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남자들의 거룩한 수다
장진 감독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곧잘 해온 감독이었다. <아는 여자>를 제외한다면 그의 영화들은 아이처럼 그림자놀이를 하고, 킬러지만 말투가 곱고, 강도이면서도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남자답지 않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 때문에 <거룩한 계보>는 장진 감독과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영화로 보였다. 질펀한 전라남도 사투리로 상대의 기를 꺾으며 한번, 두번, 세번, 정확하게 마음먹은 횟수만큼 사람 몸에 칼을 찔러넣는 조직폭력배들의 영화인 <거룩한 계보>. 그러나 이 영화의 남자들은 또한 함께 부르던 노래를 나지막한 휘파람으로 불어 친구에게 생존의 신호를 보내고, 죽은 줄 알았던 친구의 휘파람 소리에 엉엉 울어대는 연약하고 빈틈 많은 존재이기도 하다. 조직에 버림받은 치성(정재영)과 형제보다도 아꼈던 친구의 복수를 막아야만 하는 주중(정준호)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칼을 들이댈 것일까.
이런 영화를 만든 세 남자는 서로 너무나 달라 보여, 여리고 섬세한 조폭이라는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조어처럼,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한 팀이었다. 반바지에 운동화를 끌고 나온 정재영, 정재영의 열배쯤 되는 시간을 헤어와 메이크업에 투자한 정준호, 과묵하거나 묵직한 저음인 배우들과 달리 발랄하게 떠드는 장진 감독. 우연하게도 영문 이니셜이 모두 JJ를 포함하고 있는 세 남자는 검은색으로 통일한 의상을 입고 서로 조금도 겹치지 않는 표정을 지니고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 촬영과 그 뒤 이어진 불균질한 대화. 이것은 말투도 목소리의 톤도 관심사도 다른 세 남자가 오랜 시간 들려준 아주 색다른 남자영화 이야기다.
장진: <거룩한 계보>는 동치성이라는 인물에게서 시작된 영화다. 4년도 넘은 것 같은데, 열장 정도 트리트먼트를 쓰면서, 이건 정재영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한 거다. 캐스팅이 어려웠던 것도 치성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배우들이 주중을 약하게 보아서 그런 거였다. 나는 대중이 저 사람이 나오는 영화라면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배우가 필요했다. 정재영이 그동안 출연했던 영화는 너무 무겁거나 작품성이 앞서거나 대중적인 편안함이 없었으니까.
정재영: 내가 출연했던 영화 태반은 장진 감독 영화인데?
장진: 야, 지금 선배가 얘기하고 있잖아. (웃음) 나는 주중에게 애정이 많은데 그걸 알아주는 배우가 없었다. 다행히 정준호가 주중을 좋게 보았다. 지금 배우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캐스팅이 된 결과다. 셋이 뭉쳤고, 그래서 출발했다. 그 시간이 무척 짧았다.
정준호: 배우를 캐스팅하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물감을 써서 적절한 데커레이션을 이루어야만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즐거워할 수 있는 거다. 거기에 서로의 교감이 있어 릴랙스할 수 있다면 배우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재영이 동치성이어서 정말 좋았다. 사실 김주중이란 친구는 마음이 약한 친구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여리고 결단력도 없고, 친구가 배신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조직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주중과 치성의 앙상블이 정말 중요하겠구나 싶었다. 나하고 정재영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시선도 있었지만, 나는 의외성이 있어서, 더 잘 먹힐 것 같았다.
정재영: 나는 누구하고 어울린다는 얘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특히 여배우하고는 더욱더. (웃음) 치성은 감옥 안에 있고 주중은 밖에 있어서 서로 만나는 장면이 거의 없긴 했다. 하지만 주중과 치성은 불알친구고, 서로가 서로에게 악역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애정이 보여야만 했다. 다만 시나리오에 그런 관계가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친하게 보일 까닭은 없었다.
