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의 소설 앞에서 나는 곧잘 노안용 돋보기를 갈구하는 노파가 된다. 글자 너머의 욕망이 당최 보이지 않아 버벅거린다. 그러나 원시(遠視)처럼 게슴츠레하던 내 눈은 <핑퐁>을 통해 장난기 어린 다초점렌즈가 된다. 하나의 주제찾기를 포기하고 생뚱맞은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이다. <괴물>에서 포름알데히드로 인해 변종된 물고기는 분명 문명의 희생자인데 왜 ‘악의 축’이 되는 걸까. 괴물이 나타난다면, 에일리언이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섬뜩한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모습이 아닐까. <핑퐁>의 왕따소년들처럼, 세계가 “깜박”해버린 존재들이 아닐까. 또는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 아니,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괴물이 아닐까.
왕따소년들은 알고 있다. 삥을 뜯고 린치를 가하는 ‘일진’보다 더 무서운 건 “다수인 척”하는 침묵의 시선임을. 민주주의야말로 피 안 나게 왕따를 제조하는 합법적 장치가 아닐까. 도대체 다수결을 최초로 고안한 사람은 누굴까. 공동체의 운명이 오락가락하는 문제를 두고 ‘쪽수로 결정하지, 뭐!’라고 받아친 최초의 인간은 무슨 꿍꿍이였을까. 아무리 독특한 자기 세계를 가진 자라도, ‘다수’로 묶이는 순간, 시비·호오를 떠나 ‘살아남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는, 엄혹한 잔존(殘存)의 기술을 아는 자였을까. 이 다수결의 떡고물은 누구에게 던져졌을까. 다수결로 인해 인류가 행복해졌을까. 역사상 최고로 민주적인 참여 정부로 인해 우리는 행복해졌는가. 사랑스러운 왕따소년들은 이렇게 세계의 모순이 집약된 탁구계에서 “인류라는 인스톨을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라는 최대 난제를 놓고 희대의 명승부를 벌인다. 하도 얻어맞아 두개골에 금이 간 왕따소년은 “개인은 인류보다 크다”는 소중한 진실을 깨닫고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핑’과 ‘퐁’을 주고받는다. 승리나 공격, 속도나 경쟁에 연연하지 않는, 온갖 진기명기로 서로의 공을 받기만 하면 모두가 즐거운, 새로운 삶이라는 핑퐁 게임을 우리는 고안해낼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