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두뇌유희프로젝트, 퍼즐> 배우 홍석천
2006-09-2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이원우
“마흔이 되면 머리를 기를까 생각중이다”

얼굴이 알려져 있는 대한민국의 배우 중 성적 소수자가 홍석천만은 아닐 것이다. 공식적인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 홍석천일 뿐이다.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혼자인 걸 보면 누구나 택할 수 있는 쉬운 길은 확실히 아니다. “왜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자주 출연하지 않느냐”고 일반인들이 묻는다는데,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그를 가둔 성문화적 철책이 걷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에서, <두뇌유희프로젝트, 퍼즐>의 창녀촌 양아치 ‘노’,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무식하고 과격한 마초 역할을 홍석천이 한다는 것은 그를 둘러싼 기존의 성문화적 선입견과 아이러니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본인의 희극적인 연기 항로에 기댄 역이 아닌데다, 그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맡았던 것 중에서도 제일 큰 역이다. 그래서 더 눈에 띄었을지 모른다. 담배를 피워보면 어떻겠느냐고 사진기자가 말하자, 선글라스를 쓴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요새는 담배없이 못 산다면서.

-담배를 많이 피우나.
=이 영화 찍으면서 완전히 중독됐다. 영화 속에서 항상 담배 피우면서 욕을 해대야 하니까 그렇게 됐다. 예전에, 커밍아웃하고 나서 할 일 없어지고, 생각 많아지니까 그때도 이렇게 늘더라. 어디다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으니까. 담배가 아니었으면 아마 그때 약을 했을 거다. 한번은 경찰이 아침부터 집에 들이닥친 적이 있다. 너무 힘든 상황이니까 저놈이 분명히 뭔가 약 같은 걸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권 침해니 가만있지 않겠다, 언론에 알리고, 변호사 선임할 거다 했더니, 미안하다면서 조용히 테스트 한번만 받아달라고 하더라. 꿀릴 거 없으니까 그냥 해줬다. 내가 외국에 자주 다니니까 저놈이 뭔가 하긴 하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나보다.

-그러고 보면, 이번 영화에서 담배는 ‘노’라는 캐릭터의 기호 같은 것이다.
=늘 담배와 욕을 달고 사는 게 내가 맡은 ‘노’의 캐릭터다. 항상 노는 담배를 피우려고 하고, 김현성이 맡은 정은 못 피우게 하면서 티격태격하는 게 있다. 그게 시나리오에서는 훨씬 더 심했다. 나중에도 결국 담배 피우다 정한테 당하지 않나.

-언론시사회의 무대인사 때 배우들의 뒷모습을 봐달라며 출연진을 잠시 뒤돌려 세우는 일종의 ‘시사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약속된 것이었나.
=갑자기 떠오르더라. 우리는 항상 앞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 관객이 우리의 뒷모습을 보는 경우가 별로 없겠구나 생각했다. 얼마 전에 박상훈 사진작가가 유명 배우들을 찍어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주제가 배우들의 뒷모습이었다. 쟁쟁한 분들 찍는 자리에 나도 끼게 됐다. 갤러리에 걸린 내 뒷모습 사진 보면서 그런 생각이 살짝 들었다. 늘 화려한 조명에서 분칠을 하고, 만들어지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꾸미지 않은 뒷모습은 어떨까 하는. 그래서 우리 영화를 보러온 관객에게도 한번쯤 보여줬으면 싶었다.

