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아일랜드의 푸른 꽃,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킬리언 머피
2006-11-09
글 : 김혜리

권총을 쥔 남자가 떨고 있다. 그는 총구 앞의 소년에게 묻는다. “편지는, 썼니?” 분홍빛 뺨의 소년은 순하게 고개를 젓는다.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글도 못 읽는걸요. 데미안 형, 나 그 언덕에 묻어주세요.” “그래. 그 교회 있던 곳 기억나지? 거기 묻어줄게.” 지주의 하인인 소년은 고용주의 협박에 못 이겨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소재를 누설했다. 지도부는 남자에게 배신자의 처단을 명했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처형하는 것일까. 단말마에 몸서리치는 쪽은 형이라 불린 남자다. 총구가 구역질하듯 불을 뿜고, 넋을 잃어버린 남자는 휘적휘적 화면 저쪽으로 걸어나간다. 넋을 잃은 채. 켄 로치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킬리언 머피(30)가 분한 의학도 데미안은 상냥하고 예민한 성품 때문에 전사(戰士)가 된 젊은이다. 의사로서 미래를 보장하는 런던행 열차에 오르려던 그는 플랫폼에서 차장과 기관사를 폭행하는 영국군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전투 중에도 그는 다치고 아픈 사람 곁으로 다가가 보살핀다. 그는 싸우는 자인 동시에 돌보는 자다. 킬리언 머피는 엄살이 가미되지 않은 예민함을 표현하는 데에 적격인 배우다. 그는 감정이 숨을 곳이 마땅치 않은 얼굴을 가졌다. 잔주름까지 올올이 선명한 입술은 방심하여 살짝 벌어지기 일쑤고, 도드라진 목울대는 마른침이 넘어가는 품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수 높은 파란 칵테일을 얼린 듯한 눈은 종종 대사보다 앞서 말을 하는데, 낙타의 그것을 닮은 무성한 속눈썹은 눈동자의 과민함을 강조하는 것이 고작이다. 가는 목과 좁은 어깨는 남자아이들이 사춘기에 거쳐 가는 불균형한 비례의 외모가 고착된 모양새다.

킬리언 머피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배경, 아일랜드 코크 지방에서 태어났다. 굉장한 우연은 아니고, 배우의 이름값에 무심한 켄 로치 감독이 애초 고향만 보고 캐스팅했다고 한다. 프랭크 자파를 숭상하는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청춘을 구가한 머피는 연기로 관심을 돌려 연극 <디스코 피그>(1996)로 주목받았고, 이를 각색한 키어스텐 셰리던 감독(짐 셰리던 딸)의 동명영화가 스크린 출세작이 됐다. 하지만 ‘킬리언’이라는 별난 이름을 사람들이 제대로 발음하기 시작한 것은 대니 보일 감독의 좀비영화 <28일 후…>(2002)부터다. 그는 분노 바이러스로 초토화된 런던의 한 병실에서 홀로 깨어난다. 대니 보일은 ‘황색 예수’를 연상시키는 킬리언 머피의 앙상한 알몸과 퀭한 눈의 극접사 숏으로 인상적인 오프닝을 뽑아냈다. 머피는 이 영화 도입부에서 15분쯤 “누구 없소?”를 외치는데 여기 화답한 것은 할리우드였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3)와 <콜드 마운틴>(2003)의 작은 역을 거쳐 킬리언 머피는 웨스 크레이븐의 <나이트 플라이트>(2005)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에서 중요한 악역을 맡았다. 두 악당은 모두 육체적으로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그래서 꼼수나 독을 쓴다. 비열한 인질극을 벌이는 <나이트 플라이트>의 암살범 잭슨 리프너는 <나이트메어>의 프레디 크루거처럼 걸핏하면 자빠지고 쩔쩔맨다. <배트맨 비긴즈>의 가냘픈 닥터 크레인은 ‘푸른 꽃’에서 채취한 독물을 합성하고 공포 가스를 살포한다. 조금만 움직여 큰 위세를 부리는 것이 킬리언 머피식 악한이다. 남녀 양성에 호소하는 관능은 머피의 또 다른 무기다. <배트맨 비긴즈>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어떡하면 닥터 크레인의 안경을 벗기고 클로즈업할까 고심했다. 닐 조던 감독은 <브랙퍼스트 온 플루토>(2005)에서 그를 런던의 여장 남성 카바레 가수로 캐스팅했다. 머피는 요란한 겉치레 대신 여자처럼 사고하는 데에 주력했고 호평받았다.

완성된 스크립트 없이 촬영일 아침 그날 벌어질 상황을 알려주는 켄 로치 감독의 연출법은 킬리언 머피의 내성적인 연기와 편안하게 어울린 모양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마친 머피는 “내 생각엔 모든 영화를 이런 식으로 찍어야 한다”는 소감을 내놓았다. 켄 로치 감독은 “그의 성실성은 투명하다. 눈을 통해 훤히 읽힌다”고 평했다. 킬리언 머피는 욕심이 작다. 1년에 한편 영화를 찍고 나머지 시간은 지하철에서 사람을 관찰하고 기타를 치며 가족과 보내면 대만족이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늘 고통 속에 뒹굴어야 한다고 생각진 않는다. 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보다 무엇을 하기 싫은지를 훨씬 명백히 안다.” 관객으로서도 섭섭할 이유는 없다. 연비 높은 배우가 열연을 즐겨하면 보는 사람도 힘든 법이다.

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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