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잔혹한 출근>의 오광록
2006-11-08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이혜정
가을의 평화처럼, 내추럴하게 살고 싶을 뿐이지

잠깐 머무르는 장소마저 자신의 무대로 만들어버리는 배우들이 있다. 배우면 당연한 것 아니겠나 싶지만, 모두 그렇진 않다. 체화된 몸의 리듬, 나름의 철학과 믿음의 실현이 있을 때 그렇게 되고, 오광록이 그렇다. 조연으로 많이 등장한 오광록을 주연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하게 되는 것도 영화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자기 무대화’의 독창적 능력 때문일 것이다. <잔혹한 출근>에서도 오광록의 자리는 분명하다. 만나보니 말도 연기의 리듬과 비슷하여서, 끝났나 싶어 물어보려 하면 다시 이어지고, 덧붙이나 싶어 기다리면 그냥 쳐다보고 있다. 특유의 굴곡이 있다. 오랫동안 시어와 함께 살아 그런지 어떤 답변은 거의 시적이다. 종종 쓰인 말줄임표는 더듬거리는 시간을 활자화한 것이 아니라, 천천히 생각하고 말하는 시적 침묵의 시간을 대신하여 쓰였다. 최근 출연작 <잔혹한 출근>과 그 밖의 삶과 연기의 몇 가지에 대해 느리게, 느리게 오광록이 말한다.

-텃밭 가꾸기는 잘되고 있나.
=지금은 가을이니까 배추다. 봄에는 오이, 가지, 깻잎… 6년차니까… 실력이야 많이 늘었다. 다 유기농이다.

-<잔혹한 출근>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김)수로씨가 시나리오를 나에게 건네줬고 다리 역할을 해줬다. 그렇게 해서 감독을 만나게 됐고. 내가 그동안 맡아오던 역할하고는 좀 다르다. 내가 볼 때는 일단은 다혈질이고, 아무나 봐도 말 까는 대단히 독불장군이고, 무남독녀하고 사는데 소통도 잘되지 않는 외로운 인물이다. 그래서 54살에서 57살 정도는 됐겠다 싶어 흰머리로 칠하고, 턱수염에도 흰 칠을 했다. 만약 40대가 그런다고 하면 관객하고 만날 수 있는 소통의 거리를 떨어뜨려놓을 것이다. 돈이 아주 많아서 돈을 시시하게 여길 정도로 럭셔리한 회장님이다. 버스라고는 처음 타보는… 음… 승용차가 없으면 초등학교 때 학교도 안 갔을 인물이다. 하지만 딸과의 사랑을 찾아가게 되는 마지막 전환 부분에서 리얼리티가 찾아지지 않으면, 그 만들어놓은 캐릭터라는 게 다 날아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연기했다.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집안에서 노래방 기기로 노래하는 장면인데, 영화 속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주변의 평은 어떻던가.
=음… 그런가… 영화하는 동지들은 그 장면에서 평소의 내 모습이 생각나서 많이들 쓰러졌다고 한다. 처음 시나리오에서는 노래하는 게 아니라 주식 그래프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스탭들하고 회식할 때 노래하면서 놀았는데, 그걸 보면서 프로듀서가 저기서 저 선배가 주식 그래프를 보는 건 너무 뻔하고, 어차피 돈 많은 회장님인데다 고독한 인물이니까 자기 서재에서 노래하고 있으면 어떨까 해서 감독에게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내 고향 충청도>를 부르려고 했다. 근데 그게 외국곡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애창곡 중에서 찾아왔다. 그중에는 <빗속의 여인>도 있었는데, <밤에 떠난 여인>으로 결정을 하게 된 거다.

-술자리에서는 노래를 즐기는 타입인가.
=그럼, 술자리라는 게 동무들하고 정겹고 즐겁게 놀려고 있는 건데….

-그럴 때 자주 부르는 노래는 뭔가.
=<미련> <밤에 떠난 여인> <빗속의 여인>, 뭐 <내 고향 충청도>는 다 같이 부르기 좋고. 오래된 노래이긴 하지만 곡조들이 좋아서 하는 건 <물새 우는 강 언덕>. 맑고 서정적인 것도 좋아하고, 좀 쓸쓸한 것도 좋아하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같은.

-그중 속도가 빠른 건 없는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빗속의 여인>이 좀 빠르다고 봐야지.

-김수로가 추천을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처음에는 럭셔리한 회장님 역할로 나를 생각 못했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맡아왔던 역할들도 그렇고…. <흡혈형사 나도열> 때도 김수로씨가 나를 추천했는데 그때는 아마 그 역이 바로 딱이겠다 했던 거고, 이번에는 생각을 못하다가 내가 그런 파격을 지닌 인물로 출연해도 잘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읽었을 때 그 생각을 했다. 그래서 거뜬하게 한번 치러보리라 했다. 이 인물도 결국은 전형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 일관된 작업인데, 표현방식에서 그동안 눌러왔던 것이라면 이번에는 터뜨리고 그대로 내뱉어버린다… 그런 면에서 사뭇 달라진 것이다.

