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상우 데뷔작 <작은 연못> [1]
2006-09-26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1950년 7월 말 충청북도 노근리에서 피난민 수백명이 미군에 사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실개천이 터져나온 핏줄처럼 붉게 변했다는 쌍굴과 철로는 남아 있었지만, 사건 자체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무덤이 되었다. 그러나 노근리뿐이었을까. 여수와 순천, 제주도, 이라크, 르완다, 산티아고…. 숱한 지역전과 내전과 국제전은 타의에 의해 총을 들어야 했던 군인들과 맨몸으로 총알에 노출된 민간인들을 제물로 삼아 국경선을 다시 그리고 집안을 평정해왔다. 연극연출가로서는 부동의 지위에 오른 이상우 감독이 “이 촬영장에서 나는 할아버지”라고 말할 만한 나이에 처음으로 만드는 영화 <작은 연못>은 그런 이야기다. 세월이 흐르고 땅이 바뀌어도, 하나같이 침묵하며 죽어가야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56년이 지나서야 그때처럼 무더운 여름에 촬영을 시작한 <작은 연못>은 감을 거두어 곶감으로 말리는 가을에 촬영을 마치고, 그때처럼 무더울 내년 여름에 개봉한다. 마르케스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파업노동자 학살사건을 꿈처럼 그렸듯, 이상우 감독 또한 소중하게 숨겨두었던 그림책 책장을 넘기듯 서글프고 아름다운 영화를 내놓을 것이다.


대충 엮은 피난민의 움막들이 얼룩처럼 흩어져 있는 숲속에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는 서산에 지고 저녁 산은 고요한데/ 산허리로 무당벌레 하나 휘익 지나간 후에/ 검은 물만 고인 채 한없는 세월 속을/ 말없이 몸짓으로 헤매다 수많은 계절을 맞죠.” 잡음없이 깨끗하기만 한 어린 노랫소리가 그렇게 슬픈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김민기의 노래 <작은 연못>을 메인 테마이자 제목으로 택한 이상우 감독은 그 장면을 찍은 몇주 뒤에 그런 슬픔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묻자 “예쁜 것이 슬픈 거지”라고 답했다. <노근리 전쟁>이라는 가제를 달고 출발했던 <작은 연못> 또한 그런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소꿉놀이 밥상에 놓인 공기처럼 소박한 자태로 바깥 세상을 몰랐던 작은 마을, 내키는 대로 달리고 웃던 아이들, 그 마을과 그 아이들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밀어간 전쟁이 겹겹이 포개어져, 예쁘고도 슬픈 이야기가 되는 영화. 막걸리를 마시다가 문득 “전쟁이 없을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아? 잘만 하면 꼭 없어도 되는 건데…”라고 천진하게 중얼거리던 이상우 감독은 보호받아 마땅했던 평범한 삶을 절구공이처럼 짓이긴 전쟁 그 자체에 저항하고 있었다. 1950년의 노근리이건, 영화 속의 대문바윗골이건, 전쟁은 당연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00명이 넘는 스탭과 배우들이 개런티를 투자하는 형식으로, 다시 말해 개런티를 받지 않고 참여하고 있는 <작은 연못>은, 그런 점에서 결코 작지 않은 영화다.

1950년 7월,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소재

극단 연우무대와 차이무의 연출가로 알려진 이상우 감독은 <칠수와 만수> <늘근 도둑 이야기> <마르고 닳도록> <돼지사냥> 등을 연출하며 명성을 얻어왔다. 그는 바로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한 소재를 택하면서도 어느 곳인지 모를 보편적인 시공간의 이야기로 옮겨놓는 재능이 있었고, 비극을 직시하면서도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AP통신> 기자 최상훈과 찰스 핸리, 마사 멘도자가 <노근리 다리> 영문판을 출판했던 2001년 무렵부터 명필름(현 MK픽처스) 이은 대표와 영화 제작을 고민했던 이우정 노근리 프로덕션 대표가 2003년 이상우 감독에게 시나리오 집필을 의뢰한 것도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톤으로 이야기하는” 드문 재능 때문이 컸다. 1950년 7월 말에 일어났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단지 정색하며 재현하거나 슬프고 처참한 사건으로만 극화하기엔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근리 사건은 1994년 유족 중 한명인 정은용씨가 노근리 사건을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로 펴내고 언론이 그 진상을 취재하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충북 주곡리 주민들은 미군이 소개령을 내리자 산골마을 임계리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미군의 남하령에 의해 철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7월26일 미군 전투기는 노근리에서 길이 막혀 철길 주변에 모여 있던 주민들에게 폭격을 퍼부었고, 지상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도 철길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철길에 올라앉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중에는 어린아이와 노인이 많았고 아낙네와 임산부가 있었지만, “피난민이 전선을 통과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령부의 지시는 호미와 낫 같은 농기구마저 압수당한 무방비 상태의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철길 위에서만 100여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철길 부근 다리 아래에 있는 쌍굴로 달아나 29일 아침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숨어 있었다. 그 3일 동안 미군은 간간이 총격을 계속해 결국 굴에서 살아나온 피난민은 수백명 중에서 스물다섯에 불과했다. 그들은 핏물을 마시고 육친이 섞인 시체더미를 파고들어가 총알을 피하며 살아남았다.

