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루저들의 사연 들려주는 <최곤의 정오의 희망곡> [1]
2006-09-29
글 : 장미

최곤이 돌아왔다. 터프함이 묻어나는 검은 가죽 잠바, 단추를 서너 개 풀어 젖힌 강렬한 색상의 셔츠, 자연스레 분출되는 순도 100%의 가오를 온몸에 휘감고서. 로커 중의 로커 최곤은 이른바 ‘가수왕’이라는 왕좌에 등극한 당대 최고의 가수였다. 문제는 활짝 폈던 화려한 시절이 이미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지난 지 오래라는 것.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기억도 가물가물한 쌍팔년도 가수왕을 어느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럼에도 가엾은 88년도 가수왕은 도통 현실을 직시하려 들지 않는다. 거기다 성질은 또 얼마나 고약한지 툭 하면 일을 저질러대는데… 음주운전에, 폭행에, 대마초 흡입까지 안 쳐본 사건, 사고가 없을 정도. 여기서 끝이냐고? 훗,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부잣집 마나님처럼 고이 살아온 탓에 생활력은 또 얼마나 형편없는지, “고기가 없으면 빵을 먹으라지~”랬다던 모 여왕의 경지가 남부럽지 않을 수준. 매니저가 없으면 혼자서 담배도 못 피우는데다 자장면까지 제 손으로 비벼 먹지 못하는 정도랜다.

사건은 불같은 성격의 최곤이 주먹을 날리며 시작된다. 최곤처럼 늙수그레한 매니저 박민수는 합의금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지금껏 꽤 큰 액수의 돈을 꿔줘놓고 한푼도 돌려받지 못한 가수 후배들은 박민수의 그림자만 봐도 줄행랑 치기 일쑤. 하지만 불굴의 의지를 지닌 우리의 박민수, 이토록 징한 절망에서 마지막 희망을 물고 온다. 바로 모 방송국 김 국장을 만나 돈을 융통할 방도를 찾아낸 것. 그리하여 길을 떠나게 된 최곤, 그 길의 목적지는 영월, 미션은 영월방송국 DJ란다. 불만을 주워섬기는 그의 입술은 튀어나올만큼 튀어나왔지만 그래도 감옥행보단 낫지 않겠수? 88년도 가수왕 최곤, 아니 우리 시대의 루저 최곤.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눈물겨운 루저의 삶을 살아왔는지, 비슷한 신세의 루저들은 또 어떤 사연을 전해왔는지, <최곤의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한번 엿보지 않겠소.

<라디오 스타>의 최곤

“여기는 영월, Young World입니다”

<라디오 스타>

청취자 여러분, 가만히 귀기울여보십쇼. 창문을 두드리는 나지막한 빗소리가 들리십니까? 네, 지금 이곳 영월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프로그램 시작하기 전에 강 PD며 민수 형이 소란을 떨어대는 중에도 비 내리는 바깥 경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더랬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가슴이 짠해지는 애절한 기분이 몰려오더군요. 곧 스산한 가을이 이 땅을 찾을 모양입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다들 어깨를 움츠리고 종종걸음 치고 있진 않으신가요. 이렇게 울적하니 옛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군요.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제 소싯적 얘길 좀 해드리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습니다만 전 언더그라운드 밴드 소속이었습니다. 제 목소리가 얼마나 죽여줬는지 노래에 취한 여고생들이 그 마력에 못 이겨 실신하는 사고도 잦았습니다. 아, 정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기가 많았던들 밴드 생활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었죠. 그저 서럽고 힘들어도 젊음에 취해, 음악에 취해 살았더랬습니다. 그러던 중 민수 형이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제 번쩍이는 카리스마에 반한 형은 제게 조용필처럼 만들어주겠다 하더군요. 처음에는 형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원래 로커란 것이 마이너한 존재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당시 제겐 성공하려는 열망 따윈 없었습니다. 형의 끈질긴 설득에도 끝내 모른 척 뒤돌아섰다면, 저는 지금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요?