-촬영은 즐거웠나.
=즐거웠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스탭들간의 소통이 너무 고요하게 잘 이뤄졌던 것 같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춘다고 가정하면, 그리고 차를 마시고 있다고 가정하면, 잡음이 들려오지 않고 깨끗하게 펼쳐지는 듯한… 그런 느낌들이 들어 좋았다. 다른 잡음에 섞이지 않고 연기만 하면 됐다. 나는 첫 시나리오를 정독하는 스타일이다. 그 첫 느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바깥에서 전체 호흡을 놓고 낯설게 바라봤을 때의 그 첫 느낌을 되도록 상기하려고 한다. 규정짓거나 전형 같은 것은 그려놓지 않는다. 코드가 가는 길만 기억해놓으려고 한다. 호흡은 라이브로 일어나는 현장성에 많이 걸게 된다.

-이런저런 인터뷰를 읽으면서 느낀 건 방금 말한 그런 전형에 대한 경계심이 확실하다는 거였다.
=익숙해지는 것이 편해지는 것도 있지만, 설렘이 줄어들고, 신선함도 사라져가고… 삶이 지루해져가는 것 같기도 하다. 20대 때부터 그랬지만, 삶의 추구는 항상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워낙 체제가 우선적이고, 제도가 앞서가고, 군사문화가 강하고, 누르는 문화고, 자유를 침범하고, 자연스러움을 훼손하는 것들이어서 그런 것들에 대한 저항은 아주 강렬했다. 나는 내 속의 푸른 저항을 사랑하고 있고… 또 자유라는 게 온전히 지켜지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채로운 문화와 파격들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말을 듣다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20대 초반에는 어떤 타입의 젊은이였나.
=… 음… 20대 초반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천사들이다. 순수한 천사들…. 남자나 여자나 20대 후반 넘어서면서 각자에게 숨겨져 있던 천재성의 시간들이 온다. 자기에 대한 강한 충동들, 사회에 대한 저항들이 있으니 당연히 그러하지 않았겠나. 나 역시 20대에 시를 쓰고 무대 작업을 했었으니까.

-혹시 200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아버지상을 많이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아버지이긴 한데 권위는 찾아보기 힘든 자유인의 느낌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 <미스터 소크라테스>에서도 좀 독특하다. 도둑놈 아버지인데… 그것도 참 즐겁게 찍었다. 딴 거보다 난 이게 좋았어. (한쪽 팔을 들어올려 영화 속 흉내를 내며) X까, 이렇게 하는 거. 시원시원해. 아버지가 양아치 아들하고 비등비등할 정도라.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삼류 작가 로맨티스트 아버지도 그렇고. 그건 내 일상하고 많이 닮아 있다. 삼류 작가에다, 철없는 친구 같은 로맨티스트. <소년, 천국에 가다>에서 아버지는 영혼이고.

-대개 배우들이 자신의 연기가 얼마나 리얼리티를 확보할 것인지에 주안점을 두는 데 반해 리얼리티보다는 어떤 환영의 영역을 창출해내는 유례없는 배우들 중 한명이 아닐까 싶다.
=음… 아무튼… 내 마음의 추구들이 항상 묻어 나타나는 것일 거다.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처럼 던져주고 싶은 게 작업을 해가는 내 스타일이고, 그게 내가 추구하는 것의 소중함이니까. 하지만 이번 영화는 딸과의 사랑을 찾는 짠한 부분에 대한 리얼리티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이번 영화 <잔혹한 출근>에서도 이 역할을 다른 사람이 했으면 이런 분위기가 안 생겼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오광록적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누가 마음을 어떻게 보이는 것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게 사실은 영화를 찍는 감독들의 즐거움이면서 궁금증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대사와 상황을 놓고서도 삶은 전혀 다른 세계를 지니니까.

-오광록적인 것을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쓰려고 하는 경우도 생길 텐데.
=나보고 날 패러디하라고 하라고 하면 안 할 거다. 낯설게 찾아가겠다고 하면 기꺼이 만나게 될 거고.

-자유인 내지는 기인이라는 평을 들어본 적 있나.
=내가 기인 같지는 않다. 독특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으니까 그 말은 그분들에게 걸맞은 것 같고….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기인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그냥 내추럴하게 살고 싶은 거고… 당연히 자유는 획득하고 싶은 것이고… 정말 깊고 그리운 건 가을에 찾아오는 평화에 대한 생각들이랄까….

-우정출연, 특별출연을 많이 했다.
=잘못하면 우정출연 배우 되겠다. (웃음) 그래서 수를 좀 줄이려고… 음… 너무 그런 제의가 많아… 처음 작업하는 동지들도 그런 특별출연 제의들을 많이 한다. 시나리오를 보고 꼭 해야 할 거면 한다. 그게 아니고, 말했듯이 그동안 나의 작업 성과로 나를 패러디하는 영화들은 내가 또 잘 거절한다. 단번에 거절할 수 있는 첫 번째 대목이 바로 그런 것일 거다.

