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더 컴퍼니> <프레리 홈 컴패니언> 등의 알트먼 영화란 무엇인가?
2006-11-01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그리고 거장은 ‘알트먼 장르’를 창조했다

알트먼 영화란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알트먼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알트먼 영화를 가리키는 건 아니다. 장르로서 알트먼 영화는 수많은 배우들이 나와 종종 중첩되는 복잡한 대사와 애드리브를 통해 자연스럽고 소란스러운 소우주를 만들어내는 앙상블영화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 장르에서는 알트먼이 직접 만든 <진저브레드 맨>이나 <세 여자> <이미지> 같은 영화들이 떨어져나가고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 같은 영화들이 그 빈자리에 삽입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알트먼이 종종 아주 전형적인 알트먼 영화를 만들면서도 ‘고용감독’처럼 행세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2003년작인 <더 컴퍼니>다. 이 영화를 기획한 사람은 알트먼이 아니라 주연 배우 니브 캠벨이다. 캠벨은 무용계를 무대로 한 알트먼 영화를 상상했고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 장르의 시조인 알트먼을 찾아가 그를 설득했다. 그전까지 알트먼은 무용계에 대한 알트먼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각본 역시 니브 캠벨과 바버라 터너(제니퍼 제이슨 리의 엄마)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그렇다면 이건 오리지널 알트먼 영화인가 아니면 알트먼이 직접 만든 알트먼 영화의 복제품인가?

<더 컴퍼니>
<프레리 홈 컴패니언>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어떨까? 이 영화를 계획한 건 알트먼 자신이다. 하지만 영화의 각본을 쓴 건 <프레리 홈 컴패니언>의 작가이고 호스트인 게리슨 케일러다. 원작이 된 라디오 프로그램과 그 뒷이야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알트먼 스타일을 모방해 혼자 각본을 썼고 알트먼은 그걸 영화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극히 알트먼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의 세계관은 누구의 것인가? 케일러의 공적은 비슷한 스타일의 초기 알트먼 영화 <내슈빌>의 각본을 쓴 조앤 테케스버리의 공적과 어떻게 비교되어야 할까?

질문은 그만하고 오리지널 <프레리 홈 컴패니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한마디로 이 프로그램은 게리슨 케일러가 1974년부터 중서부 미국 애청자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생방송 라디오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인터넷과 위성방송 시대인 21세기 초인 지금까지 살아남아 수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케일러가 그의 영화 각본에 투영한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그가 만든 오리지널 라디오 프로그램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아직도 열혈 팬들을 끌어모으는 컬트 프로그램으로 승승장구하는 오리지널과 달리 영화 속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방송국이 텍사스 모 기업에 팔려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이고 미국 라디오 역사상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이며 라디오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이 오른 실제 게리슨 케일러와는 달리 그가 연기한 GK는 공연이 끝나면 실직자가 되어 주차요원으로 일해야 한다. 영화가 끝나면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 공연되는 피츠제럴드 극장은 헐리고 그 위에 주차장이 들어선다. 한마디로 영화 속의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실제 프로그램보다 운이 없고 초라한 쌍둥이 동생인 셈이다. 더 들여다보면 좀더 흥미로운 거짓말도 발견된다. 영화의 내레이터인 경비원 가이 누아르는 이 프로그램이 “예수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했고”, “1930년에나 먹혔을 수법을 용하게 지금까지 끌어왔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은 역사의 변화 속에 서서히 사라져가는 시대의 유물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40살 넘은 장수 프로그램이고 스타일은 분명 구식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프로그램은 1974년에 시작되었다. 1930년대로부터 40년이나 더 흐른 뒤에 만들어진 것이다. 프로그램의 초창기에도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 취한 생방송 라디오 버라이어티쇼라는 프로그램의 형식은 구식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 프로그램의 차별화 도구였고 인기요인이었다. 그는 기성품 골동품을 만들어 흘러가는 세월의 변화에 겁에 질린 중서부의 얌전한 청취자들을 안심시켰다. 한 프로그램이 컬트가 되려면 시대의 유행을 철저하게 따르는 대신 작정하고 위반하거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케일러의 경우는 전자였던 셈이다.

여기서부터 오리지널과 모방품의 순서가 뒤섞이기 시작한다. 케일러는 분명 자신의 프로그램을 모델로 해서 영화 속의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기성품 골동품으로 만들어졌던 이 프로그램의 모델은 오히려 영화 속에 나온 프로그램에 가까울 것이다. 알트먼 영화 속에 나오는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실제 프로그램을 로맨틱하게 변형한 버전이지만 바로 그 버전은 오리지널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모델로 택한 존재하지 않는 원본이라고 우겨도 크게 틀릴 게 없다. 케일러는 영화를 통해 인기있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현실세계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좀더 ‘사실적인’ 과거와 소멸의 이미지를 살려낸 것이다. 어이가 없는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이 두 작품의 작가가 모두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순환은 별 무리없이 성립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 일관된 주제와 의미가 있다면 그건 게리슨 케일러가 각본과 이야기 흐름을 통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시 알트먼 영화로 주제를 돌려보자. 알트먼 영화 <프레리 홈 컴패니언>에서 알트먼의 비중은 얼마나 되나? 알트먼은 케일러에게 모방의 원본을 제공했고 그 모방품을 이용해 오리지널 알트먼 영화를 만들어 거기에 자신의 서명을 했다. 영화는 알트먼에 의해 만들어진 고유의 스타일을 따라가지만 그 스타일에 반영된 비전은 대부분 케일러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알트먼 영화에서 구체적인 주제의 일관성을 찾는 건 히치콕만큼 쉽지가 않다. 알트먼 장르의 영화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동작업의 산물이고 배우와 스탭의 비중은 히치콕 영화들에서보다 훨씬 높다. 알트먼 장르가 영화라는 작업에 뛰어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놀이터라면, 주체로서 작가의 위치는 ‘장르’ 내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며 그 안에서 역동적인 충돌과 화합의 에너지를 찾는 것이다.

<더 컴퍼니>나 <프레리 홈 컴패니언> 같은 영화들은 알트먼 영화의 미래를 보여준다. 알트먼 자신이 직접 영화를 만들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실제로 이번 영화에서도 제작사는 알트먼이 혹시나 중간에 작업을 중단할 가능성을 고려해 폴 토머스 앤더슨을 고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트먼이 죽은 뒤에도 알트먼의 영향을 받은 각본들은 꾸준히 만들어질 것이고 폴 토머스 앤더슨 같은 사람들이 그 각본들을 감독해 알트먼 영화들로 만들 날도 올 것이다. <더 컴퍼니>와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 알트먼 영화인 것만큼이나 캠벨과 케일러의 영화이듯, 알트먼 영화는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다. 진정한 거장들은 자신의 개성을 장르화한다. 앨프리드 히치콕이 그랬고 로버트 알트먼도 그렇다. 이제 사람들은 서부극이나 미스터리를 선택하는 것처럼 알트먼 영화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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