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왜 만나자고 한 거예요?” 인터뷰 도중 공형진이 대뜸 물었다. 개봉을 앞둔 <가문의 부활: 가문의 영광3>에 출연해서? 이번 영화에서 선한 눈매와 어울리지 않아 뵈는 악역을 맡아서? 민망하고 딱하게도, 적절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묻나, 싶었을 뿐이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로 데뷔한 지 17년째. 공형진은 언제나 한결같다. 그 한결같음 때문에 “나를 왜 만나자고 했느냐”는 돌발 질문에 꿀먹은 벙어리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변신에 목말라하지도 않고,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그는 그동안 빛나지 않는 빈자리를 쉼없이 메워오면서 ‘코믹배우’, ‘감초배우’ 같은 그닥 달갑지 않은 수식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중이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촬영현장에서와 달리 나긋한 말투로 조근조근 답변하는 그의 말을 뒤로하고 인터뷰 장소를 빠져나올 무렵 불쑥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다. “매일 먹는 밥은 지겹지도 않나. 그런데 사람들은 밥을 왜 매일 먹는 걸까?” 돌아서 되묻고 싶어졌다.
-기자시사 무대인사할 때 없더라. 그런 자리에서 항상 입담을 발휘하곤 했는데.
=<미스터 총알> 촬영이 있었다. 영화는 저녁 시사 때 봤다. 촬영이 없었으면 갔겠지.
-악역은 처음 아닌가.
=<가문의 영광> 시리즈가 처음이다. 2편할 때 처음 제안받은 건 원래 백호파 둘째였다. 그런데 좀 부담스럽더라. 똑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고 해서 차라리 악역하겠다고 했다. 이번엔 봉 검사가 백호파에게 복수한다는 설정으로 시작하지 않나. 내가 어떤 모티브를 줘서 이야기를 펼치다보니까 인물의 개연성이나 행위의 당위성을 마련하는 게 상대적으로 쉬웠다.
-촬영 내내 김해곤과 붙어다녔을 텐데.
=해곤이 형, 아니 김해곤 감독님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좀 많다. 노멀하고 힘주지 않는 연기는 해곤이 형이 굉장히 잘한다. 그런데 이번엔 좀 망가져야 하니까 힘들어하더라. <파이란> 때부터 알고 지내면서 정든 사이라 내 입장에선 편했다. 애드리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많은데 상대방이 편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당황하지 않겠나. 해곤이 형은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쉽게 애드리브를 하고 넘어갈 수 있기도 하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편한 상대가 있었다면, 어려운 상대도 있었을 텐데.
=신현준. 전부터 친해서 잘 놀던 사이이긴 한데 최근 몇년 동안 같이 작업한 적이 없었다. 예전의 좋은 느낌들은 있는데 그때의 기분을 되살려서 주고받긴 좀 그렇더라. 조금 서먹했던 거지.
-마지막 결투 때 신현준에게 “기름진 아랍새끼야”, “코는 왜 아직도 저렇게 자라냐”라고 하는데 그건 애드리브 아닌가.
=애드리브다.
-강도 높은 애드리브를 했다는 건 편해졌다는 건데.
=그런 애드리브하면 너무 좋아한다. 형이 워낙 유쾌한 성격이기도 하고 해서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어떨 때 보면 ‘나를 제발 좀 죽여줘’ 하는 마조히스트 같다. (웃음) 영락없이 난 사디스트가 되는 거고. <상상플러스> 녹화하는데도 굳이 나랑 같이 하겠다고 해서 그래 원하는 대로 죽여줄게 하고 나갔다.
-2편이나 3편 모두 백호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뒤늦게 둘째 역할을 할걸 하는 생각은 안 했나.
=아니. 욕심낸 적이 없으니 후회도 없다. 변신까진 아니더라도 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다. 둘째를 했다면 함께 어울리고 재밌게 촬영했겠지만, 봉 검사 역할 또한 다른 이미지 메이킹을 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내 걸 조금은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맡아왔던 인물들은 언제나 ‘우리 편’이었던 캐릭터였다. 친근한 옆집 형 같은, 언제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실 그러한 기존 이미지 때문에 악역 연기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 게다가 이번 역할은 그냥 나쁜 놈이 아니라 웃기기까지 해야 하지 않나.
=생경하다, 생뚱맞다, 그럴 수 있다. 다만 이걸 좀 감안해줬으면 한다. <가문의 영광> 시리즈에서 악역은 최대한 리얼하게 얼마나 나쁜 놈인가를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중간중간 관객과 호흡하면서 때론 웃음도 줘야 하는 거다. 극중 봉 검사는 치를 떨 만큼 나쁜 놈일 수 없다. 백호파 식구들을 최대한 살려주기 위해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일 뿐이다. 계속 인상 쓰고 있을 순 없는 거지. 나름대로는 주도면밀하게 꿍꿍이를 꾸민다고 하는데 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런 캐릭터다.
