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무당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인 샤먼은, 신비로운 어감과는 달리 좀 싱거운 유래를 가졌다고 한다. 17세기 끝 무렵에 러시아를 여행하던 어느 네덜란드 상인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종교의식을 목격한다. 퉁구스족 박수무당이 벌이던 일종의 굿이라 짐작되는 의식이 서구 기독교도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 것이다. 상인의 ‘저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현지인들은 ‘저 사람이 누구냐?’는 말로 착각해 ‘샤먼’이라 답했다고 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원래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느니 만주어에서 시작했느니 유사한 단어를 증거로 여러 주장이 아직까지 엇갈리고 있지만, 한낱 일개 무당의 이름이 아시아 곳곳에서 수천년을 내려오는 거대한 종교현상을 대표하는 말인 샤머니즘의 어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해프닝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가진 무당에 대한 평소의 생각과 시선은 어떨까. 퍼포먼스 공연장에서 느끼는 것처럼 신기하고 재미있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게 바라보다가, 결국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기면서 뜨악한 마음을 가지고 자리를 뜨는 관중의 태도와 비슷하지 않을까. 아무리 종교적 관용을 가진 이들이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굿이란 행위와 무당이란 존재는 무척 낯선 풍경으로 다가온다. 왠지 모르게 무당은, 우리와 다른 존재처럼 여겨지며 심지어 사람이란 생각도 안 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당을 천민계급으로 규정해 박해하던 예전 시대도 아니고, 굿 자체도 전통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육성하는 시대인데도 말이다.
다큐멘터리 <사이에서>(이창재)는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과 숨기고 싶은 존재에 대한 98분짜리 영상탐구물이지만, 앞으로 9800년이 걸린다 해도 우리가 영원히 풀지 못할 어느 불가사의한 존재와 현상에 대한 감동의 드라마다. 이승의 온갖 한은 혼자서 다 껴안 듯한 주연배우(?) 만신 이해경과 세명의 운명적인 조연들(30년간 무병을 앓아오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50줄의 여인, 8살에 벌써 신이 내린 아이, 숙명과 운명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는 젊은 무녀). 그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그냥 풍물소리에 홀려 굿 구경하듯 극장을 찾은 관객을 신나게 들썩이게 하다가도 슬픔의 나락으로 쑥 빠뜨린다. “신 반, 인간 반”인 그들은 어느 대목인가는 작두에 올라타듯 신명나게 놀다가도, “무당 좋아서 하는 사람 하나도 없다. 팔자에 이미 너는 정해져 있어. 받아들여라, 그것이 네가 살길이다”라고 달래고 체념하며 때로는 원망의 절규를 부르짖는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영화관에서 벌이는 한바탕 영상 굿에 눈물콧물 다 흘렸건만 도서관에 다시 들러 영화 속의 주인공 만신 이해경이 직접 쓴 <혼의 소리, 몸의 소리>(솔과학 펴냄)를 찾아 읽었다.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그녀의 지난 세월을 고백한 수기는 전공자의 눈으로 보더라도 소중하고 진기한 자료였다. 작가 이외수는 “그녀의 남다른 신통력은, 그녀가 농사를 지어도 충분한 정도로 많이 흘렸다는 눈물의 대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격찬하기도 했지만, 영화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행간을 채워주었다.
무속인 스스로가 샤머니즘을 설명한 구절도 흥미로웠고(“샤머니즘은 자연과 영혼에 대한 숭배의식이다. 이를 바탕으로 점을 치고 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무당은 인간의 상식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인 미지의 세계를 이어주는 중개인으로서, 인간이 원하는 바를 성취해주기 위해 신명에게 간절히 기원하는 존재다”), 한국의 무속문화를 설명하는 구절도 눈에 띄었다(“역사 속에서 우리의 뿌리인 단군왕검도 무당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었던 고대의 왕들도 모두 샤먼이었다. 전통 무교는 외래 불교와 어우러지면서 절 안의 산신각 등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일제 치하에서는 토속신앙인 무교가 한국의 정신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금지되기도 했었다. 또한 해방 이후 서구문물이 밀려들면서 무당들은 구태의연한 비생산적인 존재로 낙인찍혀 정책적인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일부 변질된 무당들이 출현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속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냉철하게 깨닫고 있음도 느꼈으며(“무당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매개체이며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갈등까지도 해소해주는 그런 존재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한풀이를 해주고 서로의 이해와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 무당이었다. 죽은 이는 살아서 못 다한 한을 무당의 몸을 빌고 혀를 빌어 자식에게 또는 남편에게 일가친척들에게 한풀이를 하며 못다 한 이승의 삶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식구들은 넋을 달래서 이승과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고 극락세계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당이 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이었고 의무였던 것이다”), 인간과 신 사이에서 존재한 자신이 앞으로 나갈 길에 대해 밝히기도 했다(“내게 들어온다는 신인지 귀신이지 모르겠지만 정녕 피할 수 없이 이 길을 가야 한다면 올바르게 남에게 손가락질받지 않으며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천지신명님, 이제부터는 정말 신명에게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신명이 나를 택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신명의 뜻을 깨달아 신명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게끔 도와주세요”).
무당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사이에서>는 눈물겹게 감동적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전통문화의 일부이기에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원형성이나, 샤머니즘이라는 신묘한 종교현상이 가져다주는 원초적 자극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열락과 고통, 애정과 증오, 신과 인간,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가 어디 무당뿐이겠는가. 우리는 단지 한편에만 지금 있을 뿐이고, 그 사이를 건너 다른 편으로 어차피 가야 할 존재가 아니던가. 내 귀에는 영화에서 들었던 무가(巫歌)가 깊게 들어오고 있다.
“사바세계로 불리러 갈제, 나를 따라 오너라.
멀고도 험하고도 거치른 길이로다.
가다보면 또 넘어진다. 또 일어나라.
가다보면 깊은 산이 있고, 깊은 물이 있다,
옅은 물이 있다, 또 넘어진다.
신도 싫고 인간도 싫다.
혼자 있고 싶어진다.
멀리멀리 도망가고 싶다.
그때 되도 신명에게 의지해라.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없다.
신명에게 의지해라.
신명에게 의지해서 가다보면 또 넘어진다.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오뚝이처럼 팔딱 일어나라.
그럴 때 일수록 중심을 잡아라.
한 눈 팔지 말고, 한 길을 봐라.
그렇게 가다 보면
분명히도 내가 설 곳이 있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