-주연에 대한 욕심이나 소신 혹은 주변의 권유는 없나.
=독립영화에서는 그런 제안들이 있었고… 뭐… 투자자들이 투자를 해야지 주연이 되는 것이고… 투자자들이 좀더 생각이 신선해져야지…. (웃음)

-올해부터 매니저먼트사에 소속되어 일하는데 달라졌다고 느끼는 점이 있겠다.
=그런 건 없다. 괜한 불편함들은 없어졌다. 길동무가 생겼으니까 현장까지 잘 안내해주고, 스케줄 문제도 그렇고. 배우가 가장 불편한 게 계약문제인데, 그런 거 때문에 마음의 불쾌가 생길 일이 없어졌고. 그건 배우들에게는 쓸데없는 커뮤니케이션이니까… 또… 회사도 내 성격을 잘 알아서 내가 원치 않는 작업을 요구하고 그러는 거 없으니까.

-워낙 혈혈단신으로 다닐 것 같은 이미지가 있어서….
=아니다. 거대자본 싸이더스HQ인데…. (웃음) 아무 상관이 없다. 회사도 내가 독립군 스타일인 걸 아니까.

-독특한 어투는 역시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특징이다.
=나를 잃었던 시간이 얼마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말이 느려졌고, 소리도 더 낮아져버렸고… 내 감성이나 종교적인 것도 있고… 시를 쓰다보니까 말을 띄엄띄엄하게 됐고… 느리게 가는 내 삶의 속도를 사랑하게 됐고… 신기한 게으름에 빠져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삶의 방법을 작업에서도 쓰게 된 거다.

-나를 잃었던 시간이라고 하면….
=내용을 말하긴 어렵다. 다 빠져나오기까지 5년 정도 걸렸고. 충격 같은 걸 거다. 사람하고 연루가 된 거기 때문에….

-쓰는 시의 주제들도 방금 말한 그런 것들과 연관이 있나.
=올해는 더욱더 삶이 신비로워졌으면 하는 생각… 일상이라는 건 어느 곳에서나 터덜터덜거리고 낡은 군더더기들이 생기는데, 그런 걸 씻어내고 싶고, 그런 과정 속에서 삶이 더 신비해져서 신선하고 설렜으면 한다. 산다는 것에 더 눈이 떠진다면 좋겠다. 누구 파먹는 시는 쓰고 싶지 않지.

-시 작업을 하기에는 요즘 너무 바쁘겠다.
=시가 뭐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나. 삶의 추구들, 그런 걸 체증으로 갖고 있으면 막막하겠지, 그러다 그걸 짙은 가을바람 느낄 때 퍽 쏟아내기도 하는 거고. 내 속눈썹에 그게 어떻게 묻어나는지 걸어가면서 지켜봐야지.

-고독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그 말의 의미에 애착이 깊은 것 같다.
=20대 후반에 거의 시하고만 시간을 보낼 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시를 쓰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시어로 철학을 하고 싶어하는구나, 라고. 고독은 삶의 본질에 관해서 내게 되묻게 한다. 고독이라는 건 사람이 영혼과 가장 먼저 소통할 수 있는 선물이다. 그걸 선하게 정말 잘 쳐다보면 자기 영혼을 되비춰낼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 같다. 이건 뭐 그동안 많이 이야기한 거고.

-시집을 낼 생각도 있겠다.
=그렇다… 음… 가을이 오면 늘 생각나는 게, 배낭에 원고를 넣고 깊은 산에 들어가 장작을 패고 그리고 군불을 지피면서 눈 덮인 산에서 봄이 오도록 원고정리하고 나와서 시집을 묶어야지, 하는 거다. 지금도 가을이 오면 그런 생각 많이 한다. 마음은 내년 가을쯤에 하나 내고 싶은데… 그런데, 2년 전에도 내년쯤이라고 말했으니… 그 내년이 벌써 지난해로 흘러갔지 않나.

-얼마 전 인터넷에 도배가 된 기사가 있던데. 오달수와 닮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올해의 굴욕이었다는 식의.
=그런 말 안 했다. 제목에만 있지, 기사의 내용에는 그런 게 없지 않나. 누군지 그 기자를 한번 다그쳐봐야겠다. 시리즈처럼 누구의 굴욕, 뭐 이런 게 재미로 있나 본데. 아니, 인생 살면서 오달수랑 나랑 가까이 하는 게 내게 왜 굴욕이 되겠나. 농담이라도 그게 무슨 농담이 될 만한 건가. 달수하고 나하고 관련해서 내가 한 농담은 수박씨랑 사과씨랑 헷갈려 하는 것하고 비슷하지요, 정도다. 나도 그 기사는 인터넷에서 봤다. 달수가 실시간 검색순위 3위인가 4위가 되어 있더라. 남의 인생을 갖다 그렇게…. (한참 침묵) 수박도 맛있게 먹고, 사과도 맛있게 먹고 하다보면 자연히 뭘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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