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툰〉 〈JFK〉 〈올리버 스톤의 킬러〉 등 논쟁적인 영화들을 많이 만든 올리버 스톤(60) 감독이 새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개봉(10월 12일)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5년 전 9·11 사태 당시 세계무역센터 붕괴와 함께 건물 안에 갇힌 두 뉴욕 경찰관이 구조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올리버 스톤이 9·11 사태를 다뤘다면 으레 이 사태에 대한 정치적 논평이나 해설을 기대할 법한데, 의외로 스톤은 그런 것 없이 구조 과정에 초점을 맞춘 휴먼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의외가 아니다. 저널리스트들은 뉴스 거리에 치중할 것이고, 실제 9·11은 이후 세계를 바꿔놓은 엄청난 사건이다. 그러나 나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동안의 내 영화들도 모두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었다. 〈JFK〉도 뉴올리언스 지방 검사의 이야기이고 〈닉슨〉도 스스로를 억압하며 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닉슨의 정치활동보다 그 사람을 보려고 했다. 이번 영화는 3천명 가운데서 살아남은 20명 중 두 명의 이야기다. 이렇게 희박한 생존율 앞에서, 이 둘에만 초점을 맞춰도 좋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스톤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지 30년이 지나 〈JFK〉를, 베트남전 종전 18년 뒤에 〈플래툰〉을 만들었는데 9·11 사태 5년 만에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체험자들이 정확하게 그날 일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라며, “그날 현장에서 사람들이 뭘 체험했는지를 말해주는 영화”이자 ‘역사의 한 조각’이라고 말했다.
스톤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종종 가족에게 억압을 받고 그게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지만, 이번 영화에선 가족이 매우 긍정적으로 등장한다. “내 영화에선 주인공이 가족 때문에 억압받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이 나를 정형화하려고 하는데, 난 영화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번 영화의 두 경찰관은 실제 인물인데 실제 그들의 가족관계가 나빴다면 나쁜 대로 다뤘을 것이다. 그런데 좋았다. 여기서 둘이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고 싶어하기까지 가족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게 상투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관습적인 미덕과 혁명적인 미덕, 보수적 기질과 자유분방한 기질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그걸로 드라마와 영화를 만든다”는 스톤은 “미국 안에서 우파들이 이 영화를 지지해서 놀랐다. 유머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그래도 영화의 미덕을 보아주는 것 같아 고맙지만 나는 그러고 싶은 의도가 없었고 이 영화가 애국적이지도 않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보편적 가치에 관한 이야기다. 9·11이 유포시킨 건 공포다. 영화는 그것과 맞서는 합당한 방법을 말하고 있다. 지금 매우 어두운 시기이지만 나는 빛을 찾기 위해 애쓰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점을 보고 나를 휴머니스트라고 말해주면 고맙겠다.”
스톤은 9·11을 둘러싼 음모론과 관련해 “음모론이 자꾸 나오는 건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9·11이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은 믿지 않는다”며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는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인터뷰 자리엔 스톤의 부인 정정선씨와 딸이 모습을 나타냈다. 스톤과 정씨는 둘이 87년 뉴욕에서 만났고 96년에 결혼했다는 말을 전했다. “결혼이 세번째인데, 이제 이혼은 안 할 것 같다”는 스톤은 “부인이 한국인이고 딸도 반은 한국인이다. 한국은 내 제2의 고향”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