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야연>의 장쯔이
2006-09-26
글 : 김수경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양심을 지킨다는 게 나의 인생관이다

“대륙이 할리우드로 보낸 최고의 선물.” <타임>은 장쯔이를 그렇게 평했다. 장쯔이가 신작 <야연>과 함께 9월18일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그를 숙소 W호텔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 고된 무용 수업을 견디다 못해 베이징댄스아카데미를 도망치기도 했던 소녀는 할리우드를 놀라게 한 배우로 성장했고, 지금은 아시아 스크린을 호령하는 여신으로 거듭났다. 쿠키를 오물거리며 쾌활하게 웃는 장쯔이의 얼굴은 스물일곱살의 8년차 여배우보다는 <와호장룡>의 완을 연상시키는 소녀의 풋풋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야연>의 화면에 나타난 그는 어느 때보다 고혹적이고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자아낸다. 장이모, 리안, 왕가위, 로우예, 스즈키 세이준 등 당대의 거장들과 작업한 장쯔이는 대륙의 대표 흥행감독 펑샤오강의 영화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중국에서 촬영했다. 펑샤오강 감독과도 처음 작업인데 수많은 시나리오 중에 왜 <야연>을 택했는지 궁금하다.
=<야연>은 펑샤오강 감독과 함께 모험을 거는 심정으로 임한 영화다. 블랙코미디로 유명한 펑 감독도 이러한 비극은 처음 만드는 장르이고, 완이라는 복합적인 역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야연>을 선택했다. 그러한 새로운 두 시도가 만나면 색다른 화학작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펑 감독이 강렬한 비극을 찍으면 기존 영화들과 다른 작품이 창조되리라는 확신도 작용했다.

-당신이 연기한 황후 완은 기묘한 인물이다. 순수한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 듯하지만 권력과 야망을 쫓는 팜므파탈의 성격도 다층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속 인물은 대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예술적 형식을 빌려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며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야연>의 완은 그러한 캐릭터들과는 다르다. 한 방울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서 만드는 인물이기 때문에 다른 영화보다 많이 힘들었다. 감정의 축적은 혼자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완은 이제까지 당신이 연기한 어떤 캐릭터보다 성숙해 보인다.
=<야연>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배우로서는 정말 굉장히 행복했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했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이처럼 다양한 성격을 지닌 복합적 인물을 부여받기는 쉽지 않다. 다시 말해 배우로서 내밀하고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가 허락되는 무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무척 기뻤다. 또한 나라는 배우의 역량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겁이 났는데 내 성격과는 많이 다른 그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고민 때문이었다. 사실 <와호장룡> <연인>을 사람들이 볼 때는 액션에 비중을 두고 관람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영화들이 액션에만 치중하고 연기나 배우의 감정을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관객의 눈길은 액션에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야연>은 온전히 배우의 감정과 연기력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펑샤오강 감독은 현장에서 주연배우에게 거의 모든 재량을 주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당신은 이제까지 작업한 감독 중 그와 가장 호흡이 잘 맞다고 했다.
=그렇다. 펑 감독은 배우들에게 전체적인 톤과 분위기를 이야기하고는 나머지는 거의 제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현장에서 자유롭게 연기했다. 그렇다고 촬영속도나 판단이 느린 분은 아니다. 배우가 연기할 때 자신이 원하는 컷이 나오면 절대 더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 루완이 죽고 내가 그를 안고 슬프게 우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나는 그 장면에서 너무 몰입해서 촬영이 끝나는 순간 숨이 멎어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울었다. 그런데 모니터를 보니 그는 나의 옆모습을 찍었더라. 그래서 펑 감독에게 정면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는 측면에서도 몸의 떨림이나 표정으로 충분히 감정이 전달됐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런 연기는 한번도 제대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두번은 못한다고 말했다. 내가 다시 하겠다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그는 제안을 거절했다.

-<집으로 가는 길>부터 <야연>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필모그래피는 거장과의 작업으로 메워져 있다. 시나리오를 엄격히 고르는 편일 듯하다.
=굉장히 까다롭다. (웃음) 많은 사항을 꼼꼼히 살펴본다. 사람들이 후일 내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이건 뭐야? 저건 뭐야?”라고 의아해하기보다는 “이 영화에서는 뭘 했고, 저 작품에서는 이랬지”라고 작품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작품 목록을 갖고 싶다. 없어도 된다거나 쓰레기처럼 취급받는 영화가 그 속에 남지 않기를 바란다. 작품을 고를 때는 언제나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미리 판단한다. 어떤 경우는 더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영화라도 내게 맞지 않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는다. 그것이 앞으로도 더 노력하고 투쟁해야 얻을 수 있는 나의 목표다. 장쯔이가 출연한 영화를 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는 신뢰를 관객에게 보장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지금은 그러한 목적지를 향해 하나씩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무사>의 인터뷰에서 6세대 감독들과 작업하고 싶다는 의향을 드러냈고, 결국 로우예의 <자줏빛 나비>와 허우용의 <모리화>에 출연했다. 그런 영화들과 <게이샤의 추억> 같은 할리우드영화의 출연료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궁금하다.
=다른 예술 형식을 접하고 싶은 욕구는 늘 존재한다. 그래서 나이가 많건 적건 스타일이 다양한 감독과 작업하고 싶다. 그들은 각자의 예술 형식이 있기 때문에 배우로서 얻는 부분이 매우 많다. 사실 <게이샤의 추억>과 <모리화>의 개런티는 거의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게이샤의 추억>은 배우들에게 돈을 많이 준 게 아니라 미술과 세트에 대부분의 제작비를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웃음)

-11살 때부터 6년 동안 무용을 배웠다. 오전 5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이어진 훈련 때문에 “그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요즘은 그때가 지금 연기의 버팀목이 됐다고 느끼는 듯하다.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학교 규정이 그랬고 하기 싫어도 그 제도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힘들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과정이 현재의 강한 나를 만들어줬다. 영화에서 뭔가를 참아내고, 견뎌내는 힘을 길러줬다. 성룡, 이연걸 같은 분들은 무술을 했기 때문에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배우 생활을 한 지도 8년이 지났다. 지금 당신에게 배우란 어떤 의미인가.
=배우라는 두 글자는 나에게 세 가지 의미다. 배우라는 직업을 존중하고, 그 배우의 역할을 존중하고, 그 역할이 담긴 작품을 존중하는 것. 배우라는 존재의 의미는 책임(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직업을 가졌더라도 그가 일을 할 때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나의 인생관이다. 설령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양심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아무리 큰 일이라도 양심에 어긋나고 내가 잘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얼마 전 장이모 감독의 신작 <황금갑> 촬영현장을 방문했다더라. 아직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와 상의한다고 들었다.
=일단 감독님과는 평생의 친구로 남을 자신이 있다. 나를 발굴하고 키워주신 분이고 앞으로도 그와 영화를 같이 찍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감독과 배우나 사제지간을 넘어서 평생 친구로 남을 확신이 있다. 그분과 평생 친구로 지내는 일은 내게는 말로 표현하거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내년에 연출하는 <남경호겁>에 출연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직 결정된 건 하나도 없다. 지금 노출된 기사들은 조그만 풍문을 부풀려 써낸 것에 불과하다. 만약에 <남경호겁>에 출연한다면 좋겠지만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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