장진: 정재영은 남성적인 마초 기질이 강한데, 쟤가 어떻게 우나, 옛날엔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울었는데 어떻게 작은 소리로 울까, 궁금했다. 이전의 정재영이 세고 휘두르는 에너지의 배우였다면 이번엔 섬세한 면을 보여주었다. 나하고 정재영은 언제나 함께 작업을 했지만 이번처럼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 쾌감이 된다. 정재영이 가장 많이 변한 점이 있다면 가격대고. (웃음) 뭐, 평소에는 잘 만나지도 않고 밥도 같이 안 먹지만. (웃음)
조폭영화, 장진의 수다로 변주되다
정재영: 장진 감독도 내가 자기 영화를 변하게 해주고 풍성하게 해주기를 원하겠지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스펙트럼을 확확 넓힌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대신 오래 만나온 장점은 있다. 의사소통이 쉽고 이해가 잘된다는 것. 학교 때부터 같이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장진 감독의 시나리오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올 거라고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정준호: 그래서 나도 영화 찍으면서 서울예대 동문이라고 착각하고 다니곤 했다. 연극하면서 얼굴 익힌 배우들도 많고. 그런데 서울예대 동문들 몇명이 밥먹고 있으면 그 사이에 끼어들긴 좀 그렇더라고. (웃음) 농담이고, 장진 감독은 학연 같은 건 정말 안 따진다. 옛날 건달들은 몽둥이 하나 들고 감독 옆에 앉아서, 우리 조카여, 그냥 그랬다고 하더라. 배우로 쓰라는 얘기도 없이. 다 옛날이야기지.
정재영: 건달 세계라는 게, 여자들은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재미있다. 형님이 전화하면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벌떡 일어나서 “형님이십니까” 이런다. 건달은 군대나 정치보다도 규율이 세다. 형님이 숟가락 들기 전에는 절대 밥을 안 먹고, 두살 차이만 나도 겸상을 안 한다. 치성이 면회온 보스하고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전화기로 대화하는 장면에서도, 형님이니까, 자연스럽게 전화기를 두손으로 잡게 됐다. 발차기는 게을러서 운동도 안 하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많이 뺐지만. (웃음)
장진: 근데 대사에는 발차기의 달인이라고 나오잖아. (웃음) 굳이 차별화된 조폭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조폭영화는 한국에만 있는 장르 아닌가. 갱스터무비는 대가들이 한번씩 건드리는 매력적인 장르인데, 한국에서만 이상하게 받아들여졌고, 대중적인 악취향의 선봉처럼 되어버렸다. 만든 사람들의 책임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굳이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보겠다고 고민하며 스트레스받고 싶지는 않았고, 대신 전형적인 조폭 캐릭터를 미세하게 탐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재영: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장진 감독이 해온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다. 나는 장진 감독의 매력이 독특한 이야기에 있는 것 같다. <킬러들의 수다>만 봐도, 우리나라에 킬러가 어디 있나. 그런데 얘들은 우리나라에 예부터 킬러가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내고 장총도 들고 다닌다. <아는 여자> <간첩 리철진> <박수칠 때 떠나라>가 다 그랬다. 그런데 <거룩한 계보>는 그냥 단순한 조폭이기에 왜 이런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감독에게 물었다. 아마 이번 영화는 쉽고 편한 소재 사이사이에 감독의 색이 들어가도록 만드는 영화인 것 같다. 이전까지는 감독 색이 훨씬 강하고 그 사이사이 대중적인 이야기가 첨가돼 있었던 거고.
정준호: 아까 장진 감독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남자들의 이야기는 어떤 감독이더라도 한번쯤 건드리고 싶은 소재일 거다. 하지만 나는 장진이 조폭영화를 만든다면 조금 색다르면서도 관객의 구미에 맞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희망과 기대가 있었고, 조폭영화라고 망설이진 않았다. 조폭영화가 어때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보는 영화가 조폭영화 아닌가.
정재영: 그래서 처음에 메인 카피가 “네, 조폭영화 맞습니다”였어. (웃음)
쇼크로 가득 찬 배우의 진경
장진: 사실 내가 걱정했던 건 그런 것보다는 교도소 담벼락이 무너지고 비행기가 총알에 맞아 격추당하는 장면 같은 것이었다. 관객이 잘 따라올까 걱정됐는데, 모니터 시사를 해보니 반응이 괜찮았다.
정재영: 그 장면은 나도 걱정했다. 나는 리얼리티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덧마루랄까, 인프라라고 할까, 공감이 가도록 만드는 장치를 미리 깔아두니까 크게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옥수수 알갱이가 팝콘처럼 떨어지는 장면도 그렇지 않았나.
