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소식]
한국의 이름으로, 아시아의 이름으로 세계를 향한다
2006-10-19
글 : 문석
아시아필름마켓 ‘스타 서밋 아시아’에 참여한 할리우드의 한국계 배우들

혹시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 중 아시아계 배우가 로맨틱한 연기를 펼치는 멜로영화나 코미디를 본 적이 있나. 또는 아시아계 변호사가 주인공인 영화나 아시아계 의사가 주연인 영화를 만난 적은 있는가. 혹여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계 배우가 주연을 맡는다 해도 그 경우는 대부분 무술액션영화다. 또 할리우드에는 흑인 시장을 위한 영화나 히스패닉을 위한 영화는 존재하지만 아시아 사람을 위한 영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온 아시아계, 아니 한국계 미국인 배우들이 한국을 찾았다. 아시아계에 대한 금단의 장벽을 돌파하면서 <패스트 & 퓨리어스: 도쿄 드리프트>에 출연했던 성 강, <007 어나더 데이>에 등장했던 윌 윤 리, <퍼펙트 스코어>에 나온 레오나르도 남이 그들이다. 한국과 아시아에 자신을 알리기 위해 아시안필름마켓의 ‘스타 서밋 아시아’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을 만났다.

편견을 깨기 위한 발걸음

성 강_1972년 미국 조지아주 게인스빌 출생
성 강은 <패스트 & 퓨리어스: 도쿄 드리프트>에서 자신의 역할인 한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주인공 션에게 멘토 격인 한은 시종 진실하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계의 캐릭터는 뻔해요. 무술을 하거나 술 판매상이거나, 아니면 일식집 주방장이나 나쁜 북한 테러리스트…. 그런데 이 역할을 맡아 굉장히 만족스러웠고, 팬도 많아졌어요.” 영화 완성 직후 LA에서 가진 세차례의 테스트 시사에서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한을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로 꼽기도 했다. 그가 아시아계 배우로서는 드물게 ‘좋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운이 좋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패스트…>의 감독인 저스틴 린이 중국계 미국인이 아니었거나, 이 영화를 만든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프로듀서가 중국인 아내를 갖지 않았다면 그는 이 기회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모든 게 성 강의 노력이 빚은 결과물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성 강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린 영화는 2002년의 <베터 럭 투모로우>다. 개봉 당시 11개 스크린에서 출발해 2000여개 스크린까지 늘어나는 신화를 창조했던 이 영화에서 그는 주연급 연기를 했을 뿐 아니라 프로듀서로도 활약했다. 그는 당시 시나리오와 미래에 대한 꿈만 갖고 있던 저스틴 린 감독과 의기투합해 이 영화를 만들어냈고, 이후에도 ‘영화 동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결국, 저스틴 린이 그에게 한 역을 맡긴 것은 동지에 대한 보답이자 아시아계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지난해 한국계 마이클 강 감독의 <모텔>에서 주목을 받았고, 이소룡이 사망한 뒤 <사망유희>를 완성하는 과정을 그리는 저스틴 린 감독의 <사망유희 끝내기>를 마친 그는 <다이하드> 4편을 앞두고 있다. 10월28일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이 영화에서 그는 테러리스트 조직의 컴퓨터 전문가를 연기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 또한 아시아계가 줄곧 맡아온 ‘나쁜 놈’을 연기한다는 얘기다. “아쉽죠. 단순한 악역에 연기력을 불어넣기는 힘들잖아요. 하지만 비즈니스적으로 생각했을 때 <다이 하드> 시리즈를 거부할 수는 없었어요.” 그럼에도 할리우드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 강은 “아시아 사람이 모두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의 힘을 이용해”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이야기를 드라마에 담는 계획을 한국쪽과 논의하고 있다. 능숙한 한국어 실력은 그의 한국과의 작업에서 큰 힘이 될 것이다.

