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상우 데뷔작 <작은 연못> [2]
2006-09-26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작은 연못>에 모인 배우들

“좋은 영화에, MT 기분으로 오래서 합류했지~”

경북 문경에서 철길 폭격 장면을 찍고난 이대연은 “이제야 전쟁영화를 찍는 기분이 난다. 그동안 놀러오는 것 같았는데”라고 말했다. 이상우 감독에게 강제징용을 당했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배우들은 한여름에 시작된 촬영인데도 힘들어하지 않고 나뭇가지로 윷을 만들어 놀거나 하며 MT 비슷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계급은 있다고 했다. 하루만 특별출연하는 사람은 신의 아들, 다른 마을로 피난을 가거나 하여 촬영이 5회 이하인 사람은 귀족, 철길에서 폭격을 당해 죽는 사람은 평민, 살아남은 이들이 사흘 동안 총격을 받으며 버티다 쌍굴까지 들어가는 사람은 노예. 50년대 농민들의 허름한 저고리를 입고 느긋한 손길로 날벌레를 쫓으며 노는 듯 일하는 듯 촬영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배우들을 계급 불문하고 한명한명 담아보았다.

강신일/ 영화 <공공의 적> <한반도>, 드라마 <부활>
강씨_어머니 말씀을 매우 잘 듣고 병든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피난가는 효자. 딸만 셋인 딸부잣집 아버지다.

강신일은 86년 연우무대의 연극 <칠수와 만수>를 하면서 처음으로 이상우 감독을 만났다. 그가 기억하는 연우무대는 암울했던 80년대에 사회적인 이슈나 묻혀져 있던 사실을 극화하면서도 공감대를 간직한 작품들을 만들곤 했던 극단이었다. 그가, 누군가가 영화로 만들어야하겠지만 이 처참한 소재를 어떻게 극화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기도 했던 노근리 사건의 영화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작은 연못>은 전쟁을 고발한 영화로는 너무 아름다워서 역으로 그 잔혹함을 고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상우 감독의 배려로” 철길까지 가지 않고 몇번만 나오면 되는 역을 배당받았지만 노모를 모신 지게가 너무 무거워 어깨와 등의 살갗이 발갛게 벗겨지는 고난도 촬영을 감수해야 했다. “이상우 감독이 내가 아직도 20년 전 체력인 줄 알았나보다”라는 게 지게를 짊어지며 밝힌 그의 소감이었다.

김뢰하/ 연극 <이>(爾), 영화 <살인의 추억> <달콤한 인생>
개비 아빠_1남2녀의 아버지. 김뢰하 본인은 부인했지만 아내 역의 박명신을 비롯한 많은 배우들이 개비네를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안으로 지목했다.

김뢰하는 <작은 연못>의 시나리오에서 다큐멘터리보다는 동화의 느낌을 더 많이 발견했다. 그런 앞부분이 있어 중반 이후 벌어지는 학살이 분노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불러냈다고 말하는 그는 이십년 가까이 묵은 이상우 감독과의 인연뿐만 아니라 지금 꼭 해야 할 것 같은 영화이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은 연못>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상우 감독은 솔직하고 담백한데, 그것이 용기가 어린 담백함이랄까, 그런 모습을 보며 새삼 내공을 느꼈다.” 얼마 전에 결혼한 김뢰하는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채 문경으로 내려와 폭격장면을 찍으며 먼지와 흙을 뒤집어썼지만, 그날 한낮부터 촬영현장 부근 개천에서 물고기 잡을 것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한밤중에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승욱/ 영화 <가문의 영광> <이것이 법이다>,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
자야 아빠_열살짜리 딸 자야와 늦둥이로 얻은 다섯달배기 아들이 마냥 귀한 아버지. 쌍굴에서 제정신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비극을 겪는다.

연극 <칠수와 만수> <돼지사냥> <거기> 등으로 이상우 감독과 오랜 인연을 맺어왔고 지금도 극단 차이무 단원인 김승욱은 “이상우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감독으로 데뷔한다고 했을 때 그저 모두들 뜻을 모았다”는 자연스러운 말로 <작은 연못>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어, 노근리 사건은 영화를 통하지 않는다면 이야기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도 바쁜 스케줄에서 빈틈을 찾아 이 영화에 출연하도록 만들었다. 결혼을 일찍했기 때문에 아들이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인 그는 아들과 딸을 나란히 데리고 <작은 연못>에 출연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매니저 역할. 눈매가 아버지와 꼭 닮은 아들은 학교에 가기 싫어 촬영장에 숨어 있다는 루머를 퍼뜨리며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문성근/ 연극 <한씨 연대기>, 영화 <오로라공주> <두뇌유희 프로젝트, 퍼즐>
문씨_부유한 지주 출신으로 읍내에 도매상도 가지고 있다. 상처했지만 스물세살 어린 도시 여인과 재혼해 마을 남자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다.

만난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젠 이상우 감독이 보기 싫다(웃음)”는 문성근은 이상우 감독을 만난 지 20년이 넘었다. 그 때문에 그는 극을 감각적으로 구상하고 템포도 빨랐던 이상우 감독이 영화에 어울린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체력이나 여러 가지 조건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현장은 즐겁고 아름답다는 것이 그의 소견. 그는 “실화를 드라마틱하게 각색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노근리 사건을 넘어 전쟁과 인간성 자체에 접근하려는 듯하다”는 것이 <작은 연못>의 장점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계속 고치고 있는 이상우 감독은 촌사람들 틈에서 아이보리색 양복을 입고 다니는 문씨에게 세 번째 아내를 짝지워줄까 고민 중이다.

