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꿈과 현실을 이어붙인 뫼비우스의 띠, <수면의 과학>
2006-10-26
글 : 김혜리

두 남녀의 머릿속에 퇴적된 사랑의 추억을, 지층을 감식하는 지질학자의 눈길로 검토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미셸 공드리 감독에게 인간의 머릿속은 골짜기와 폭포, 사막과 숲으로 이루어진 땅과 같아서 답사를 요한다. 기억에 이어 공드리가 발을 들인 오지는 인간의 꿈. 행여나 제목으로부터 잠의 원리나 불면증 퇴치법을 보여주는 영화를 기대하면 오산이다. 단짝 작가 찰리 카우프만(<휴먼 네이쳐> <이터널 선샤인>)에게서 독립해 미셸 공드리가 혼자 힘으로 시나리오를 쓴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증세를 가진 남자의 동화다. 또한, 염세적이고 철없는 남자의 연애 방식을 자학적으로 드러내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소심한 멕시코 아티스트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꿈속에서는 <TV 스테판>이라는 화려한 쇼의 활달한 진행자로 변신한다. 어려서부터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 속에 살아온 스테판은 심기일전해 파리로 날아온다. 아버지를 여의고 마법사와 연애 중인 프랑스인 어머니 크리스틴(미우 미우)이 그에게 소개한 일자리는 달력 만드는 회사.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고 창의성이 희박한 일은 스테판에게 스트레스를 안긴다. 한편 스테판은 아파트 이웃의 아가씨 스테파니(샬롯 갱스부르)에게 끌리는 자신을 깨닫고 서서히 강하게 집착한다. 일과 연애감정이 배설하는 좌절은 기괴한 전조와 환상으로 변해 스테판의 꿈속에서 날뛰고, 혼돈스러운 꿈은 다시 그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내몬다. 스테파니는 신기한 장난감들- 심지어 독심술 기계와 타임머신을 포함한- 을 만들 줄 아는 재능있고 천진한 남자에게 호감을 품지만 그의 생떼와 위악에 지쳐간다.

<수면의 과학>은 <이터널 선샤인>의 성공 와중에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았다는 감독의 경험을 다분히 반추한 이야기다. 어머니의 아파트에서 알록달록한 어린이 이불을 덮고 자는 스테판은 덜 자란 남자의 표본이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손이 소파만큼 커지고 당나귀 귀가 돋는가 하면 파리 시가지를 들었다 놓는 스테판의 다채로운 환상을 TV 어린이물 <세서미 스트리트>식의 수공적인 특수효과를 써서 연출했다. 배우들은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섞어 소통하며 CG가 아닌 셀로판지와 마분지로 만들어진 무대에서 천연덕스럽게 움직이는데 그것은 가끔 형이상학적 학예회처럼 보인다. <수면의 과학>은 “정말 이제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건가?”라고 애처롭게 저항하는 감독의 자문 같다. 평소 잘 쓰지 않는 뇌의 일부를 움직이는 영화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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