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피플]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의 배우 박광정
2006-10-14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내 궁상맞음으로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도장포 주인 태한은 몸도 마음도 왜소한 사내다. ‘씨발’이라는 욕설을 내뱉지도 못하고 낙관으로 새길 뿐인 태한은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 말 없이 조그만 가방을 챙겨, 아내의 애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고자 길을 떠난다. 그 남자 중식(정보석)이 모는 택시를 대절해 고속도로를 달리며 깃털 빠진 수탉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연적을 응시하는 남자. 팔이 너무 가늘어 여름에도 반팔 웃옷을 입는 일이 없다는 박광정은 지나치게 더워 보이는 셔츠와 긴바지를 입고, 마음속의 질투만큼이나 뜨겁게 이글거리는 햇빛을 받으며, 작은 남자 태한이 되어 여행을 떠났다. “그 남자가 바보같고 불쌍했다. 힘도 없으니까 차마 중식을 두들겨 패지도 못하고(웃음). 이상한 일이다. 보통 남자들은 아내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피가 거꾸로 솟을 텐데. 그래서 치정살인도 일어나는 것 아닌가. 아마도 태한은 약한 사람이어서, 아내의 남자를 훔쳐보는 듯하다.”

주연을 맡은 영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의 첫 번째 상영을 앞두고 부산에서 만난 박광정은 하고 싶은 말을 우물거리는 태한과는 다른, 낮지만 분명하게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로 그 이상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극 <서울노트>를 무대에 올리고 새벽같이 달려온 발걸음 끝이어서 부스스한 피로가 묻어났지만 목소리만은 생기가 있었다.

박광정이 처음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를 만난 것은 2년 전이었다. 태한과 중식 모두를 보아달라며 그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던 영화사는 그 뒤 소식이 없었지만, 제작여건이 마련된 다음 다시 한번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올해 3월 연극 <아트>를 공연하고 있을 때였는데 김태식 감독이 혼자 공연을 보러 와서 함께 영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끈기를 가지고 하고 싶어하는 영화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59년생이라는 만만치 않은 나이에 데뷔한 김태식 감독은 <넘버3>에서 보라색 스카프를 두르고 조폭 보스의 아내를 유혹했던 박광정과 지적이고 반듯해 보이는 정보석의 이미지를 뒤집고 싶어했고, 덕분에 박광정은 25회에 걸친 촬영 내내 등장하는 태한을 연기하게 됐다. “조연이나 주연이나 다를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영화와 달리 너무 많이 나오니까, 몇 명이나 될지는 몰라도 이 영화 보는 관객은 내 얼굴을 지겹게 볼 텐데, 성실해져야겠다 싶더라.” 아내의 애인을 만나고, 다시 그 애인의 아내(조은지)를 만나며 2박 3일을 보내는 그 얼굴에는, 보는 이마저 노곤해지는 피로가 가득하다.

그 피로는 태한 뿐만 아니라 박광정 자신에게 배어있는 것이기도 했다. 햇살이 거침없이 내리꽂히는 강원도 고지에서 한여름 더위에 시달리며 영화를 찍었던 그는 초라한 자책과 엿보기에의 욕망으로 새어나오는 질투를 짊어지고 다녔기에 마음 또한 피로했다. “언제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를 연기하니 현장에선 대체로 예민한 상태였다. 조은지와 연기하는 장면은 술집을 빌려서 찍었는데, 그곳은 강원도와는 반대로 언제나 습기가 많아 축축하게 늘어지곤 했다. 그러다가 조은지가 노래를 부르고 내가 춤을 추는 장면을 찍으면서 막춤으로 기분을 조금 ‘업’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웃음).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에서 몸풀기 체조했던 것이 생각나 비슷한 춤을 췄는데, 매우 많이 보여준 동작 중에서 몇 개나 영화에 나오는지 잘 모르겠다.(웃음)” 소주에 취하고 마음의 상처에 취해 느릿느릿, 인상 쓴 얼굴로 막춤을 추는 남자. “예전엔 뭔가를 좀 더 해야겠다는 느낌으로 연기를 했다면 이번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느낌이어서, 실험의 기회가 됐다”는 박광정은 그처럼 조용하고 나른하게, 한 중년 남자의 슬프고도 우스운 나들이를 그려냈다.

풋내 나는 사내아이들이 커다란 물건을 가진 또래를 곁눈질하듯, 집요하고 시기어린 시선으로 중식을 뒤쫓던 태한은, 역설적이게도 중식의 아내로부터 위안을 찾고 또한 그녀를 위로해준다. 그 때문에 박광정은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가 그저 불륜 드라마로만은 비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자극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도를 담고 시작한 영화는 아니었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가 태한과 중식의 진심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느낌에 관해 정직하게 보여준다면, 참 좋겠다. 그리고 이 좋은 영화를 만든 김태식 감독이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으면 한다.”

나 참 잘했다, 라는 마음보단 후회가 커서, 그리고 쑥스러움이 많아서, 관객과 함께 자기 영화 보기를 꺼린다는 박광정은 이번에도 역시 객석 뒤에서 왔다갔다하며 살짝살짝 영화를 볼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나체를 보아야하는 순간 또한 걱정되는 일이다. “아직 스크린으로는 이 영화를 보지 못해서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다. 흉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태한이 벌거벗고 누워있는 장면을 보면 관객은 더욱 동정을 느끼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궁상맞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웃음).” 바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산이 좋다는 박광정은 그처럼 귀여운 자기희생의 멘트를 남기고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상영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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