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쿨걸의 시대다. 커리어, 쇼핑, 연애, 복수, 심지어 살인조차 쿨하게 해치우는 쿨한 여자들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녀들을 닮고 싶어 목이 멘 적이 있다면, 그녀들의 힘겨움에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있다면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쿨걸들의 왕언니 미랜다 프리슬리(<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선두로 캐리 브래드쇼(<섹스 & 더 시티>), 부회장 소녀(<다세포 소녀>), 벨마 켈리(<시카고>), 미호(<씬 시티>)가 그녀들처럼 쿨해지는 비법과 그로 말미암은 힘겨움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커리어 부문 - 미랜다 프리슬리
슬퍼할 시간에 계략에 몰두하라
첫 타자는 미랜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 잘나가는 패션잡지 <런웨이>의 편집장인 미랜다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쿨걸이자 미국, 아니 지구상의 패션계를 좌지우지할 만한 위치에 오른 확실한 일중독자다. 비서에게 코트와 가방을 사정없이 던져주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 미친 듯이 업무에 매진하는 미랜다에게 쿨한 커리어우먼이 되는 비법을 들어보자.
에밀리, 내 스타벅스 커피가 여기 없는 이유가 있니? 15분 안에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오다가 죽기라도 한 건가? 켈빈 클라인 스커트를 15벌에서 20벌 정도 가져와. 어떤 종류냐고?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나 하도록. 줄리아에게 마커스가 포니에서 한 작업물을 봐야겠다고 전해. 나오미에게 전화해서 린이 안 된다면 잭으로 하겠다고 하고. 돌체 앤 가바나에는 아직 연락 안 했니? 그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쟨 누구니? 내게서 커리어에 대한 얘길 듣고 싶어 왔다고? 들여보내. 이상이야.
그래. <런웨이>는 읽어본 적 있니? 내 한평생을 걸어 키워온 잡지지. 패션산업이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야.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황금알을 키우고 있지. 베르사체, 아르마니, 프라다, 도나 카란, 지미 추, 마이클 코어스, 토미 힐피거 등 내놓으라하는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조차 내게 굽실거리는 이유는 그거야. 나는 뛰어난 예술작품 중에서도 정수를 뽑아내는 재능을 지녔거든. 물론 패션계는 무척 터프한 곳이야. 사소한 실수로 영원히 루저가 될 수도 있지. 한순간 한순간에 집중해야 해. 남편과의 파경을 앞두었을지라도 슬퍼하기보다 계략에 몰두하는 것이 좋아. ‘드래곤 여사, 일에 환장하다’, ‘얼음여왕, 또 다른 Mr. 프리슬리를 차다’. 내일 화려하게 지면을 장식할 타이틀들이야. 루퍼트 머독이 힘써주겠지만 역부족이겠지. 오늘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적개심 어린 내일의 가십이 되는 거라고. 성공하고 싶다면 명심해.
커리어우먼, 쉽게 내뱉는 이 말 속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어. 반짝이는 은발머리, 날씬한 종아리와 우아한 걸음걸이, 빠르면서도 격조있는 말투, 패션에 대한 깊은 이해력, 무엇보다 <런웨이> 편집장이라는 직함, 이 모든 것들이 어디서 왔을 것 같아? 마법과 같이 쿨한 성공 이야기라고? 당장 꿈에서 깨어나. 사생활보다 일을 앞세우고 사람들의 비방에 귀를 걸어 잠그는 피 말리는 경쟁의 결과일 뿐이야. <싱글즈>의 나난(장진영)을 참고하도록 해. 백마 탄 왕자와의 결혼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 시작될 수 있어. 여러 번 파경을 맞은 나보다 현명한 삶일 수 있지. 물론 동미(엄정화)처럼 미혼모가 되란 말은 아냐. 이 세상은 약자를 사정없이 짓밟는 무서운 정글이거든.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조은숙(문소리)은 어떻게 교수가 됐는지 의문이긴 해도 염색학과 교수답게 옷 하나는 그럴 듯하게 걸치고 다니더군. 적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아주 인상적인 의상을 선보일 필요가 있어.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김선아) 역시 실력면에서는 본받을 만한 인생 선배라 할 수 있겠지. 그처럼 엉망진창인 여자를 내 비서로 고용하진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그래, 이거야. 쿨해지기에 앞서 누구보다 철저해지도록 해. 이상이야.
