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밥 딜런의 새 앨범 <모던 타임스>의 다섯 가지 수수께끼
2006-10-20
글 : 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웹진 weiv 기획실장)

밥 딜런(Bob Dylan), 혹은 모던 음악의 종언

2000년대도 중반을 넘어선 시점에서 “밥 딜런의 새 앨범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쨌거나 “발매 첫주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다”는 뉴스, 이른바 ‘핫 숏 데뷔’(Hot Shot Debut)라는 뉴스 때문에 노(老)대가의 신작을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밥 딜런의 디스코그래피를 꿰고 있는 사람이라면 밥 딜런의 앨범이 ‘1위’를 차지한 것은 1976년 <Desire> 이후 30년 만의 ‘경사’다. 음악 아티스트에게 ‘빌보드 1위’만큼 상징적인 가치가 있을까. 그만큼 말도 무성하다. 그 무성한 말 잔치 속으로 들어가보자.

#1 아메리칸 히어로, 그 부활의 (미)완성

밥 딜런의 32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Modern Times>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작품이다. 65살의 밥 딜런은 그동안 무척 바쁘게 지냈다. 쉬지 않고 순회공연을 다녔고, 위성 라디오 XM에서 DJ를 맡았고, 두편의 영화에 관여했다. 무엇보다 2004년에는 세권으로 예정된 자서전 <Chronicles>의 첫권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사건, 부연하면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전기기타를 들고 올라갔다가 “유다!”라는 야유를 들었던 사건’에 대한 그의 소회에 대해서는 ‘다음 권을 기대하시라’는 식으로 침묵했다. 물론 2005년 마틴 스코시즈가 메가폰을 잡은 다큐멘터리영화 <No Direction Home>이 그의 침묵을 어느 정도 보상해주었다. 물론 ‘어느 정도’이었을 뿐이다. 미발표 레코딩과 라이브 레코딩으로 꾸며진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처럼 그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노년의 밥 딜런은 1997년 <Time out of Mind>를 발표한 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여론의 계속적인 관심 대상이었다. 로큰롤 이전의 음악 형식들(특히 블루스)로 돌아가서 인간의 유한성과 세상에 대한 실망감을 담은 슬프고 음울한 노래들은 그에게 ‘제3의 전성기’를 안겨주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환갑을 맞이한 2001년에 발표한 <Love and Theft>는 “나는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song and dance man)이라는 본인의 표현처럼 유쾌하고 흥겨운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Modern Times>를 둘러싼 미디어 하이프가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노년의 거장의 ‘3부작(trilogy)의 완성편’이라는 식의 문구가 이전에 발표된 두종의 앨범의 재고를 처분하기 위한 음악산업의 홍보 문구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야박할 것 같다. 어쨌거나 8월 말 앨범이 발표되자 <롤링 스톤>과 <언 컷>(Uncut)은 만점을 주면서 “걸작”이라는 칭호를 아끼지 않았다. 몇몇 저널들과 평론가들은 다소 유보조건을 달았지만, 평론가들의 평점을 추적하는 사이트인 Metacritic.com에 의하면 이 앨범에 대한 평균 평점은 8.9점이다. 취향 까다로운 젊은 애들이 운영하는 피치포크(pitchfork)마저 8.3점이나 주었으니, 대놓고 “이번 앨범은 범작이다”라고 말할 용기를 갖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밥 딜런의 팬’, 즉 밥 딜런의 작품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이번 신작 음악이 귀에 쏙 들어온다”라고 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이는 역으로 말한다면, ‘밥 딜런의 팬들’이 꽤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숭배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람들을 친절하게 배려하지 않는 것, 이게 아메리칸 히어로의 오래된 신화다. 밥 딜런은 이렇게 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음악 속으로 들어가보자.

#2 밥 딜런의 뿌리들

‘음악평론가의 앨범 리뷰’식으로 말한다면, <Modern Times>는 몇개의 상이한 음악 스타일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하나는 블루스, 힐빌리, 홍키 통키, 로커빌리 등이고 다른 하나는 스윙시대 혹은 그 이전 시대의 팝 발라드이고, 마지막은 포크나 컨트리의 유구한 곡조들이다. 삼자 사이의 거리는 미시시피 델타와 뉴욕 맨해튼과 애팔래치아 산지만큼이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다.