한동안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민수 형은 그때도 저렇게 월수가방을 꼭 껴안고 다녔지만 지금보단 훨씬 얼굴이 좋았더랬습니다. 어디든 저를 부르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그렇게 거드름 피울만도 했었죠. 솟아오르던 인기를 만끽하던 88년도, 마침내 저는 가수왕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인기야 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 말을 아십니까? 달은 차고 나면 기운다는 말 말입니다. 제 인생이 딱 그랬습니다. 더이상 올라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내려오는 일만 남았더군요. 그동안의 성공에 취해 있던 저는 그 와중에도 기고만장했더랬습니다. 쉽게 재기할 수 있을 거라 믿었거든요. 넓은 체육관을 가득 메웠던 여고생들이 점점 콘서트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죠. 콘서트를 열기는커녕 TV에 나가기조차 어려워졌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세상 일이란 다 그렇더군요. 그래도 저는 믿었습니다. 마법의 사다리가 저를 저 위로 실어나를 거라구요. 하지만 모든 일이 기대대로 되지 않았고 그동안 분출되지 못했던 저의 분노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주위 물건을 부숴댔지요. 나중에는 대마초에까지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에는 세상만사를 모두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찰나랍니다. 마치 인기란 것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서 영월에 왔습니다. 영월, Young World.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곳으로 안성맞춤 아닐까요? 예전처럼 노래를 부르진 않지만 라디오 DJ 일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제부턴 제 방송을 영월에서만 트는 게 아니라 전국방송으로 쏜다더군요. 그래도 가끔씩 울적한 생각이 들 때면 저는 이스터리버, 아니 동강 밴드의 공연을 슬쩍 보러 가기도 합니다. 장훈이를 비롯한 후배 가수들이 이빨 빠진 호랑이인 저를 저버렸다지만, 동강 밴드 얘네들은 시도 때도 없이 저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내거든요. 아, 그만하고 전화나 받으라구? 저 밖에서 강 PD가 전화 연결을 하겠다고, 신세한탄은 이만 접으라는군요. 하여간 능력없는 PD들이 꼭 전화 연결을 좋아한단 말야. 강 PD 말론 모두 제 팬이며 저만큼 기구한 사연을 지닌 사람이랍니다. 그럼 여기서 전화를 연결하겠습니다. 아, 여보세요?

another loser_매니저 박민수

최곤의 매니저. 최곤 때문에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으며 그의 성공을 위해 손수 전단지를 붙이고 현수막을 거는 등 발로 뛰며 일했음. 청록다방 김양을 최곤의 팬으로 만든 것도 그의 수완 덕분. 가끔 청록다방에 들려 쌍화차를 마시곤 한다고 함. 스타 팩토리 사장의 협박으로 잠시 최곤의 곁을 떠났지만 최곤의 통사정에 눈물을 흘리며 다시 돌아옴. 한때 아내와 함께 지하철역 앞에서 김밥 장사를 한 적이 있음. 최곤 팬클럽 회장이었던 여인을 꾀어 결혼에 이르렀지만 정작 최곤과 한방(!?)을 쓰는 사이임.

<스승의 은혜>의 이세호

“가난을 일깨워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스승의 은혜>

안녕하세요. 저는 이세호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번에 연결되다니 이 프로그램 시청자가 없긴 없나보군요. 하하. 어쨌거나 술도 좀 마셨고 기분도 꿀꿀한데 이 기회를 빌려 제 얘길 한번 해볼까 합니다. 사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시골로 가야 하는데 말이죠. 그게 영 안 내킨다 이 말씀입니다. 동창회라는 게 좋은 말만 오가는 자리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차가 뭐고, 집은 어떻고, 요번에 승진을 했니 하면서 자신의 성공을 거들먹거리는 자리이기도 하니까요. 하긴 그러고 보니 내 친구들 중에는 그렇게 목에 힘줄 만한 놈이 하나도 없군요. 큭큭. 다 저랑 비슷한 신세의 불쌍한 인간들이죠. 아, 빼먹을 뻔했군요. 사실 동창회 가는 게 가장 안 내키는 이유는, 제기랄, 바로 그곳에 빌어먹을 담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담임은 잇속에 밝은 전형적인 비리 교사였죠.

사실 어렸을 때 우리 집이 좀 가난했더랬습니다. 그걸 부끄럽게 여기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죠. 하지만 반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모욕을 당하게 되니 어린 마음에도 불끈 솟아오르는 분노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죠. 딸꾹. 큭큭. 은영이가 술은 그만하고 낮잠이나 한숨 자라는군요. 은영이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곧 저와 결혼할 여자랍니다. 생각해보니 은영이와 저 사이에는 가난한 집 자식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군요. 아, 물론 현재도 찢어지게 가난한 건 아니지만, 어떤 상처는 평생 우리를 놓아주지 않고 괴롭힌답니다. 그렇담 이번 동창회에 참석해서 고결한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는 건 어떻겠냐구요? 큭큭. 그럴까요? 한번 해볼까요?

another loser_이세호의 동창들

조순희: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놀림받으며 자라 성형수술 중독자가 됨. 수술 부작용 때문에 특히 눈 부위는 눈뜨고 못 봐줄 정도여서 낮이나 밤이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님. 콤플렉스 때문에 달라붙는 붉은색 원피스 등 튀는 옷만 골라 입음.

허달봉: 교사의 과도한 체벌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됨. 덕분에 운동선수가 되고픈 꿈마저 접어야 했던 비운의 인물. 한때 운동을 꽤 잘했다고 하지만, 현재 지닌 육중한 체격에서는 당시의 영광을 짐작하기 어려움. 입에 풀칠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게 사는 형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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