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캐치 어 파이어> 뉴욕 시사회
2006-11-08
글 : 양지현 (뉴욕 통신원)
그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필립 노이스 감독의 신작 <캐치 어 파이어>는 8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정책을 고수한 백인정권과 저항세력 사이의 관계를 패트릭 차무소(데릭 루크)라는 실존 인물이 평범한 가장에서 급진파 해방운동가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다른 할리우드영화처럼 백인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지도 않았고, 영웅주의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1980년, 남아공 시쿤다 정유공장에서 공장장을 하던 패트릭은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는 평범한 가장이다.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서 아내 프레셔스가 원하는 가재도구를 장만하고, 어린 두딸을 꼭 안아주면서 행복해한다. 휴일에는 동네 어린이 축구팀을 코치하고, 아프리카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반정부단체 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방송을 몰래 듣는 장모에게 면박을 준다. 그가 백인 정부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다. 아무리 비인간적이라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무 말 없이 감내했다.

그러나 정유공장에 게릴라 공격으로 폭발사건이 터지고, 패트릭과 다른 공장직원이 가담혐의로 한밤중에 어디론가 끌려간다. 보안 담당자 닉 보스(팀 로빈스) 대령과 부하들은 끊임없이 고문한다. 패트릭은 무죄를 주장하지만, 사랑하는 아내까지 고문당하자 결국 거짓 자백을 한다. 하지만 거짓 자백이란 것을 알게 된 닉은 패트릭을 풀어준다. 이제 더이상 고개를 숙이고 순종할 수만은 없게 된 패트릭은 ANC 멤버가 된다. 혹독한 훈련을 받고 그는 다시 시쿤다 정유공장으로 돌아가 시설물 폭파를 감행하지만 곧 체포되고 10여년간 정치범 수용소인 로빈아일랜드에 갇힌다. 이곳에서 넬슨 만델라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자유의 몸이 된 뒤에도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복수보다는 용서를 택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 패트릭을 연기한 데릭 루크는 실제 패트릭과 함께 넬슨 만델라 등 정치범들이 수감됐던 로빈아일랜드 교도소를 찾아갔다. 루크는 “패트릭이 바닥에 깔린 허름한 널빤지로 된 잠자리에 누워보라고 했다. 잠시 누웠는데도 너무 딱딱하고 불편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만델라가 18년간 살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앤트원 피셔> 등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였지만 노이스 감독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겨줘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았다고. 그러나 캐릭터를 이해하게 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미국인의 시선으로 본 아프리카로 이 작품에 접근했지만, 결국 아프리카인(아버지가 남아공 출신)인 내가 다시 고향으로 귀환한 여정인 것을 느끼게 됐다.”

극중에서 백인경찰들은 ANC를 테러리스트 조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캐치 어 파이어>를 리뷰한 대부분의 미국 미디어에서도 ANC 멤버를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하면서 이라크전을 비롯한 현대사회와의 대비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닉 보스 역의 팀 로빈스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을 강조했다. “ANC는 구조물 폭파나 경찰서 공격 등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본적인 인권을 원했고, 이를 억제하는 남아공 백인 정부의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한 것이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표현의 자유와 기본적인 의료혜택, 오후 8시 이후에도 길거리를 다닐 수 있는 권리와 정식고발 없이도 혐의만으로 무한정 감금이나 고문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원한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테러리스트인가.”

실제 주인공 패트릭 차무소는 90년에 출소한 뒤 만델라 정권시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중년 아저씨가 된 패트릭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에이즈나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이를 위한 ‘투 시스터스’(www.twosisters.org.za)라는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세 자녀는 물론 고아원의 85명 아이들을 모두 입양했다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내 경험담이나 인생철학을 말해주긴 힘들다. 하지만 역사의 중요성과 용서만이 해결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캐치 온 파이어>의 극작가 숀 슬로보와 프로듀서 로빈 슬로보는 남아공의 유명한 민족운동가 조 슬로보와 루스 퍼스트의 첫째딸과 막내딸이다. 어린 시절 반대파에 어머니를 잃은 숀은 88년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어 월드 어파트>라는 작품을 썼다. 이 작품 역시 아버지가 고위멤버로 활동했던 ANC의 이야기를 다뤄 슬로보 자매에게는 상당히 각별했다고.

한편 지난 10월 말 미국 내 개봉된 이 작품은 10월31일 현재 233만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리는 데 그쳐 10위권 진입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캐치 어 파이어>와 같은 인간의 기본권리를 위한 투쟁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하고,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