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게는 격려의 의미가 되겠지만, 그보다도 더욱 많은 아시아 영화인들이 신인감독과 새로운 영화인력을 길러내는 일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지난 10월13일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은 유덕화는 수상의 기쁨을 피력하기보다 홍콩과 아시아 영화계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일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고 싶은 듯했다. 유덕화가 지난 한해 동안 아시아영화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은 이유는 “제작자로서 저예산영화 제작을 지원하고 아시아 신인 영화감독, 배우 양성에 힘써온 점을 높이 평가”(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받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도박영화, 누아르영화, 무협영화 등 다양한 장르영화를 누비며 홍콩 영화계의 최고 스타로 군림해온 유덕화의 배우로서의 경력이야 누구나 아는 바지만, ‘제작자 유덕화’의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1990년대 초 자신의 영화사 팀워크프로덕션 하우스를 설립한 뒤 프루트 챈 감독의 <메이드 인 홍콩> 등 다양한 영화를 제작해왔던 유덕화는 2000년대 들어 회사 이름을 포커스 필름스로 바꿨다. 이름만 바꾼 게 아니다. 포커스 필름스는 세 가지 노선을 전면에 내세운다. 새로운 소재, 새로운 흐름, 새로운 인재가 그것이다. 젊은 신인감독들을 후원하는 프로그램 ‘퍼스트 컷’ 시리즈도 이 같은 차원에서 운영되고 있다. “홍콩의 유명 감독들은 대형 프로덕션을 많이 갖고 있는데 거기에 끼어서 시장을 쟁탈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그들과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재력은 풍부하지만 시장에서 아직 인정받지 못한 감독 등 영화인들에게 투자해 새로운 인재를 길러내는 게 우리의 목표다. 작은 것에 초점을 맞춰보자는 의미에서 이름도 포커스라고 지었다.”
포커스 필름스의 퍼스트 컷 시리즈의 6편은 쟁쟁하다. 부산영화제 폐막작인 중국 닝하오 감독의 <크레이지 스톤>, 말레이시아 호유항 감독의 <여우비>, 홍콩 리컹록, 왕칭포 감독의 <엄마는 벨리댄서> 등 올해 부산영화제에 초청된 3편을 비롯해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출품됐던 대만 리윤찬 감독의 <인어공주와 요정>, 싱가포르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싱가포르 켈빈 통 감독의 <러브 스토리>, 홍콩 람체청 감독의 <너에게 연락할게> 등 다양한 아시아 국가의 영화가 포함돼 있다. 유덕화는 “첫 번째 퍼스트 컷 시리즈가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10편에서 15편까지 확장할 것”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젊고 신선한, 때로는 예술영화 취향이 엿보이는 퍼스트 컷 시리즈의 ‘제작자 유덕화’는 20여년 동안 대중영화라는 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배우 유덕화’의 이미지와 맞지 않아 보인다. “사실 예술영화계에서는 배우 유덕화를 잘 안 찾더라. 그래서 상업영화에 출연하지만, 투자는 예술영화에 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범위는 무척 넓다. 내 생각에 이 세상의 영화는 딱 두 가지 종류뿐이다. 좋은 영화와 좋지 않은 영화 말이다. 나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제작자로서의 모습을 한껏 보여준 유덕화는 며칠 뒤 다시금 배우라는 익숙한 자리로 돌아왔다. 한국의 태원엔터테인먼트 등이 공동제작하는 국제적 프로젝트 <삼국지: 용의 부활> 제작발표회에 참여한 그는 조자룡 역을 맡아 매기 큐 등과 연기하게 된다고 밝혔다. 과연 아시아 최고 스타다운 행보다. 그런데 불현듯 드는 궁금증 하나. 한때 동료였던 주윤발, 성룡처럼 할리우드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그에겐 없는 걸까. “기회가 된다면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싶다. 그런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게 한명의 중국인 배우냐, 아니면 다름 아닌 유덕화냐, 그것이 중요하다. 성룡이나 이연걸 같은 경우, 그들이 바로 성룡과 이연걸이기 때문에 할리우드에 진출한 것이지 중국계 배우였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까지 내가 아시아에서의 일을 모두 팽개치고 떠날 만큼 매력적인 할리우드 프로젝트는 없었다.” 하긴 영원히 아시아를 수호하는 별이 하나쯤 떠 있다 한들 그것도 좋지 않으랴. “행운과 노력” 덕분에 20년 넘게 정상을 지킬 수 있었다는 그는 ‘30대 초반 같은 외모를 유지하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내가 외계인이라서 그래”라고 말할 줄 아는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