때로 감정이 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시도가 싫지 않지만 지지해야 할지는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형식의 견고함에 심리적 차원이 개입하자 얼마간 헐거워졌다는 느낌 때문이다. “에잇, 좀만아” 소리를 들으며 중래에게 봉변당한 횟집 종업원이 헬멧을 쓴 채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 중래에게 일종의 복수를 하고 난 뒤 소변을 보며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은 심리적 인과관계를 너무 선명히 할 때 느슨해지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해변의 여인>의 더 중요한 변화는 시간의 확장이다. 그 확장은 이중적으로 이뤄진다. 하나는 타인의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돌이가 해변으로 돌아온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심금을 울렸다. 여인들도 사라지지 않는다. 문숙은 중래와 내버려두고 선희와 술을 마신 뒤, 홀로 사구 뒤의 숲을 헤매는데 이건 중래가 말한 나쁜 이미지와의 싸움을 문숙이 벌이는 것으로 사후에 설명되지만 인과론적 기능과는 무관하게 이 장면은 가장 아름답게 촬영되었다. 문숙은 결국 중래가 떠난 뒤 홀로 에필로그를 만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시간의 개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이건 노동의 세계가 진입했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노동은 지속적이며 추상적 의미의 개입이 많은 세계다. 홍상수의 이야기는 대부분 노동이 멈춰선 지점, 일과 뒤 혹은 휴가의 시간을 다루었다. 하지만 <해변의 여인>의 중래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신두리에 왔고 결국 쓴다. 그는 두 가지 문제와 싸우고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시나리오의 난점이다. 그는 세 가지 우연을 잇고 있는, 영혼과 연관된 가느다란 선을 찾으려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두 번째는 나쁜 이미지, 주로 다른 남자와 잔 자기 여자에 대한 혐오감과의 싸움이다. 전자는 중래의 노동의 주제이며 <해변의 여인>이라는 영화 전체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 후자는 짝짓기의 주제이며 중래의 개인사와 연관돼 있다.
후자가 중래의 과거를 푸는 숙제이며, 전자는 중래의 미래를 준비하는 숙제다. 그에게 두 싸움은 평생의 숙제다. 하지만 중래의 말을 너무 믿을 필요는 없다. 그는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걸 써놓고도 “내일이면 말도 안 되는 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또한 두 번째 싸움을 이겨내기는커녕 어제 선희와 자고 오늘 문숙과 자면서 문숙이 몇년 전에 외국 남자와 잤다는 사실에 우는소리를 한다.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고 영혼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는 돌이 앞에서 벌벌 떨고 난 뒤 횟집 종업원에게 화풀이하며, 쓰지도 않는 근육이 저 혼자 탈나 일주일 동안 목발을 짚고 다닌다.
실은 두 여인도 마찬가지다. 문숙은 “진짜로 진짜는… 절대로 믿는 것은 별”이라고 이상한 소리를 해놓고 중래와 선희가 자기를 넘어서 갔다고 엉엉 울어댄다. “전 반복 같은 거 안 해요”라고 말하고 “한국 남자 무시하거든요”라고 이유를 덧붙인다. “절대로 믿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선희도 남편한테 배신당했다고 찔끔거린다. <해변의 여인>은 그들의 수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개인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게 아니다.
<해변의 여인>이 굳이 다루고 있다면 그래도 진전하는 시간이다. 중래는 사라지지 않고 무언가를 완성했다. 문숙의 차는 모래사장에 빠졌지만 헤쳐 나온다. 그것은 사소하지만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살아갈 것이다. 중래가 쓰는 시나리오와 <해변의 여인>이라는 영화의 공통점은 둘 다 예기치 않은 계기로 진전한다는 것이다. 중래는 문숙을 기다리며 괴로워하다 몇 시간 만에 불현듯 썼고, 문숙의 차는 정체불명의 두 청년에 의해 구조된다. 작고 초라한 구원이지만 그들의 모든 수다와 악다구니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들의 외부에서 온다.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김수영, <절망>) 온다. 그것이 기적이다. 그 기적은 누구도 모르게 돌이가 바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이루어졌고, 돌이는 이미 바다가 되어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홍상수 영화는 그렇게 넓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