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추모, <괴물> <살인의 추억> <비트>의 이강산 조명감독 별세
2006-10-10
글 : 오정연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당신이 있었기에 한국영화가 ‘빛’났습니다

이강산 조명감독이 지난 9월28일 세상을 떠났다. 지병이었던 간경화로 지난해 간 이식수술을 받았으나 최근 병세가 악화됐고 결국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향년 52살. 밴쿠버로 출국하려던 봉준호 감독이 9월28일 점심 강남성모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부랴부랴 방문했고, 영화 준비로 중국에 있던 김성수 감독과 조민환 나비픽처스 대표가 당일로 귀국했다. 연출부로 참여했던 <닥터 K> 촬영장에서 아버지뻘 되는 이강산 조명감독의 팔짱을 끼고 현장을 누볐다는 류승완 감독은 언론에 부고 소식을 알려왔다.

배우도 감독도 촬영감독도 아닌 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지껏 한국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던 빛을 나열해야 한다. 강렬한 음영대비와 극단적인 색감(<비트>), 암울한 청춘의 공기를 드러내는 사실적인 무드(<태양은 없다>), 미세한 눈빛과 널찍한 채석장을 아우르는 빛의 컨트롤(<살인의 추억>) 등이 그것이다. 혹은 단편 <비명도시>부터 <괴물>까지, 한국영화의 새로운 이미지를 선보인 김형구 촬영감독과 13년간 이어진 인연을 말하는 것도 좋겠다. ‘충무로 최고의 파트너십’을 유지했던 짝패의 부고 소식에도 차기작 때문에 현장을 떠날 수 없었던 김형구 촬영감독은 “한 작품에 대해 함께 논의한 계획을 일관성있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그걸 표현하는 것은 조명감독인데, 그는 그걸 해내는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1979년 조명 조수로 영화계에 들어선 이강산 조명감독은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입봉했다. 촬영‘감독’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 촬영감독은 원하는 밝기를 확보하기만 하면 조명감독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없었다.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김형구 촬영감독이 조수 생활을 거치지 않은 채 <비트>의 촬영을 맡은 것이 문제가 되어 조명감독을 구하기 어려워진 상황. 단편 <비명도시>를 통해 김성수 감독, 김형구 촬영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이강산 조명감독만이 파격적인 조명에 동의하고 이를 구현해 줄 유일한 인물이었다. 조수들조차 “이런 조명이 어딨냐”며 반발했지만, 그는 그들을 설득시켰다. 자신의 영역을 기계적으로 고집하기보다는 영화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고민하고 이를 실현하는 길을 택했다. 한국형 DP 시스템(촬영감독이 조명까지 콘트롤하며 화면의 비주얼 전체를 책임지는 시스템)은 그가 있어 가능했던 셈이다.

김형구 촬영감독은 현재 이강산 조명감독 밑에서 일했던 정영민 조명감독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잘 알고 믿음이 간다”며 말문을 연 김형구 촬영감독은 “본인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는 조명감독이 있는가 하면 그분은 조수들에게 일을 많이 주고 스스로 의견을 내도록 유도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다들 일을 빨리 배우고 비교적 빨리 데뷔를 한다”고 설명한다. 1989년부터 <봄날은 간다>까지 이강산 조명감독에게 일을 배운 양우상 조명감독은 “친형이고 삼촌이고 아버지였다. 다른 조명감독들이 나에게 조명을 가르쳤다면 그분은 나에게 인생을 알려줬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도 현장에서 가장 밑에 있는 막내 스탭들을 가장 많이 보살피고 대화하려 애쓴다. ‘형’의 가르침 덕분이다.

<살인의 추억> 현장에서 생일을 맞았던 이강산 조명감독. 봉준호 감독이 직접 찍었다.

“남들 필요한 건 다 챙겨주면서 왜 정작 자기 몸을 못 챙겨….” <베를린 리포트> 촬영 당시 연출부와 조명부로 이강산 조명감독을 알게 됐고 모든 연출작을 그와 함께한 김성수 감독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조명감독으로서 ‘큰 별이 졌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법도 하건만, 지인들에게 그는 빛나는 별이 아닌, 따뜻한 불이었다. 현장에서 스탭들이 배고프면 쥐포며 오징어를 구워주고, 동료며 후배들의 짜증까지 받아주던 그는 다른 부서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나서서 뚝딱뚝딱 해결하느라 현장에서 사운드 NG를 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사람들은 감독이며 배우, 까마득한 막내 스탭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고른 빛을 나눠주며 솔선수범하던 그가 진심으로 화내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증언한다. “이제 내 영화는 누가 빛을 밝히냐”며 허탈해하던 김성수 감독이 간곡하게 부탁한다. “형의 두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정말 성실하고 훌륭한 사람이었음을 알았으면 한다”고. 사람들이 약속처럼 반복하는 말을 덧붙이자면 이강산 조명감독은 “일하는 것이 마음 씀씀이랑 똑같았던 사람”이다. 쉽게 들을 수 없는 소박한 찬사. 적어도 그에게, 그 이상 어울리는 설명은 없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