-3년 만의 출연이라고 했는데.
=방송 이후에 3년 만이라는 이야기다. <완전한 사랑> <슬픈 연가> 하고 나서. 영화는 <작업의 정석> 카메오 출연한 걸 제외하고는 굉장히 오랜만이다. <꽃을 든 남자>가 내 영화 데뷔작이었고, 그건 배역이 꽤 괜찮았다. 그리고 나서, 이번 영화가 거의 처음 무게있는 역인 것 같다. 한 8년 만에 제대로 내가 영화를 찍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조역은 꽤 있었던 편이다.
=영화는 하고 싶은데, 안 써주니까…. (웃음) 그래도 한발은 담궈야 이 사람이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열정이 있다는 걸 알고 나중에라도 불러주니까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요즘 한양대 출신 동창 감독들이 굉장히 잘한다. 정용기는 동기고, 정윤철은 후배고, 이한, 김영준, 이시명 등 많다. 이 사람들이 학교 다닐 때는 다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배신을 하더라. (웃음) 그 사람들 영화 개봉할 때 “도대체 뭐야, 나 없이 영화 잘되겠어” 하는 반협박도 한다. 아무래도, 나는 고정 이미지가 있으니까 부담을 안고 출발하기 힘든 그 사람들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이번 역 제의받고 더 놀란 거다. 김태경 감독이 이런 어려운 역할을 왜 나를 시키나 해서. 사실, 처음에는 고사하고 싶었다. 오히려 제작진과 다른 출연진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출연하는 다른 배우들이 오케이하면 하겠다고 했고, 다행히 모두들 좋다고 해서 하게 됐다.

-상황을 이해는 하지만, 그들의 의견을 물어볼 필요까지 있었을까.
=나는 그런 입장이다. 커밍아웃 전에는 안 그랬지만, 이제는 주어지는 기회가 한정되어 있고, 내가 갖고 있는 딜레마가 있기 때문에, 나와 관련된 배우나 제작자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커밍아웃한 다음에 생각하는 패턴이 많이 바뀐 게 있다. 연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했으니까 저 사람보다 더 돋보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안 그러려고 한다. 가령 주진모하고의 경우에도 될 수 있으면 상대방 감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연기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더 개인적으로도 가까워지려고 애썼고. 제작사나 감독 입장에서는 분명히 모험이었던 것 같다.

-‘노’라는 역은 한국 관객이 홍석천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과 경쟁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모험을 감행한 것인데, 그 선택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미지가 구체적인 캐스팅 이유가 된 것인가.
=‘노’는 외국 배우 느낌이 나는, 그리고 기존 이미지와 다른 걸 해볼 수 있는 배우에게 맡기고 싶었다고 하더라. 사실 맨 처음에 감독은 스티브 부세미 같은 느낌의 배우를 찾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찾아보니 막상 없고, 나를 보고 나서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보는 사람들이 나의 성정체성 때문에 내 연기에 거리감을 갖고 보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건 배우로서 내가 깨뜨려야 할 것 아닌가 싶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남자 셋 여자 셋>의 쁘와종을 기억한다. 하지만,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내 이미지가 굉장히 마초 같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 나가서도 “너 참 아시아 남자치고 강한 인상”이라고 말하다가도, 내가 “나 게이야” 하면 그제야 놀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젊은 층의 경우, 내 이미지를 되게 강하게 느낀다는 것도 출연을 결정하는 데 일종의 자신감을 줬다.

-연기를 위해 참조한 영화가 있나.
=감독이 사실 가이 리치, 타란티노, <유주얼 서스펙트> 이런 종류의 영화 리스트를 일고여덟개 줬다. 근데 별로 안 봤다. 오히려 내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에서 가져오자 하는 생각을 했다. 작품을 할 때는 일부러 많이 안 보는 편이다.