갖추어야 할 것
부하직원의 불행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냉혈 심장
임파서블한 지시사항을 임파서블한 속도로 내뱉을 수 있는 빠른 말투
상대의 기를 죽이는 화려한 명품 세트감수해야 할 것
시기, 질투, 경멸, 원망의 눈초리
개인적 불운에 대한 미디어의 대서특필
쇼핑 부문 - 캐리 브래드쇼
마이너스 통장 앞에서 초연해질 것
둘째 쿨걸은 뉴욕에 사는 캐리 브래드쇼(사라 제시카 파커). 사랑과 섹스에 관한 칼럼을 쓰는 캐리는 연애에 대해 설파해도 될 만한 길고 긴 연애 편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쿨한 쇼퍼홀릭의 대표주자로 뽑힌 까닭은 쇼핑, 그중에서도 구두에 관한 지고한 열정 때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오랜 연인 빅과 결혼에 골인했지만 남편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녀의 쇼핑 사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요전에 결혼하려고 이사하면서 다시 깨달았어. 내겐 세도 세도 끝이 없는 수많은 구두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예쁜 구두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절제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게 가장 결핍된 부분인걸. 그럼에도 아름다운 구두를 창조하는 사람이야말로 여자의 가장 좋은 친구라는 내 지론에는 변함이 없어. 유행에 민감하다면 구두를 제외하더라도 매 시즌 반드시 갖춰야 아이템들이 산더미 같겠지. 선글라스, 스카프, 트렌치코트부터 원피스에 이르는 가지각색의 의상들. 그중에서도 튼튼한 명품가방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품이 아닐까. 내 친구 사만다(킴 캐트럴)처럼 가짜를 살 수도 있겠지만(LA는 명품 가방의 천국이더군) 그럴 경우 비웃음을 사며 파티에서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니 조심해.
쿨한 겉모습과 달리 내 통장 잔고는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할 정도야. 사실 매달 카드 결제일을 무사히 넘길 때마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아니?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이 풍족한 삶을 보장해주진 못하거든. 하긴 패리스 힐튼을 제외한 어떤 여자들이 만족할 만큼 쇼핑을 하며 살겠어? 빅과 결혼해 마이너스 통장에서 벗어난 요즘도 재정난에 허덕이긴 마찬가지야. 과도한 쇼핑 때문에 파경에 이른 다른 여자들처럼 이혼이라도 당하면 어쩔 거냐고? 설마, 그럴 리가. 빅은 내 단점을 모두 알고 있는 걸. 내 생활에 불만은 없지만 아주 가끔씩은 미랜다 프리슬리가 부러워지기도 해. 미랜다에게라면 어떤 명품인들 못 대령해 야단들이잖아. 에밀리 대신 미랜다의 비서직을 차지할 수 있다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텐데.
갖추어야 할 것
구두에 대한 뜨거운 소유욕
지름신의 강림에 대한 순종감수해야 할 것
곤두박질치는 통장 잔액
능숙해지는 현금 서비스와 카드 돌려막기 기술
연애 부문 - 부회장 소녀
쾌락은 많고 조심할 것도 많다
연애에 대해 입을 열 셋째 쿨걸은 쾌락의 명문 무쓸모고의 부회장 소녀(남호정). 회장 소년과 SM 관계를 맺고 있는 그녀의 특징은 매서운 눈매와 곱슬곱슬한 파마머리. 그녀가 S인지 M인지 꿰뚫기에 충분한 신체조건이 아닐까 싶다. 처음이라는 말이 둘이서 하는 게 처음이라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무쓸모고에는 쿨한 연애의 도사들이 차고 넘치지만 부회장 소녀는 강렬한 카리스마까지 갖춘 것이 쿨걸로 성정된 가장 큰 이유라고.
나를 이 길로 인도한 건 회장 소년이야. 밤마다 아버지와 변태 채팅을 즐겼던 그 아인 채찍으로 내려치는 쾌감을 깨닫게 해줬지. 그전에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회장 소년과 함께였어. 그 아이의 비명은 무엇보다 짜릿하거든. 선생님의 부탁을 손쉽게 들어줄 수 있었던 건 그 이유야. 마음 약한 도라지소녀(김별) 따위 내 반도 못 따라올걸. 어쨌거나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더없이 만족스러웠을 테고 친구들 역시 즐겁게 눈요기했을 테니 일석이조 아니겠어. 바로 그런 게 부회장의 지위에 어울리는 솔선수범이라 할 수 있지.
우리 학교에는 나 말고도 쿨한 애들이 많아. 원조교제 때문에 조퇴까지 서슴지 않는 가난을 등에 업는 소녀(김옥빈) 역시 마찬가지. 무서운 척 오들오들 떨며 옷을 벗곤 하지만 아저씨들과 즐겨 만나는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 외눈박이에게 한 짓을 보면 도라지소녀에게도 가학적인 데가 있지. 두눈박이(이은성)는 어떻고. 짧은 치마를 즐겨 입는 그 애는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그야말로 멋진 소녀들뿐이라고? 그렇지만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아. 세상은 우리 같은 쾌락주의자들을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거짓말>의 Y와 J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등급 보류되지 않으려면 무한대로 쿨하기 전에 적당히 넘어가는 지혜도 필요해.
