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내 인생의 영화 <라디오 스타>
2006-10-16
글 : 전정윤 (한겨레 기자)

지난해 봄이었다. 영화팀으로 인사발령이 난 뒤 처음으로 언론시사회에 갔다. 난생처음 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떨리는 가슴을 가누며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영화팀 선배가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네 인생의 영화는 뭐니?” 머릿속이 멍해지고 말문이 막혔다. 돌이켜 보니 나한테는 ‘내 인생의 영화’는 물론, ‘내 인생의 무엇’이라고 할 만한 그 ‘무엇’이 없었다.

그 뒤로 1년 반, 아니 탯줄을 끊은 지 30년 만에 드디어, 얼마 전 ‘내 인생의 영화’를 영접했다.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다. 누구는 “좋은 영화긴 하지만 걸작은 아니지 않으냐”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걸작들 속에서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그 속에 있었으니, 〈라디오 스타〉는 내 인생의 영화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이렇게 말했단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엇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말하는 바를 관객들이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영화는 진실이 되고, 또 관객의 삶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된다.

〈라디오 스타〉는 퇴물 가수 최곤(박중훈)과 매니저 민수(안성기)의 이야기다. 민수는 최곤의 가치를 발견해서 스타로 만든 사람이다. 또 빤짝 떴다 한물간 최곤을 20년 동안 한결같이 최고라고 말해주고 최고로 대접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학교도 다녀보고 직장생활도 해보고, 코딱지만큼 업을 쌓았다가 태산만큼 실수를 연발해보며 살아보니 알겠더라. 우리 모두는 ‘스타’를 꿈꾸지만 스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백사장 모래 가운데 한 줌도 안 된다는 것을. 또 스타가 된들, 평생 스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줌 모래알 중에서도 한두 알밖에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아마도 난 그 선택받은 한두 알이 아닐 거라는 것을 말이다. 이 쓸쓸한 깨달음 뒤에도 마지막까지 떨치기 싫은 기대가 있었다. 스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부모든 친구든 배우자든 나를 스타처럼 여겨줄 사람 하나쯤 껌처럼 들러붙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이 역시 1등 복권 당첨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는 한글과 함께 깨친 것 같다. 그런데 최곤을 인정해주고 보듬어주고 별처럼 떠받들면서도 자학하지도 비굴해지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민수의 모습이 죽비처럼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라디오 스타〉가 돌연 ‘내 인생의 영화’가 된 건 그 때문이다. 민수 같은 사람이 없다고 괴로워할 시간에 내가 민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혁명에 가까운 발상의 전환이, 나를 오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9월29일 개봉한 〈라디오 스타〉는 9일까지 89만1천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뜻밖의 부진이다. ‘입소문 뒷심’이 슬슬 힘을 쓰기 시작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내 인생의 영화’를 찾는 외로운 인생들에게 처방전으로 권한다. 〈라디오 스타〉 보시지 않을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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