-분량으로 보나, 역의 중요도로 보나 이번 영화의 배역은 큰 전환점이 될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세번의 큰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대학로에서 포스터 붙여가며 연극하고 뮤지컬하다 <남자 셋 여자 셋> 시트콤에 합류했을 때가 첫 번째고, 커밍아웃한 뒤 고민하다가 <완전한 사랑>에 캐스팅 됐을 때가 두 번째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인 것 같다. 그동안 조심스럽게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던 거라면, 이번에는 좀더 적극적으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외양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 배우들에게 외양이란 상당히 중요하지 않나. 같은 머리 모양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이유가 있나. 성정체성의 문제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그건 제약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헤어 스타일을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친한 이승연씨는 “석천아, 너 지겹지도 않니. 배우로서 많은 역할을 맡고 싶으면 머리를 길러라”, 이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한다. 집에 가발도 있다. 그거 쓰면 홍석천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 헤어 스타일을 유지하는 이유는 일단 내가 커밍아웃 전에 갖고 있던 내 모습이라는 것이고, 연기자로서 홍석천이 복귀했다는 걸 사람들이 인식할 때까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외국 배우 중 나 같은 스타일 얼마나 많나. 그럼에도 별별 역할을 다 하지 않나. 나이 마흔이 되면 그때 머리를 기를까 생각 중이다. 그때 기르면 좀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청춘 스타가 될 요량이라면 이미 예전에 뭘 해도 했을 거다. 그런 거 아니지 않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시기에 맞는 컨셉이란 게 있다. 지금도 이 스타일 때문에 불편해하는 사람은 조명감독님 빼고는 없다. (웃음)

-처음에 그 헤어 스타일을 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
=광고 때문이었다. 한국 사람 인상 같지는 않은데, 두상이 예쁘니, 머리를 밀 수 있느냐는 에이전시의 말에 그렇게 했다. 흑인 느낌, 힙합 느낌이 나는 인물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렇게 광고를 시작했고, 그 당시에 머리 깎은 모델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많이 출연했다. 그러다가 텔레비전으로 들어간 거고.

-한 가지 더. 자신이 갖고 있는 목소리를 사랑하나.
=불만이 많다. 축농증이 있어서 코가 항상 막혀 있다. 그래서 이번에 연기할 때는 담배를 하루에 두갑씩 피웠던 거다. 좀더 거칠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건강만 악화되고 목소리는 그대로고…. (웃음)

-앞으로 어떤 종류의 배역을 맡고 싶은가? 가령, 이 질문을 장동건에게 하는 거라면 상투적인 의미밖에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배우 홍석천의 입장에서라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싶다. 희극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좋은 코미디를 많이 하고 싶다. 많은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었으니까 그걸 극복하고 나오는, 생활 속에서 즐겁게 묻어나는, 남들에게 기분 좋은 감정을 줄 수 있는 코미디 말이다. 두 번째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작품들.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 스스로 나를 닫게 되더라. 그동안 연극, 뮤지컬, 영화 제의가 꽤 있긴 했다. 거의 게이나 그 비슷한 역할이었다. 그래서 고사를 많이 했다. 그런 역만 할 수 있다고 인식되고 싶지 않았다. 그거 아니면 내가 배우로서 밥줄 끊긴다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 번 역할을 과감하게 선택한 이유도 그런 거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여준 뒤라면, 내가 다른 진짜 100% 게이 역할을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작품이 있는데, 이번 겨울 지나서 초봄쯤 창작 연극을 하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커밍아웃을 한 유명 연예인이 주인공이다. 내 이야기가 기본 토대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섞어서 갈 생각이다. 주인공과 그의 자서전을 대필하게 된 일반 이성애자가 한 공간에서 같이 살면서 서로의 이질적인 문화와 성향과 오해와 편견을 부딪치면서 깨가는 이야기다.

-불행하게도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당신을 보는 주위의 시선이 당장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요즘 생각이 궁금하다.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 얼마 뒤,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전화가 온 적이 있다. 소니픽처스였나 그럴 거다. 내 이야기 갖고 영화 만들고 싶다며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메일도 주고받고 했는데, 갑자기 미국 정세 험악해지면서 소식이 끊겼다. 이제는 한국에도 <왕의 남자> <로드무비> 같은 새로운 성에 대한 애정과 노력들이 있는 작품이 나왔고, 그건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계에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필요로 할 때 내가 주체적인 입장이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홍석천의 운신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앞장서서 일을 저질러야 하는 시기가 오는 것 같다. 6년 동안 기다렸다고 표현을 한다면,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싶다. 그렇게 하다보면, 사람들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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