갖추어야 할 것
채찍으로 후려치는 잔인함
미묘한 눈썹의 움직임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감수해야 할 것
여성에게 더욱 가혹한 사회적 시선
복수 부문 - 벨마 켈리
두려움은 복수의 적
넷째 쿨걸인 벨마 켈리(캐서린 제타 존스)는 복수에 대해 노래한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날씬한 몸매는 그녀의 매력 중 일부에 불과할 뿐. 매혹적인 벨마는 한때 인기 절정의 보드빌 배우였지만 바람을 피운 여동생과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인 뒤 감옥에 갇혔다. 감옥 동료 록시 하트(르네 젤위거)와의 협연으로 인기를 되찾은 지금 옛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겠다는 그녀. 벨마 켈리의 복수극에 귀 기울여보자.
내 여동생 베로니카와 나는 이인극의 달인이었어. 우린 무려 스무 회에 달하는 곡예를 연달아 해치우곤 했지. 공연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는 우리를 남편 찰리가 뒷바라지했어. 우리 셋의 사이는 무척 돈독했지. 베로니카는 남편을 꽤 따랐고 찰리는 번듯한 외모와 달리 자상한 남자였어. 그래, 사건이 일어났던 그곳은 시세로 호텔이었지. 그날 밤 우리는 완전히 술에 취해 웃고 떠들었어. 그러던 어느 순간 얼음이 떨어져 가지러 갔다 돌아왔는데 글쎄! 둘이 침대 위에서 나뒹굴고 있는 거야. 그것도 17번째 스프레드 이글(Spread Eagle) 자세로 말이지.
감옥에는 나와 비슷한 사연을 지닌 여자가 많았어. 록시 하트는 물론, 나와 함께 노래를 불렀던 동료 모두 배신을 견딜 수 없어 칼이나 총을 든 경우들이지. 후회하느냐고? <달콤, 살벌한 연인>의 미나(최강희)에게 물어봐. 자신의 행복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라고 대답할 거야. 우린 도덕적 책임감에 몸을 던진 <안나 카레리나>의 안나 카레리나(소피 마르소)와는 달라. 자살 따윈 전혀 쿨한 선택이 아니라구. 힘든 것은 오히려 두려움이야. 빌리 플린(리처드 기어)의 변호로 풀려나긴 했지만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것이라는 두려움,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심장을 좀먹었지. 쿨하게 복수하기 전에 미리 계산해보라고. 당신의 미래와 복수,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말이야. 두렵다면 피묻은 손을 씻을 때 즈음 반드시 후회하게 돼 있어.
갖추어야 할 것
배신자를 향해 가차없이 총을 뽑아드는 대담함
구질구질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모감수해야 할 것
감옥에서 보내야 할 지난한 시간
살인 부문 - 미호
폼나는 자세보다는 비정한 마음가짐
비호처럼 칼을 휘두르는 미호(데본 아오키)는 다섯째 쿨걸이다. 주근깨 가득한 앳된 얼굴에 가늘고 긴 팔다리가 매력적이라고? 냉철한 올드타운의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겁나는 이 소녀는 그야말로 행동파 자객. 작업 걸기 전에 목부터 챙길지어다. 말수가 적은 그녀는 근래 오라비를 찾기 위해 무술대회에 참가한 닌자 공주(<DOA>)로도 활약하고 있는 터라 모처럼 즐거이 쿨걸들의 수다에 동참했다.
벌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여느 여자애들과 난 태생부터가 달라. 올드타운에선 각자 자기 목숨을 스스로 챙겨야 하거든. 게다가 타운의 보스인 게일조차 신뢰하는 실력이라니 내 칼솜씨가 어떨지 짐작이 가지? 쿨한 킬러가 되기 위해선 폼나는 자세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해. 적의 손목을 날려버리거나 목을 긋기 직전 갑작스레 솟구치는 동정심이야말로 치명적인 실수로 향하는 지름길이니까. 재키보이(베니치오 델 토로)가 형사라는 걸 알기 전까지 내 마음에는 단 한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구.
그에 비하면 <DOA>에 함께 등장한 티나, 크리스티, 헬레나는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어. 그 애들은 목숨을 내걸고 싸우지 않거든. 날 상대하려면 <킬 빌>의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나 <울트라바이올렛>의 바이올렛(밀라 요보비치), <언더 월드>의 셀린느(케이트 베킨세일), <매트릭스>의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극심한 살의를 지닌 그녀들은 남자들의 육탄공격에도 끄덕없을 뿐더러 나만큼 쿨한 몸매를 지니고 있지. 죄책감도 없이 조용히 상대를 해치운다는 점에서 나를 따라올 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러니 쿨한 킬러가 되려면 누구보다 먼저 나를 넘어서야 할 걸. 끝도 없는 살육극 속에서도 침착하게 칼을 휘두를 자만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어.
갖추어야 할 것
멋들어진 칼솜씨와 훌륭한 몸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민첩함감수해야 할 것
뿌린 만큼 돌아오는 적들의 칼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