-백호파 못지않은 웃음을 줘야 하고, 동시에 백호파한테는 위협을 가하는 캐릭터여야 했는데. 그걸 섞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고, 실제 영화에서 보면 좀 불안하기도 하다.
=따지고 들면 틈이 많다. 봉 검사처럼 어수룩한 검사가 어딨나. 이를테면 봉 검사의 지시로 하수인들이 김치 배달 트럭을 막아세우는 장면을 봐라. 그게 말이 되나. 안 된다. 근데 이번 영화는 시리즈 3편이다. 만든 사람과 배우들과 관객이 이런 장면은 넘어갑시다, 할 수 있다고 본다. 은연중 약속인 거지. 사실 이 영화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나, 이 장면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하고 달려들면 궁지에 몰릴 수 있다. 그러나 재미라는 측면에서 마음을 열고 접근하면 다른 평가도 가능할 거라고 본다.
-예를 들어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만은 웃음을 주기 위해 등장하는 캐릭터다. 무거운 이야기에 기름칠 하는 명확한 역할과 책임이 있다. 반면 이번 영화는 코미디지만 웃음을 주는 포인트와 타이밍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웃겨야 하는 게 맞나, 하는.
=누군가는 나보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제를 전하는 건 장동건이나 원빈이 아니라 공형진이라고 하던데. 이념도 사상도 없는 전쟁터에 끌려와 형제들에게 총을 겨눠야 했던 당시 민중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인물이라면서. (웃음) 애드리브의 경우,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가 더 어렵다. 이야기의 흐름이 있는데 중구난방 애드리브를 할 수 있겠나. 애드리브 하나를 하더라도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가야 하는 거니까. 반면, <가문의 부활> 같은 경우는 굳이 연관을 따지지 않아도 된다. 관객을 이완시킬 수 있다면.
-첫 장면은 봉 검사의 감옥 수련 장면이다. 대역인가.
=아니다. 돌려차기하는 거 말고 직접 했다. 와이어 차고.
-와이어는 처음 탄 것 아닌가. 처음 타면 아플 텐데.
=잘 모르겠더라. 액션장면 보고서는 다들 앞으로 액션영화 섭외 들어오겠네, 하던데. (웃음) 무술감독님이 합 짜주면 그거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되는 거니까.
-요즘은 전과 달리 개봉 전 VIP 시사회가 의례적인 이벤트로 자리잡았다. 다른 동료들의 영화들을 볼 기회가 많을 텐데, 가끔 친한 선후배들끼리 모이면 서로의 연기에 대해서 직언을 주고받나.
=요 근래 장동건, 김승우 등과 자주 어울린다. 대단히 불안, 불안하던데 그래도 중심 잡고 잘 가더라, 뭐 이 정도 수준이지. 오버할 것 같았는데 죽여서 가더라, 뭐 이런 식으로. 연기가 이렇고저렇고 하는 식의 품평할 만한 사이도 아니고 그런 시기는 좀 지나기도 했고. 연기보다는 영화에 대해서는 터놓고 이야기하지만.
-모난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찌르기보다는 다독이는 스타일인데.
=어렵게 찍었다는 걸 아니까. 남들은 알 수 없는 고통을 아니까. 북돋워줄 수밖에 없다. 크나큰 오류라면 짚어줘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칭찬이 비판보다 훌륭한 보약이다.
-배우는 비판보다 칭찬을 먹고 자라나보다.
=그렇지. 못한 건 누구보다 배우 본인이 제일 많이 안다. 안아줘야 다음 작품에 들어가서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거지. 스스로 추스려야 전보다 풍성해진다.
-후배 배우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주는 것 같다. 얼마 전 <연애시대>의 이하나도 그렇고. 함께 작업한 후배들이 다들 치사를 하는 거 보면. 본인이 연기를 시작했을 때 곁에서 챙겨주는 선배가 없어서 더 그런 것 아닌가.
=<파이란>에서 (최)민식이 형 만나기 전까지 외로움 많이 탔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영화 시작했다가 이후에 <신장개업>하기 전까지 방송사 공채로 들어가 드라마를 했는데 혼자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제목을 말하긴 좀 그렇고. 영화쪽으로 다시 오기 전에 출연한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 PD에게서 인간적 모욕을 당하고 상식 이하의 홀대를 받으면서 정말이지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데. 한번은 32시간을 차에서 대기하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내가 자질이 부족한 건가”. 분을 이기지 못해서 사고치면 결과적으로 내가 지는 거다 싶었고, 결국 그 PD의 인간적 소양이 부족하다고 판단을 내려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웃음)
-승부 근성이 강한 것 같다. 운동을 좋아해서 그런가.
