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던 모진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그가 흘끔, 엿보였다.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클 것 같은 이 남자는 왜 내가 아닌 거니, 소리 지르는 대신 허리를 굽힌 채 상대의 눈동자를 응시하는 것으로 사랑을 고백했다. 대니얼 헤니는 그렇게 각인됐다. 비현실적이리만치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또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영혼의 아픔마저 헤아리려던 사려깊은 젊은 의사 헨리(<내 이름은 김삼순>)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우연 섞인 만남에 온몸이 휘청거리는 쾌활한 매니저 필립(<봄의 왈츠>),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미지의 남성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찍히’고 만 어리버리한 한국어학당의 외국인 학생, 수줍게 다가오는 낯선 사랑의 전조(올림푸스, LG싸이언, 빈폴 광고)였을 때도 비슷한 가면을 쓰고 있는 듯했다. 이제, 그런 그가 바뀌었다. “로빈은 하버드를 졸업한 지적이고 자신감 있는 인물이다. 부침이 많은 성격에 가끔씩은 화를 내고 가끔씩은 차분하며 가끔씩은 매력적이고 가끔씩은 정말 나쁜 놈이 되기도 한다. (웃음)” 경쟁에 익숙하지만 사랑 앞에 주저하는 기업인수합병 컨설팅 회사의 CEO. <MR. 로빈 꼬시기>의 ‘미스터 로빈’은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전에 없이 까다롭고 냉정한 이 캐릭터는, 대니얼 헤니가 이미지 변신을 하리라 단단히 각오했던 것은 아닐까 문득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번도 내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건 정말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진짜 세계가 아니고, 진짜 내가 아니다. 내가 로빈 역을 맡은 건 단순히 그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서일 뿐이다.”
두편의 드라마에 이은 스크린 도전. 이번에야말로 사랑을 쟁취하는 확실한 주연인데다 <봄의 왈츠>로 접어들기 전 이미 캐스팅이 확정됐다는 점까지 염두에 둔다면, 대니얼 헤니의 행보는 확연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월스트리트> <아메리칸 싸이코> 같은 영화들을 섭렵했다. 잠시 뉴욕에 머물 때에는 금융계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도서관을 찾기도 했다. 서른한두살가량인 로빈은 한국 나이로 스물일곱인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라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 목소리의 톤, 걷는 방법, 비즈니스 미팅에서 사람들을 다루는 자세 등. 내게 모두 생소한 것들이었다.” 무엇이든 흡수하는 그의 맹렬함은 드라마 속에서도 빛을 발하곤 했다. 영어 외에도 스페인어와 이탈리어에 능숙한 그는 한마디의 한국말도 뱉지 않았던 헨리에 이어 필립의 시절이 도래했을 때 불완전하나마 영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많이 좋았어요. 많이 행복했어요. 이제 괜찮아요. 이 반지 보면서 가끔 기억해줄래요.” 진심을 담은 필립의 몇 마디는 능숙한 아첨의 말보다 훨씬 자연스레 귓바퀴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 속에는 배우 스스로 동화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듯한, 묘한 울림이 있었다. “내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한다면, 그중 50%는 나 자신이다. 캐릭터는 내 안에서 우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니발 렉터를 연기했던 앤서니 홉킨스조차 자기 내면에서 렉터를 끄집어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 그 같은 분노를 지니고 있다. 정말이다. 내 속엔 비즈니스맨이 잠재돼 있을 거다. 플레이보이는 어떠냐고? 물론, 그것 역시 존재할 거다.”
단단하게 현실 위에 뿌리를 내린 사람. 대니얼 헤니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은 공고한 현실감각에서 비롯된다. “7살 무렵이었다. 당시 내겐 친구가 한명밖에 없었는데, 그는 나를 제외하곤 근방에서 유일한 마이너리티로 흑인이었다. 나는 그와 매일 농구 시합을 벌였고, 그렇게 농구를 시작하게 됐다.” 끈기와 인내심을 갖춘 검은 눈동자의 소유자는 좌절한 농구선수에서 성공한 모델로, 그리고 데뷔를 앞둔 영화배우로 쉼없이 성장해왔다. 이국적인 혼혈의 외모와 타국의 언어. 그럼에도 그가 이토록 친숙하게 와닿았던 까닭은 어머니의 유산일 듯한 그 눈동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행운아라는 것을 안다. 이건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이 사람들을 만나 운이 좋았다고 말하곤 한다. 누군가가 나를 돌보나보다. (웃음)” 디자이너 톰 포드는 바로 저 미소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양인”이라고 칭한 게 아닐까. “굿럭”(good luck)이라는 기분 좋은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뜬 뒤에도 대니얼 헤니의 온기는 오래도록 공기 속에 녹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