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 소리가 울려퍼진다. 화면이 서서히 밝아지면 변기에 앉은 여자가 보인다. 그녀는 고통을 느끼고 있나, 쾌감을 느끼고 있나. “배설에는 눈물, 콧물, 땀, 대소변, 섹스 같은 게 있을 수 있다. 반면 사랑, 말, 언어는 배설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배설의 경계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에서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 <배설의 경계>를 연출한 신재영 감독은 말한다. 고통과 쾌감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작 부분은 자못 충격적이다. 강렬한 영상은 계속된다. 신음하던 여자는 공중 화장실에서 손님을 받는 창녀다. 그녀는 어떤 남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다 한 손님이 화장실을 찾는다. 그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자고 하지만 여자는 거절한다. 남자는 가차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여자의 다리 사이에서 하염없이 핏물이 흘러내린다. 대사 대신 내레이션과 민감한 소리만이 흐르는 흑백 스크린 위에는 나체, 사랑, 폭력이 거침없이 담긴다.
“시야에 대한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흑백으로 찍었을 뿐 아니라 화면 크기도 16:1에서 1.85:1로 서서히 바뀌도록 했다. 보면 툭툭 내려오는 게 느껴질 거다. 쉽게 말해 관객의 시선에 사이즈 변화를 주려고 했다.” 영상에 공을 들이다보니 대사없이도 충분히 의미심장한 영화가 탄생했다. 그중에서도 꽃의 의미는 각별해 보인다. 낮은 담장에 그려진 꽃은 여자의 등에 새겨진 꽃으로 옮아가고 마침내 여자의 핏속에서 피어난다. 작은 꽃이 묘하게 흔들리는 마지막 장면은 유독 인상에 남는다. “CG 작업으로 그린 거다. 신명교라는 친구가 CG 작업을 도맡아 해줬다. 들판에 변기가 놓여 있는 장면도 그 친구 손을 거쳤다. 갈대가 군데군데 비어 있는 부분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서 채웠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라겠지만 신재영 감독은 남자다. “다들 여성 감독인 줄 알더라. 연출에선 조금 섬세한 면이 있다.” 여주인공의 심리를 눈에 보일 듯 그려낸 이 영화는 그가 구상한 배설 시리즈 3부작 중 2부에 해당한다. “처음 찍은 영화가 1부인 <배설과 삶>이다. 3부는 <배설의 본능>인데 12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거다. 그때 쓸 특별한 형태의 카메라를 제작 중이다. 관객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 연출의 시선, 배우의 시선 등에 대해 탐구하려고 한다.” 3부작의 완성을 눈앞에 둔 그는 녹록지 않은 경력의 소유자다. 영화연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경민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서울예대 영화연출과에 입학했다. 신재인 감독의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 스탭으로 참여했으며 방송국과 홍보영화사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그 사이 완성한 단편영화는 7편이다.
“이른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꿈이 많았다. 그의 얘길 들으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야무진 걸음을 걷고 있는 현재와는 어울리지 않는 과거다. 지금의 그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 행복을 느낄 듯하므로. “첫 영화를 찍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하루에 150컷을 찍었는데 결국 힘들게 해냈다.” 당시 3일을 꼬박 새는 강행군에도 스탭들은 불가능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런 스탭들에게 그는 각별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쫑파티를 하고 스탭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줄 때 가장 기분이 좋다.” 연이은 대학 낙방. 그럼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듯 <배설의 경계> 역시 어렵게 완성된 꽃이다. “제작비가 50만원으로 정해진 상태였다. 계획대로 추친력있게 가야 했기에 시간 싸움이 제일 힘들었다.” 이번에 받은 100만원의 상금은 차기작을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순수하게 영화 제작을 위해 쓰고 싶다. 이전 스탭들 만나서 근사하게 식사도 하고.” 그 자리에선 차기작에 대한 열정적인 토론이 밤을 잊은 채 이어지리라.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신재영 감독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