동화와 다큐의 느낌이 공존하는 시나리오

한국에서 출판된 <노근리 다리>와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비디오 자료를 받아든 이상우 감독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드라마이고 최루성 다분한 노근리 사건을 곧이곧대로 다루되,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속한 사건으로 옮기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신기한 시나리오를 써냈다. “인혁당 사건을 연극으로 만든 적이 있었는데, 내게는 한 시간 반 동안 뒷자리에 앉은 유족들이 울음을 참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 다시는 실화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이상우 감독은 폭격과 총격이 계속되었던 사나흘은 노근리 사건을 거의 그대로 옮겼지만, 지옥 같은 시간이 닥쳐오기 이전 평온했던 마을 사람들은, 그림책 삽화를 그리듯 한명한명 다시 창조했다. <작은 연못>이 동화와 다큐멘터리의 느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짱이와 자야와 꾸리와 개비(이 이상한 이름들은 아이들 이름 끝자만 따서 부르는 애칭이다. 예를 들면 개비의 본명은 영갑이나 병갑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부모와 형제들은 흙색과 녹색이 섞인 예쁘고 고요한 마을에서 살았지만 한국전쟁의 전선이 충청도까지 내려오면서 순식간에 첨단폭력의 희생물로 던져진다. 아이들의 행복한 나날은 현실이어야 했지만 낡은 동화책처럼 사라졌고, 민간인을 살육한 폭격은 거짓말이어야 하겠지만 현실이었다.

이상우 감독은 흙더미에 파묻힌 노근리를 헤쳐 그럴듯한 러브스토리나 눈물겨운 가족애를 찾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썩어가는 시체더미를 뒤져 얼굴이 반쯤 날아간 채 숨만 붙어 있던 동생을 업고 나온 형이나 총에 맞은 어머니를 쌍굴에 두고 한쪽 눈을 잃어버린 채 돌아온 처녀가 주연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우 감독은 <작은 연못>을 200명이 주인공인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감독들이 모두 이렇게는 영화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너희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뭐라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감독하려고 보니까 답답한 거야. (웃음) 그래서 100명으로 줄였다가 결국 지금 마을 사람은 56명이 됐다.” 최호와 황규덕 감독 등이 거쳐간 <작은 연못>은 영화를 할 뻔한 기회가 세번 정도 있었지만 각양각색의 이유로 그 기회들을 스쳐왔던 이상우 감독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사발통문을 돌려” 캐스팅, 연극배우 출신 56명의 생생연기

소재가 민감한데다가 정해진 주연이 없는 영화가 제작비를 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형식을 고집했던 이상우 감독 자신에게도 50명이 넘는 인물을 일일이 빚어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처음엔 시나리오가 잘 풀리지 않았는데 캐스팅 플랜을 세워 배우들을 떠올리니까 일이 쉬워졌다. 성근이(문성근)라면 여기서 이런 말투로 이런 말을 하겠구나,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써갔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노근리 사건이 영화로 제작된다는 풍문만 몇년이었던 <작은 연못>이 마침내 첫발을 떼어 굽이굽이 변화무쌍하고도 험한 피난길을 걷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 영화의 동력이 되어주었다. 이상우 감독이 “사발통문을 돌려서” 한자리에 모은 배우들이 아니었다면 56명이 주인공인, 그리하여 배우 56명이 모두 연기를 해주어야 하는 영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연못>의 최진웅 촬영감독은 카메라로 배우들을 보고 있는데 점처럼 흩어진 수십명이 모두 무언가를 하며 살아 움직이고 있더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연우무대와 차이무를 통해 이상우의 연출 방식을 익힌 배우들이었다.

