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부드럽게 나아가는 곡선, <해변의 여인>의 송선미
2006-09-14
글 : 최하나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톡, 튀어오른다. 송선미를 2차원의 좌표로 표현한다면 꺾은선그래프가 그려지지 않을까. 낮은 진폭으로 나아가는 듯싶다가 별안간 가파르게 Y축을 차고 오르는 그래프. 검사, 의사, 교사 등 ‘사’자 들어간 역할들을 섭렵해온 그는 차분한 미소로 관객을 무장해제시킨 다음 순식간에 허를 찌른다. 방법도 다양하다. 신들린 듯한 헤드뱅잉을 선보이거나(<두사부일체>), 걸쭉한 욕지거리를 퍼붓거나(<은장도>), “파묻어버린다”며 민간인을 협박하거나(<목포는 항구다>). <해변의 여인>의 선희는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고단수다. 치근덕대는 중래(김승우)에게 “감독님하고는 절대 섹스 안 해요”라 선언하더니만 못이기는 척 잠자리에 들고, 경쟁자(?) 문숙(고현정)에게 “너무 미인이세요. 언니라 불러도 돼요?”라며 친한 척을 서슴지 않는다. 말하자면, 선희는 톡 튀어오르던 송선미의 의외성을 은근한 능청과 새침한 내숭으로 둘러놓았다.

“그전까지 주로 코믹물 위주의 가벼운 영화들을 해왔기 때문에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잔잔하면서도 농도가 짙은 영화, 딱 홍상수 감독님 스타일의 영화를 하고 싶었던 차에 연락이 왔어요. 정말 좋았죠.” 하지만 촬영현장에서 그때그때 시나리오를 써내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방식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트리트먼트를 읽었지만, 캐릭터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정확하게 감이 오질 않았어요. 대략적인 느낌만 있었죠. 솔직히 불안했어요.” 첫 만남에서도 연기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별자리가 뭐냐, 혈액형이 뭐냐” 등 별난 질문을 던졌던 홍상수 감독은 고민하던 그에게 “그냥 하면 돼”라며 털털하게 웃어 보였고, 송선미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선희가 등장하는 게 영화 중반부터잖아요. 이야기 순서대로 촬영을 했기 때문에 제 분량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어요. 불안함부터 설렘까지 별 감정이 다 들더라고요.” 피를 말리는 듯했던 기다림은 그러나, 선희를 차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줬다. 하루, 이틀, 바다내음을 맡으며 그는 인물의 각을 잡아나갔다. “선희는 아닌 것처럼 하면서 원하는 것은 다 챙기는 스타일이죠. 문숙이 솔직하고, 여자로서의 자아를 밖으로 드러낸다면, 선희는 그것을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포장해내죠. 굉장한 여우 같지만, 남자관계에 집착하는 문숙과는 반대로 여유가 있고, 풀어져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고요. 어쩌면 선희에겐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많아서일지도 모르겠어요.”

96년 SBS슈퍼엘리트모델에 입상하면서 연예계에 첫발을 내디딘 송선미에게 연기에 대한 욕심은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운좋게” 드라마 <모델>에 출연하게 되면서 막연하던 바람은 현실이 됐지만,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연기는 어려웠고, 사람들은 낯설었다. 고향 부산에서 홀로 서울에 올라온 그에겐 밤이 되면 어김없이 외로움이 찾아들었고, 그때마다 그는 말 그대로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알렸지만, 데뷔작은 영광보다는 상처를 남겼다. 송선미가 스스로 평가한 자신의 연기는 한마디로 ‘죽고 싶을 정도’. “너무 힘들었어요. 연기하겠다고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고, 정말 죽는 방법밖에 없겠다 싶었죠.” 딱 1년만 더 해보자,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죽자는 생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두사부일체> <국화꽃향기> <목포는 항구다> <라이어> 등 필모그래피가 쌓이면서 자신감도 생겼고, 혹독했던 신고식의 상처는 점차 아물어갔다. “사람이 간사하잖아요. 살다보니까 좋은 일도 많이 생기고, 삶에 대한 애착도 강해지더라고요. (웃음)”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처럼 <해변의 여인>은 송선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다. 이른바 ‘작가주의’ 감독과 작업했기에, <모래시계>를 보며 동경하던 고현정과 한자리에 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해변의 여인>은 그에게 “프로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줬다. “치열하게, 집중력을 발휘해서 무언가를 해낸다는 게 이런 거구나, 비로소 깨달았어요. 힘들기보다는 엔도르핀이 솟았죠. 촬영을 하는 순간마다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일까. 얼마 전 웨딩마치를 올린 송선미는 오히려 일에 대한 욕심이 강해졌다고 말한다. 10여년 전 자괴감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그는 이제, 연기에 대한 배고픔을 느낀다. “제가 그동안 부잣집 출신의 고운 역할들을 주로 해왔잖아요. 이제는 마약 중독자나 창녀 같은 강렬한 역할을 하고 싶어요.”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가 펼치는 ‘이미지론’처럼, 누군가의 본질에 닿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갈수록 절감하고 있다는 송선미는 섣불리 날을 세우기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조심스레 응시하고 싶다고 말한다. “말하기 낯간지럽지만”이라는 수사와 함께 그가 고백한 자신의 미래상은 “주름살까지 아름답게 여겨지는 사람”. 그렇다면 꼭짓점과 꼭짓점을 가파르게 잇는 그래프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동그랗고 넉넉한 원을 향해 부드럽게 나아가는 곡선. 송선미는 그곳 어딘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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