민정기/ 연극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영화 <비단구두>
민씨 어른_막걸리와 장기를 낙으로 삼는 노인. 산으로 피난을 갈 때도, 미군이 남으로 가라기에 철길을 따라갈 때도, 흑염소를 데리고 다닌다.

서양화가로 알려진 민정기 화백은 이상우 감독이 대학에서 연극을 하던 시절부터 알아왔다. 여균동 감독의 <비단구두>에 북쪽에 있는 고향에 가고 싶어하는 치매 걸린 노인으로 출연했던 그는 우연하게도 한국전쟁이 소재인 영화에 연이어 출연하게 됐다. “전후 민간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손님>(황석영) 등으로 몇번 접했고, 노근리 사건은 언론을 통해 알았다. 다만 노근리 사건은 민족 내부의 반감이 빚은 <손님>과 달리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상우 감독은 원래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소재에 관심이 많으니 <작은 연못>은 그에게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작은 연못> 시나리오를 보며 극적인 사건이 없어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이상우 감독만이 가지고 있는 재치와 순발력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대연/ 영화 <올드보이> <여자, 정혜>,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
짱이 고모부_읍내에서 장사를 하다가 마을로 피난온다. 일본어를 잘하고 오지랖이 넓어 미군 통역과 의사소통하며 피난민 대열을 이끄는 역을 하게 된다.

극단 차이무 단원인 이대연은 “짧게는 3, 4일이 될 수도 있고 길어야 1주일 걸리는 촬영이니 MT 기분으로 오라던 이상우 감독에게 속아서(웃음)” 출연장면이 매우 많은 짱이 고모부 역을 맡게 됐다. 좀더 진지한 이유는 노근리 사건은 반드시 발언이 필요한 소재이므로 모두 모여서 한번 저질러보고 싶었다는 것. 그는 극적이기보다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작은 연못>의 시나리오를 보며 잠깐 불안을 느끼기도 했지만 촬영을 하다보니 이상우 감독이 리듬 같은 것을 가지게 된 듯하여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흰옷 입은 무리가 줄지어 간다”, “욱이가 달린다”처럼 간결하지만 풍성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지문의 느낌이 좋다는 그는 96년 연극 <비언소>를 하며 이상우 감독과 만났다.

최덕문/ 연극 <주머니 속의 돌>, 영화 <아홉살 인생> <남극일기>
김씨 집안 사위 병도_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남편. 그러나 아기를 제대로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다.

처음에 자신이 최씨 아들인 줄 알았던 최덕문은 최씨 아버지였던 배우가 영화 출연을 포기하면서 김씨 사위가 됐다. 극단 학전에서 차이무로 옮겨온 그는 일단은 이상우 감독에게 징집을 당했지만 “김씨 사위가 쌍굴에서 탈출하며 맞아야 했던 비극이 없었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근리 사건은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하는 소재인데다가 이런 시스템에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소망도 그의 출연에 커다란 몫을 했다. “오랫동안 형, 동생으로 지내온 배우들이고 태어날 때부터 보아왔던 아이들이어서” 연기만으로는 나오지 않을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있다는 그에게 그러다보면 혹여 느슨해지지는 않는지 묻자, 그는 “우리 다 느슨한데…”라고 답했다.

최종률/ 연극 <빈 방 있습니까> 연출, 영화 <살인의 추억> <청춘만화>
자야 할아버지_민씨 어른과 더불어 막걸리와 장기를 즐기는 노인. 돗자리와 솥단지를 짊어지고도 폭격을 피해 손녀 손을 붙들고 달리는 노익장을 발휘한다.

이상우 감독이 “저 형이 나를 배우로 연출했었거든”이라고 자꾸 말해 왠지 모를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던 최종률은 후배들이 연기 지시를 받거나 리허설을 하기 위해 모여 있는 모습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곤 했다. “모두가 가족 같아 카메라를 들이대기만 해도 예쁘다. 영화 현장은 점점 파편화되고 있지만, <작은 연못> 현장은 갈수록 정겨워진다.” 그 때문인지 언제나 흐뭇한 인상이었던 최종률은 영화 <작은 연못> 또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어린이들의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전쟁의 광기가 좋고, 전반부와 후반부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없다. 바꿔 말하면 모두가 주인공이다. 의도적으로 흥행을 하려고 하진 않지만 그런 조화에서 나오는 감동이 클 것이다.”

민복기/ 연극 <조통면옥> <돼지사냥> 연출, 영화 <강적> <사랑해, 말순씨>
민씨_노름을 좋아해서 부부싸움이 일상다반사. 1남1녀라는 이상적인 자녀 구조를 이루었지만 전쟁이 그 사소한 행복을 짓밟는다.

극단 차이무의 대표, 세무서에서 전화 오는 호칭으로는 ‘민 사장님’. 대학연극제의 심사위원이었던 이상우 감독에게 발탁된 민복기는 <작은 연못>이 “노근리 사건에 국한되기보다, 그저 어느 장소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지금과 같은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형식의 영화이므로 흥행은 불투명할지도 모르겠지만, 영화가 이럴 수도 있구나라는 시각만큼은” 심어줄 수 있으리라고. 피난장면 촬영이 있기 이틀 전 “어머니 한번 모시고 내려오라”는 이상우 감독의 전화를 받은 그는 뜻하지 않게 삼대가 한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공대 보내놨더니 연극하더라”면서도 막내아들이 밉지 않은 듯하던 어머니가 강씨 어머니로, 예쁜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예쁘던 아들 경민이가 본인의 아들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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