할리우드 찍고 아시아로, 한국으로

윌 윤 리_1972년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출생
명문대학인 UC 버클리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시절, 윌 윤 리는 문득 자신의 미래를 예상해 봤다. 변호사가 돼서 넥타이를 매고 다니거나 아버지의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일 모두 그의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드래곤>에서 이소룡을 연기한 제이슨 스콧 리를 보면서 그는 연기에 대한 욕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야 연기의 꿈을 펼치기 시작한 그는 블록버스터 영화 <007 어나더 데이>에 문 대령 역으로 출연하고 2002년 <피플>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꼽히면서 세상의 중심으로 한 발짝씩 다가서고 있다. 그는 부산에 오기 직전 영국에서 BBC의 TV 시리즈 <허슬>을 찍었으며, 그 바로 전에는 팀 로스, 토니 콜레트와 함께 쓰나미에 관한 HBO의 4시간짜리 영화를 찍었다. <러시 아워>와 <엑스맨: 최후의 전쟁>의 브랫 래트너 감독의 랫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윌 윤 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그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준비 중이며, ‘제2의 윌 스미스’라 불리는 닉 캐넌의 새로운 프로젝트에서도 그에게 동참할 것을 요청한 상태.

이제 할리우드 톱스타로 향하는 계단의 마지막 몇 발걸음만 남겨놓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윌 윤 리는 아시아 영화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 “내 꿈은 아시아, 그리고 한국에서 일하는 것이에요. 내가 보기에 최고의 감독과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가 한국에서 배출되고 있어요. <달콤한 인생>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친구> <조폭 마누라> <엽기적인 그녀> 등등, 이들 영화는 정말이지 독창적이라고요.” 그의 이야기는 성공한 재미교포가 모국을 찾아와 으레 하는 입바른 말이 아니다. 그는 한국과 아시아에서의 활동을 위해 싸이더스HQ의 모회사인 IHQ와 계약을 맺었다. “지금 한국과 이야기 중인 프로젝트도 있어요. 한국 관객들이 나를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네요.”

그렇다고 그가 할리우드를 떠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윌 윤 리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액션 스타로 부각될 전망이다. 그의 태권도 실력은 무려 5단. “그동안은 연기를 먼저 익히고 싶어 무술을 못한다고 했다”는 그의 숨겨진 내공은 이 영화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그저 액션만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크로우>의 브랜든 리처럼 복합적인 내면을 가진 캐릭터가 먼저이고 액션은 그 다음이에요.”

한국적 유전자와 예술적 유전자의 절묘한 배합

레오나르도 남_197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생
영화 데뷔작 <퍼펙트 스코어>를 통해 미국에서 얼굴을 알렸고, <패스트 & 퓨리어스: 도쿄 드리프트> 등에 출연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려온 레오나르도 남에게 2006년은 특별한 해이다. 독립영화 <퀴드 프로 쿼>에서 맡은 작은 역으로 시작해 2차대전 도중 일본군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 <아메리칸 패스타임>, 제니퍼 애니스톤의 감독 데뷔작이자 그에겐 로빈 라이트 펜과 함께 연기하는 영광을 안겨준 단편영화 <룸 10>, 저스틴 린 감독의 <사망유희 끝내기>, 그리고 5개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영화 <밴티지 포인트> 등에 연달아 출연한 것이다. 쾌활하면서도 순수한 듯한 그 특유의 이미지가 할리우드의 관심을 끄는 탓인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점점 길어지고 있다.

마돈나 뮤직비디오의 안무를 만든 댄서를 형으로, 아프리카 가나에서 활동중인 동화작가를 누나로 두고 있는 그는 예술가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의 피 안에는 ‘한국적’이라는 또 다른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국경의 남쪽>을 봤는데, 감정이 북받쳐올라서 참느라 힘들었어요.” 레오나르도 남은 한국인에게 고유한 감성인 ‘한’(恨)을 절절하게 느낀다고 했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곤란한 질문이 “Where are you come from?”이라고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호주로 이주했고, 다시 연기 공부를 위해 뉴욕으로 갔다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려고 LA로 터전을 옮겼기 때문. 하지만, 부모님의 모습으로부터 배운 ‘한’의 감정이야 말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감성 중 하나가 됐다.

자신의 정서와 닮은 한국과 아시아 영화에 큰 관심을 쏟고 있는 그는 아시아 영화인들을 많이 만나기 위해 ‘스타 서밋 아시아’ 행사를 찾았다. “아시아영화는 서구영화의 시각과 많이 달라요. 그러니까 아시아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룸 10>의 LA 시사회에 초청받았음에도 부산에 온 것도 “이렇게 훌륭한 행사에 빠질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온갖 편견과 압력을 물리치고 할리우드에서 흑인 배우의 위상을 올바르게 세운 시드니 포이티어를 가장 존경한다는 그는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아메리칸 배우들이 자리잡기 위한 돌다리가 된다면 바랄 나위가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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