정준호: 요즘 관객은 장기나 바둑 둘 때 훈수 두는 사람처럼 장기판 바깥에 나와 훤히 판을 보는 것 같다. 사소한 거 가지고 꼬투리 잡고, 그런 관객은 요즘 없다.
장진: 대중을 고려한 스트레스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내가 대중적이고 쉬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건 100% 흥행이 되는 영화를 뜻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흥행에 관해선 밑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 자본이라는 게 일반적인 투자자들의 돈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건데 밑지지 않는 게 도덕적인 양심이고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자세인 것 같다. 그 이상은 내가 욕심을 낸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난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그들이 모여 영화를 볼 때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그런게 참 궁금했다.
정준호: 편집본 보여주면서 “죽이지 않냐” 이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하는 감독이다. (웃음) 장진 감독은 촬영장에 가면 전날 찍은 분량을 보여주면서 리듬과 밸런스를 타고 가도록 해준다. 그러면 배우가 시간도 단축할 수 있고 최고의 연기를 뽑아낼 수도 있다. 필요없는 신을 찍을 필요가 없고 불필요한 시간을 보내지도 않으니 선진적이고 좋은 시스템으로 느껴졌다.
장진: 그렇게 해보니 장단점은 있다. 강우석 감독은 너 왜 자꾸 온갖 사람한테 모니터 보여주고 그러냐, 영화라는 게 신성시되고 신비로워야지, 그러면서 뭐라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꾸 누군가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 약해서 그런 것 같다. 감독은 누구도 갖지 못하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하는 보석 같은 이야기가 내게 무척 값지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연출부 막내한테까지 물어보는 거다. 강우석 감독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몰래 보여줄 거다. (웃음)
정재영: 그래도 며칠 안 했잖아. (웃음) 장진 감독이 그러는 건 자뻑이거나 혼자 도취돼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괜찮다. 무조건 좋다고만 하는 사람이 있어도 진실은 금방 들통이 나는 거고.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괜찮았어도 물어보고, 안 괜찮았어도 물어보는 스타일이어서, 장진 감독도 그렇게 확인을 하고 가려는 거라고 믿고 있다. 나는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는 감독과 친하고 친하지 않고를 떠나 치열하게 하는 편이다. 항상 물어보고 이야기하고, 그런 식으로 촬영을 한다. 물론 막연한 아쉬움은 남는다. 그때 한번 더 했으면 좀더 잘하지 않았을까, 하는.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인 거다. 내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감독이 가만히 좀 있어, 라고 나오지는 않는 거 아닌가. 이제 활시위는 당겨졌고 마무리는 감독의 몫이다. 다섯달 동안 치열하게 했으니 장진 감독이 생각하는 이상의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장진: 나도 배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알 파치노나 로버트 드 니로나 조니 뎁 같은 배우들은 그가 이런 역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설레서 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영화들을 한다. 정재영도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쇼크로 순간순간 다가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정준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배우가 연기에서 프로모션까지 너무 다양한 기능을 하다 보니 작품에 올인해 미쳐버리는 순간이 너무 짧다는 거다. 정 선배는 하고 있는 일이 많아서 주중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캐릭터의 템포와 탄력을 놓치지 않았다. 그 공사다망한 와중에! (웃음) 그런 모습을 보면 감독으로선 정말 긴장이 된다. 하지만 정준호가 지금 하고 있는 광고가 몇개인데, 삭발 연기의 투혼을 불태우고, 이런 거 할 수 있겠어? (웃음) 나는 어느 순간 배우 정준호의, 단지 배우로서만의, 진경을 보고 싶다.
정재영: 그러니까 들어오는 CF를 다 하지 말고 주변에 좋은 배우가 있으니까 그 사람 쓰라고 추천 좀 해봐. (웃음)
장진/굳이 차별화된 조폭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조폭영화는 한국에서만 이상하게 받아들여졌고, 대중적인 악취향의 선봉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전형적인 조폭 캐릭터를 미세하게 탐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재영/나는 누구하고 어울린다는 얘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특히 여배우하고는 더욱더. (웃음) 치성과 주중은 불알친구고, 서로에게 악역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애정은 보여야만 했다.
정준호/장진이 조폭영화를 만든다면 조금 색다르면서도 관객의 구미에 맞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희망과 기대가 있었고, 조폭영화라고 망설이진 않았다. 조폭영화가 어때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보는 영화가 조폭영화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