이것으로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것 같은 밴드가 역시 절친한 프로듀서의 감독하에 만들어낸 사운드는 스튜디오를 클럽이나 바처럼 활용하여 원초적인 질감을 만들어내고 있다(사족. 잭 프로스트라는 프로듀서는 밥 딜런의 또 하나의 ‘예명’이다). 그래서 장르와 스타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들이 각각 분화되기 이전의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무의미하다.

말하자면 밥 딜런이 탐사하고 있는 뿌리들(roots)은 장르라는 가지로 서로 나뉘고 각각 꽃을 피우기 전에는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음악의 현대(modern times)란 아직 이렇게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 그렇지만 동시에 분화가 이루어지려는 순간을 말한다(참고로 밥 딜런의 음악적 뿌리들에 대해서는 <Mojo>(2006년 8월20일자)가 친절하게도 <Modern Times>의 발매일에 맞춰 부록으로 만든 컴필레이션 CD <The Roots of Bob Dylan>을 참고하기 바란다).

#3 밥 딜런의 현대(Modern Times)

밥 딜런의 <Modern Times>에는 ‘모던 타임스’라는 용어가 자동연상시키는 찰리 채플린의 날카로운 사회비판은 등장하지 않는다(만약 찰리 채플린과 똑같은 메시지를 담았다면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그에게 ‘현대’란 아메리카에 기계화, 도시화, 산업화가 시작될 찰나, 그래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이동할 때를 말한다. 카우보이가 연주하는 듯한 <Thunder on the Mountain>이 “북부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올 거야”라는 세속적 다짐으로 끝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1930년대의 크루너(crooner)처럼 노래 부르는 스윙 발라드 <When the Deal Goes Down>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스칼렛 요한슨의 고전적인 여성미가 ‘모던 타임스’라는 시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몇몇 곡에서 딜런은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은 듯 행복감에 도취되기도 한다. <Thunder in the Mountain>에서는 신세대 디바 알리샤 키스에 대한 (아마도 애증의) 감정을 표출하고, <Rollin’ and Tumblin’>에서는 “어떤 젊은 게으름뱅이 창녀의 매력이 내 머리의 시름을 잊게 만들지”라고 노래한다. 그래서 “시간에 대해 지불했고, 나는 새롭고 좋아”(I paid my time and now I’m good as new)라는 만족스러움을 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낙관적이기만 하다면 딜런이 아니다. “너무 힘들어, 나는 이 꿈을 견딜 수 없어”(<Rollin’ and Tumblin’>)라는 절망, “이 사람들 몇몇은 당신을 최대한 발가벗겨버릴 거야”(<The Levee’s Gonna Break>)라는 두려움,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명되었지”(<Nettie Moore>)라는 체념, 그리고 심지어 “프롤레타리아의 구매력이 떨어졌어/ 돈은 얇고 약해졌지”(<Working Man’s Blues #2>)라는 푸념 등등. 이때 밥 딜런의 ‘모던 타임스’는 먼 기억이 아니라 통시적이 된다. 달리 말해 특정 순간에 형성된 사회적 원리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조금 더 예민한 사람이라면 ‘9·11’과 ‘카트리나’에 대해 은유적으로 발언한 부분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불편한 감정은 어두운 무드의 마지막 곡 <Ain’t Talking>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떤 ‘신비한 정원’에서 정원사는 사라지고 꽃은 꺾여서 뒹굴어 다니고 누군가가 뒤에서 뒤통수를 내려친다. 화자는 심장이 불타고 원수심에 가득 차서 “용서없다”(no mercy)라고 다짐한다. 이런 순간 밥 딜런의 ‘모던 타임스’는 채플린의 영화만큼이나 잔혹하다.