밤마다 다음날 찍을 시나리오를 고치고 있는 이상우 감독은 “연극을 하던 때부터 무대나 배우를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극장을 벗어나 내장산이나 문경새재처럼 트인 공간으로 나와도 불안하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까지 딸린 한마을의 주민들이 떼를 지어 먼길을 걷는 <작은 연못>을 빈틈없이 맞물린 계획에 맞추려고만 든다면 굳이 56명을 주인공으로 삼을 필요가 없는, 집단의 생기가 결여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이우정 대표는 “누구도 이 시나리오를 그렇게 봐주지 않았지만, 내겐 시나리오 이외의 것이 보였다”고 말했다. 생명과 의지와 인격을 가진 배우가 <작은 연못>에 들어오면서 영화는 그들의 몸짓을 따라 움직였고 다시 그들의 몸짓을 자기쪽으로 끌어오기도 했던 것이다. 마을 유지 문씨로 출연하는 문성근은 “<작은 연못>은 이상우가 연극을 했던 30년의 결과다. 대학로는 무조건 나이 순으로 출연료를 배분하는데, 이상우는 무명이어서 생활이 어려운 젊은 배우부터 배려하곤 했다. 감각과 재능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많은 배우들이 모였겠는가”라고 말했다. 거기에 더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감독과 배우들은 자그마한 변화와 커다란 선회를 냉큼 몸에 익은 연기로 바꾸어내고, 그것은 때로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쌍굴에서 살아남아 마을로 돌아가는 이성민(꾸리 아빠)은 다른 영화와 스케줄이 겹쳐 일찌감치 철길에서 죽게 됐다. 그 때문에 이상우 감독은 예정과 달리 엄마 혼자 아이들을 반기는 영화의 마지막이 서글픈 “4류도 아니고 5류도 아니고, 아주 어려운 3류 신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김민기의 노래들을 따라 흘러가는 <작은 연못>은 새빨간 까치밥이 점점이 찍힌 늦가을 즈음에 멈추어선다. 그리고 그 부분에 이전과 결코 같아지지 못할 마을의 정경을 묘사하는 지문이 있다. “짱이, 개비가 말없이 들길을 걷고 있다. 짱이는 목에 붕대를 감았고 개비는 지팡이를 짚었다. 아이들은 이제 달리지 못한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피난지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아기염소처럼 산길을 내달렸던 아이들은 신체의 일부와 함께 마음의 한 조각도 잃어버렸을 것이다. 비어버린 부분을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은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와 대지가 흔들리던 느낌과 총에 맞아 죽은 어머니의 모습일 테고. 그럼에도 이상우 감독은 “보고 나면 기분 좋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혹 저녁해가 남기고 간 조각처럼 빨갛게 맺힌 햇감과 전쟁에도 다치지 않은 대문 바위가 부서진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다는 걸까. “예쁜 것이 슬픈 거지.” 이상우 감독은 그렇게 말했었다.

촬영현장 엿보기

주·조연이 따로 없는 배우들의 스펙터클

내장산 산길에서 피난장면을 찍던 이상우 감독이 배우들을 모아놓고 예정에 없던 연기를 주문했다. “대본에는 없지만 짱이 고모부가 말을 끝내면 다들 한마디씩 던지면서 웅성거리는 겁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돌아가자 열명이 넘는 배우들은 눈이 부신 애드리브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 지금 뭐라는 거여.” “이런 육실헐 놈들.” 미리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두명이 동시에 입을 열거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심지어 배우가 자신이 뭘 했는지도 모르는데 느닷없이 감독이 “오케이!”를 외쳐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문성근과 강신일, 이대연, 김승욱, 김뢰하를 비롯한 <작은 연못>의 배우들이 극단 연우무대와 차이무에서 다져온 인연, 연마한 재능이 없었다면 이런 촬영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한마을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이웃들처럼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 이들은 <작은 연못>의 든든한 수원이기도 하다. 배우 중에서 젊은 편에 속하는 최덕문은 자신은 촬영이 시작되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서 “배우들이 워낙 많아 각자 한마디씩만 해도 끝이 없어서(웃음)”라고 말했다.

<작은 연못> 배우들이 이웃처럼 보이는 것은 오랜 친분에 더해 가족이 함께 출연하는 팀이 많기 때문이다. 김승욱과 아들과 딸, 민복기와 어머니와 아들, 김요한과 여덟달짜리 딸(영화에는 아들로 나온다)처럼 영화 속에서는 다른 가족으로 헤어지더라도,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이들이 리허설을 시작하면 배우 부모들은 디지털카메라로 그 장면을 찍고, 쉬는 시간이면 야유회라도 나온 것처럼 배우들이 어울려 캐치볼을 하거나 물놀이를 하곤 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삼촌이고 고모이고 조카이다. 그러므로 <작은 연못>은 친척이 그렇고 마을이 그렇듯 조연과 주연이 따로 없다. 설사 대사가 없더라도 누구 하나 배경으로 물러나지 않는다. 강신일은 오십명이 넘는 마을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 산길을 오르는 장면에서 어머니를 지게에 짊어지고 가는 가장 힘든 연기를 해야 했는데, 대열 앞에 섰던 문성근이 “자, 신일 선배를 위해 우리 MTM이 노력해서 한번에 갑시다”라고 기운차게 외쳤다. 그 농담처럼 한두명에게 집중하는 영화였다면 대열 대부분은 보조출연자로 채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연못>은 점점이 늘어선 주민 모두가 자기 몫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주연배우 두세명이 모니터를 체크하는 대부분의 촬영현장과 다르게 <작은 연못>의 모니터 주변엔 동등한 배우들이 모여 장사진을 이루곤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스펙터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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