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29일 오후 5시55분,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옆 삼풍백화점이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성수대교가 이미 붕괴했고, 대구 지하철 폭발사고가 기다리고 있던 즈음이니 한국형 성장의 부실이 낳은 홍역을 마치 테러라도 당하듯 앓아나가던 시절이다. 삼풍의 붕괴는 서울에서도 잘 나가는 동네에서, 잘 나가는 백화점이 빚은 사건이라 의미심장했다. <가을로>는 아름다운 로드무비이자 애잔한 멜로임에도 그 미스터리같은 현실의 사고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길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는 로드무비의 본성, 상처와 치유와 행복의 삼박자가 어울리는 멜로의 구성을 구사하면서도 유희적 상상이 아닌 현실의 위로와 비판을 동시에 수행한다. 자극적인 혹은 비약적인 소재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볼 틈이 없다.
<가을로>의 출발은 상실이다. 사법고시에 합격해 연수생활을 하던 현우(유지태)는 결혼을 코앞에 두고 삼풍이 무너지면서 사라진 민주(김지수) 때문에 사랑과 웃음을 잃고 투박하고 차가운 검사가 된다. 권력형 비리 앞에 잠시 무릎 끓게 된 현우는 아주 늦게 전달된 민주의 노트를 펴들고 그녀가 기록하고 안내하는 곳으로 가을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곳곳에서 수수께끼같은 여자 세진(엄지원)과 마주친다. 민주는 이미 사라진 인물이건만 민주, 현우, 세진은 미스터리같은 여행을 아름답게 교차해나간다. 공간과 인물의 입체적 구성에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배치하는 시간의 마술까지. <가을로>가 멜로로서 빛을 발하는 건 그 미스터리의 끝이다. 비극적으로 사라진 연인 위로 새로운 미래를 빚어내는 사랑을 슬며시 얹혀내는 호흡은 극적인 동시에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멜로의 감상성으로 현실적인 희망을 맛보는 느낌은 분명 새로운 것이다.
<가을로>는 여행 충동을 자극하는 로드무비다. 봄, 가을, 겨울의 세 계절과 유지태, 김지수, 엄지원의 세 인물이 현란하면서도 정교한 로드무비를 그려간다. 소쇄원, 동강, 불영사, 동해안 7번 국도 등 이미 낯익은 공간과 어울리는 인물과 이야기는 이 여행지들에게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매혹적인 자연 그 자체와 자연과 한 몸이 되도록 설계된 집과 사찰 등은 이 영화의 비극적 소재를 에둘러 비판하고 대비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번쩍거리는 부로 쌓아올린 거대한 건축물이 잔인하게 앗아간 사랑의 상처를 은은한 자연 속에서 치유받는 과정은 의도 했든 아니든 대단히 시사적이며 정치적이다. 산과 바다를 떠다니던 민주는 사라져가는 자연을 안타까워했고, 현우에 대한 사랑을 그 자연에 품었으며, 비극적으로 그 자연 속으로 되돌아갔다. 민주의 그런 사랑이 남겨진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맺어주는 건 자칫 부담스런 교훈극으로 흐를 수 있다. 하물며 이름이 민주라니. 그 함정을 ‘장르적’으로 우회하되 승부를 외면하지 않는 배짱이 <가을로>의 절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