=지는 것을 되게 싫어한다. 어렸을 때도 축구하면 이길 때까지 했다. 룰 바꿔가면서. 집착이 심한 거지. 그런데 이 판에 있는 사람치고 승부 근성 없는 사람 있나.
-올해 공형진을 돋보이게 한 작품은 드라마 <연애시대>다. 공준표 때문에 관심을 많이 받았다. 처음부터 이 정도로 주목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나. 감이 좋아서 출연한 건가. 광고에도 출연했고.
=왜 그러나. 광고는 전에도 찍었다. 영화나 드라마 끝나고 그 때문에 찍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연애시대>의 경우, 내 입장에선 출연할 수밖에 없었다. 러브라인이 있잖나. 캐릭터에서 푸근한 냄새가 나서 좋았고. 또 하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민 같은 것도 들여다볼 수 있겠다 싶었고.
-여자 상대가 있는 캐릭터를 전부터 원했다는 말인가.
=왜 없었겠나. 당연하지. 그동안 너무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에 출연해서. 역할들도 악착같이 빼앗기보다 내주고 받아주는 역할이라서 더더욱 그런 기회가 없었다.
-주위 반응이 궁금하다. 공형진의 멜로 연기에 대한.
=(이)정재는 <연애시대> 보고 나서 코미디하지 말고 멜로하라고 하던데. (웃음) 멜로의 공식 중에 멋있는 남녀 캐릭터들이 꾸며내는 이야기라는 게 있긴 하지만 난 평범한, 그러나 더 애틋한 멜로 연기를 보여주고 싶더라. <연애시대> 하면서 그걸 보여주려고 애썼다.
-상대 배우가 나이 차 많이 나는 후배라 힘들었을 텐데. 이런저런 교감을 하려면 그래도 좀 나이가 얼추 비슷해야 하지 않나.
=이하나랑은 띠동갑도 더 되지. 힘든 건 없었다. 전에 알고 있는 친구였고, 그 역할에 추천했던 것도 나고. 추천했으니 내 책임도 있는 거고. 처음엔 의욕이 너무 앞서서 극의 밸런스를 맞추지 못해서 좀 어려워했는데 나중에는 스스로 잘 알아서 하니까, 뭐.
-<미스터 총알>도 코믹스릴러다.
=갖고 있던 거 써먹으면서 소진된다는 느낌은 있다. 그런데 난 좀 다른 생각을 한다.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배우라고. 대중이 원할 때까지 계속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최근에 (김)승우 형이 <해변의 여인>과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매력>에 출연하는 거 보면서 옆에서 많이 응원했다. 아직 영화를 못 보긴 했지만. 나도 기회가 되면 김지운 감독님이랑 하고 싶고, 홍상수 감독님이랑 하고 싶고 그렇다.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님과도 다시 해보고 싶고. 승우 형에게 홍상수 감독님한테 내 출연의사를 전하라고 했는데. 김지운 감독님은 내가 이런 이야기하고 다녀서 좀 피하시는 것 같다. 지난해 디렉터스 컷 행사 끝나고 소주 마시는데 김지운 감독님이 와서는 “저 공형진씨, 안 싫어해요. 다음에 꼭 봐요” 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비싸서 못 쓴다고 하는데, 그런 감독님들 영화에는 싸게 해야지.
-나이 들면 배우들은 연기를 빼고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 마이너스 연기를 하고 싶다는 거지.
=그래도 난 플러스 연기를 할 거다. 연기를 빼고 연기를 하고 싶다는 건 배우의 궁극의 목표일 순 있는데 과연 그 지점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고. 내 한계를 인정하되 가능한 욕심은 계속 부리면서 조금씩 더해 나갈 거다. 죽어서 남들에게 ‘쉬운 배우’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자신의 한계가 뭐라고 생각하나.
=꽃미남이 아니잖아. 20대만 하더라도 하면 된다 하는 무데뽀 정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안 되는 게 있다는 거 알지. 그래도 욕심을 버릴 순 없다. 어느 기사에서 봤는데 <디파디드> 촬영에 앞서 잭 니콜슨이 마틴 스코시즈에게 섹스신을 넣어달라고 했다지 않나. 악한 인물들이 대개 본능에 충실한 것 아니냐면서. 그런 욕심은 부려야 하는 거지. 명확한 이유가 있다면.
-아직도 배고픈가보다.
=배고프다. 정말 많이 배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