#4 밥 딜런, 안티모던 혹은 프리모던

음반 표지에는 대도시 고층 빌딩의 불빛과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가 나오지만 표지 사진은 단색이다. 이 사진은 1947년 테드 크로너가 촬영한 작품으로 <Taxi, New York at Night>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당시에는 모던한 작품이었을지 몰라도, 현 시점으로 불러오니 밥 딜런의 가사와 음악만큼이나 묵시록적이다. 그런데 이 사진은 1997년 인디 밴드 루나가 그들의 싱글 <Hedgehog/23 Minutes in Brussels>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다. 앨범 제목만큼이나 표지도 ‘재활용’을 한 셈이다. 딜런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재활용이 음반 표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Rollin’ and Tumblin’>은 유명한 블루스곡으로 머디 워터스가 녹음한 곡이고, <Nettie Moore>는 19세기의 유명한 ‘노예 발라드’(slave ballad)고, <The Levee’s Gonna Break>는 멤피스 미니가 연주하고 레드 제플린도 한번 리메이크했던 곡(정확한 제목은 <When the Levee Breaks>)이다. 어떤 곡의 제목을 바꾸어서 활용한 경우도 있다. <Someday Baby>는 머디 워터스의 <Trouble No More>과 <Beyond the Horizons>는 1950년대 플래터스의 <Red Sails in the Sunset> 곡이다. <Thunder on the Mountain>이 척 베리의 <Johny B. Goode>과 유사하다는 점은 ‘혐의’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린다. 그래서 다른 혐의들에 대해서도 생략한다.

하지만 이런 곡들에 대해 ‘표절’ 시비를 거는 일은 자제하는 듯한 분위기가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 같다. ‘딜런의 창조성이 고갈되었다’는 비난보다는 ‘제목, 곡조, 리프 그리고 후렴구의 초반부를 빌려오고 가사 일부를 사용하고 가사 대부분을 새로 덧붙였다’는 정도의 신중한 표현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이렇게 대량으로 표절이 이루어졌다면 저자 자신이 그걸 모르고 했다고 생각하기가 머쓱해진다. 게다가 이런 ‘천재의 절도’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이미 <Love and Theft>의 가사와 음악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시비가 있었고, <뉴욕 타임스>는 “딜런의 표절 혹은 하나의 문화적 콜라주”(Plagiarism in Dylan, or a Cultural Collage?)라는 기사(2003년 7월12일자)를 통해 방어막을 쳐놓았다.

딜런은 이 모든 사태를 보면서 킬킬거리고 즐기고 있는가. <Modern Times> 이전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으며, 자신의 역할이란 전승돼오는 이야기들을 다시 해석하고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해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가 대답을 준비할 필요도 없이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들에게 특유의 시니컬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우리는 “밥 딜런 작사·작곡”(Words and Music by Bod Dylan)이라는 문구의 의미를 새로운 개념으로 해석해야만 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여기서 그가 <롤링 스톤>과 했던 인터뷰에서 지난 20년 동안의 스튜디오 레코딩 테크닉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창작 에너지가 고갈된 채 완벽한 사운드를 갖추고 있는 당대 음악에 대해 이제 창조의 천재(creative genius)를 우상화했던 시대마저 종언을 고했음을 몸소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을까. 그런데 이것 또한 또 다른 신화와 전설이고 그가 낸 수수께끼의 항목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은 여기까지…. 분명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이 앨범이 신화와 전설을 만드는 일이 직업이었던 사람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5 세대의 종언 혹은 세상의 종언

2006년은 베이비 붐 세대가 60살을 맞이한 해라고 한다. 하나의 순환의 종언인가 세계의 종언인가. 어쨌든 이 특별한 기년(紀年)에 그 세대의 아이콘이었던 아메리칸 싱어송라이터 세명의 행보를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닐 영은 여전히 로킹(Keep on Rocking)하면서 “대통령을 탄핵하자”(Let’s Impeach The President)라고 선동했고, 폴 사이먼은 경악(surprise)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동북부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어?”(How Can You Live In The Northeast?)라는 두려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딜런은 언제나 한수 위인 것 같다. 그는 지금 여기를 “최후의 오지(outback)이고 세계의 종언”이라고 말하면서 앨범을 마무리한다. 아마도 그는 “세계의 종언에 다다른 우리의 기분은 어떤가?”(How does it feel to be at the world’s end?)라고 묻는 것 같다. 실제로 현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언,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팝 음악계의 종언인 것 같다. 만약 그 세계가 종언되지 않았다면, 이 앨범에 대해 “창조성을 고갈당한 노년 아티스트의 기성곡 모작 모음집”이라는 리뷰가 나와야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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